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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74)화 (74/181)

74화 

“저분이 네 아버지랬지?”

에클레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쉬제트 백작이라는 소개까지 들었으면서 굳이 물어보는 게, 그녀가 보기에도 아빠의 태도가 남 대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으응. 오랜만에 보는 거긴 하지만…….”

“변방이니 방심할 수가 없겠지.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학생을 받았는데 바로 다음 날 습격이 있기도 하고 그렇잖아.”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에클레어가 위로하듯 말했다.

하지만 사실 위로가 필요한 건 나보다 카눌레일 것이었다.

그는 오래전 아빠에게서 선물받았던 마법 검, 정확히는 마나 차단 검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위험한 변방이라는 핑계로 그 검을 가져온 것도, 아빠에게 그걸 자랑하기 위해서인 게 분명했다.

“…쳇.”

아니나 다를까, 카눌레는 허리춤에 차고 온 검을 괜히 툭 치고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밥 먹으러 가자.”

에클레어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식당으로 이끌었다.

말린 육포와 감자수프, 샐러드인 척하는 풀때기 몇 가닥. 반찬은 그게 전부였다.

오면서 먹은 스튜와 크루아상이 진수성찬으로 보일 정도니 말 다 했다.

환경 자체도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반은 목조고 반은 천막으로 된 부실한 건물은 제대로 된 식당이라기보다 임시 급식소처럼 보였다.

“이렇게 험난할지는 몰랐는데…….”

나는 반도 안 찬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반도 안 찼다고 해봤자 겉으로는 별로 표가 안 났지만.

에클레어가 포크로 풀때기를 뒤적이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으휴