75화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애초 내 목표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되새긴 내가 입을 열었다.
‘옛날 생각’이라는 단어는 겨우 열다섯인 내가 꺼내기엔 조금 어색한 단어였지만, 분명 옛날이었다.
크렘과 처음 만난 게 그때였지. 그때는 크렘이 원작의 등장인물인 줄도 몰랐지만.
그러고 보니 그때 내가 감사 인사를 했던가?
케케묵은 옛날 일을 떠올리려니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게 데면데면한 크렘의 태도가 어색해 괜히 옛일을 들춰보고 있으려니, 크렘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일부러 절 따라오신 겁니까?”
“네?”
“자의식 과잉이라고 여겨질까 직접적으로 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크렘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민망하기로는 그보다 내가 더할 것이었다.
그간 크렘과 친해지기 위해 각종 술수를 쓰려다 실패했던 과거가 스쳐 지나가면서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따, 딱히 크렘 님 때문이라기보단… 아빠 얼굴도 보고 좋잖아요.”
말을 더듬어버린 게 패착인가.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 둘러댄 티가 났다.
이래서야 오해를 사도 할 말 없군.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은 분위기였지만 몽블랑에게 미남 타령을 했던 다섯 살 적을 떠올리면 버틸 만했다.
딱히 면역력을 키우려고 했던 짓은 아니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철면피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든 버티고 있으려니 크렘이 옅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사실 쉬제트가와의 친분은 제게도 좋은 일입니다. 백작님의 평판이 워낙 훌륭하시기도 하고요.”
갑작스러운 아빠 얘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크렘이 말을 이었다.
“제가 하필이면 위험하다는 변방까지 나온 것에 그 이유가 없다고 볼 순 없겠죠. 게다가 쉬제트 백작님의 평판은 오히려 바움쿠헨국보다 이국에서 더 좋거든요. 변방의 수호자 쉬제트 백작이라고 하면 아마 바움쿠헨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우리 아빠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가문 기사들에게서 듣던 주접이 과장이 아니었다니, 마르크의 아빠 사랑도 반응도 콩깍지 씐 사람의 그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레이디, 아니 크레페 님과 친분을 쌓기에는 아시다시피…….”
크렘이 말을 멈추고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대체 빨간 눈이라는 것을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크렘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라면 나도 딱히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해해요. 하지만 여기 수련회에 참가한 카눌레 오빠랑 에클레어 언니는 벌써 크렘 님에 대해 알고 있잖아요. 우리 중 누구라도 말할 생각이면 진작 소문이 났겠죠. 그러니까…….”
그러니 우리를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키이이익!”
그때, 칼로 쇠를 긁는 듯한 괴성과 함께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나는 홀린 사람처럼 위를 올려다보았다.
역광이라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하늘을 날고 있는 그것은 분명 새치고는 컸다.
“으아악!”
“몬스터다!”
그림자의 바로 밑에 있던 나보다 주민들의 반응이 먼저 터져 나왔다.
한곳에 모여 있던 주민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자 아빠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들을 진정시켰다.
“큰 소리가 몬스터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진정하십시오!”
날개 펄럭이는 소리가 선명했다.
아빠의 말을 들은 주민들은 입 하나 벙끗하지 않고 이 사태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다행히 보이는 몬스터는 한 마리뿐이었고, 이쪽에 내려올 생각도 없는 듯했다.
몬스터는 꼭 정찰이라도 하듯 일행의 머리 위를 유유히 스쳐 숲 쪽으로 멀어졌다.
“원인은?”
아빠가 곁에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아직 파악 중입니다.”
“출몰 원인이 파악될 때까지 공격을 금한다. 우선 거주지를 잃은 난민과 함께 철수할 것. 혹시 모를 2차 습격에 대비해 요새에서 전열을 가다듬는다!”
“예.”
결국 그 돌발 사태에 의해 일행은 스무 명 남짓 되는 주민들과 함께 다시 철수해야 했다.
우리는 다시 짐을 마차에 싣고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당연히 올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긴장된 분위기였기에 나도 덩달아 숨이 막혔다.
“괜찮아?”
에클레어가 내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신경 써주는 건 고마웠지만 나는 아직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하지만 에클레어는 내 상황에 아랑곳 않고 재차 말을 붙였다.
“갑자기 왜 그런 건지 모르겠네. 변방이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토벌이 다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수련회 인원을 받았을 것 같진 않은데.”
“끙…….”
“너 공부 잘하잖아. 혹시 짐작 가는 이유라도 없어?”
“숨넘어갈 것 같은 애를 붙잡고 물어봤자 답이 나오겠냐?”
카눌레가 톡 쏘는 말투로 끼어들었다.
“왜, 마탑까지 다녀온 인재이니 알 수도 있지. 거기 도련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에클레어가 크렘에게 화제를 돌렸다.
내가 했던 말이 그럴싸하게 들린 건지, 아니면 단순히 학생들끼리 붙어있는 게 안심이 됐는지 크렘은 우리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걷고 있었다.
“…….”
그러나 갑작스레 화살이 제게 향하자 크렘의 눈동자에 당황의 빛이 서렸다.
말을 붙였던 에클레어가 곧바로 샐쭉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됐수다. 재미없게.”
“아, 아뇨… 크레페 님이라면 아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렘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에클레어는 제가 물어놓고도 대화가 이어질 줄 몰랐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다시 말을 붙였다.
“하, 하하! 그렇죠? 그나저나 크렘 님이 크레페를 ‘크레페 님’이라고 부르는 통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건 알아요?”
“소문?”
가십에 별 관심이 없는 카눌레가 날 대신하듯 반문했다.
나야 카눌레와 에클레어 말고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었기에 당연히 처음 듣는 소리였다.
에클레어가 몰랐냐는 듯 카눌레에게 말했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냐고! 그도 그럴 게, 크렘 님은 다른 귀족 여성을 모두 레이디라고 부르잖아. 그러다 보니 크레페한테 괜히 싸늘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진짜 사이를 감추려는 게 아니냐는 말이 있단 말이지.”
“웩.”
카눌레가 한 글자로 감상을 일축했다.
그 모습에 에클레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무튼 다들 조심해요. 아까 보니 몬스터가 갑자기 왜 나타났는지 아직 원인 파악이 안 된 것 같던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주변에 있는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에클레어가 한 말마따나 대부분 주변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시시덕거리는 건 우리뿐인 듯했다.
그러다 문득 기사의 어깨너머로 우리와 동행하던 주민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깜짝 놀라 시선을 피하고 이웃인 듯한 사람과 속닥거렸다. 그러자 그 상대 남자가 험악한 얼굴로 이쪽을 쏘아보았다.
나를 보는 것 같진 않은데…….
“크레페? 괜찮아?”
“어, 엉.”
에클레어의 물음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발을 놀렸다. 일단 지쳐 쓰러지기 전에 복귀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 * *
다행히 요새에 도착할 때까지 추가 습격은 없었다.
그러나 몬스터들이 이상 행동을 보인 이상 언제 상황이 급변해도 이상할 게 없었기에 우리는 여러 번에 걸쳐 조심하라는 주의를 들어야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각자 방으로 돌아가 휴식하십시오. 해가 완전히 진 후에는 습격의 가능성이 있으니 미리 쉬어두는 게 좋을 겁니다.”
“예.”
2차 회의 말미, 카눌레가 학생 대표 격으로 대답하자 아빠는 우리를 먼저 회의실에서 내보냈다.
카눌레는 그 회의에 끝까지 참석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듯한 눈치였다.
“실무를 좀 겪어보고 싶었는데.”
“돌발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겠죠.”
카눌레의 투정 같은 말에 크렘이 위로하듯 말했다. 나도 그에 거들었다.
“그래, 학생을 이해시키면서 진행하긴 힘들 테니까.”
“그래도 무섭다고 물러나 있을 거면 수련회를 왜 왔겠어?”
에클레어 역시 카눌레처럼 탐탁잖아 하는 얼굴이었지만 별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들이 남은 일을 논의하는 동안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다 같이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기사들에게 안내를 받아 온 듯한 주민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적 같은 옷차림에 새털처럼 엉킨 머리카락.
지금까지 가까이에서 본 평민이라곤 파타슈 정도였던 나는 그들의 행색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같이 먹는 거야?”
에클레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은 후에야 아차 하며 정신을 차렸다.
“자, 빨리 먹고 가서 쉬자. 아까 들었잖아. 밤에 습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쳇.”
내가 말리자 에클레어는 대답을 대신해 가볍게 혀를 찼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묵인해 주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꺼림칙해 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한 나도 잘한 건 없었다.
나는 그녀의 팔을 끌고 배식구로 향했다.
저쪽이 쪽수가 많긴 하지만 우리가 귀족이라는 걸, 적어도 보통의 평민은 아니라는 걸 저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괜한 시비에 휘말리진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몬스터를 불러온 게 누군데…….”
“잭!”
잭이라고 불린 남자는 아까 오는 길에 우리 쪽을 매섭게 노려보던 그 사람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는 남자를 말리려는 듯 그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남자는 그녀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고 되레 손가락질까지 하며 외쳤다.
“저 악마의 눈 때문이잖아! 우리가 모를 것 같아? 아까 오면서도 저들끼리 시시덕거리질 않나!”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카눌레가 있었다.
악마의 눈?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그래, 그건 분명…….
‘실은 영지 내에서 빨간색 눈은 그리 인식이 좋지 못합니다. 악마의 눈이라느니 해서요.’
‘저희 영지를 포함한 북부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같은 거예요.’
북부. 북쪽 변방.
그렇구나.
나는 예전 일을 가만히 되짚다가 크렘을 돌아보았다.
갈색 눈의 크렘은 초조한 듯한 기색으로 제 반지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작게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을 쳤다.
남서쪽에 있는 쉬제트 백작령과 달리 커스터드 자작령은 북부에 있었다.
제법 부촌이라 할 만한 커스터드 영지에서도 그런 상황이라면, 이곳 같은 변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귀족이 아닌 이들과는 만날 일조차 드물었기에 피부로 와닿지 않았던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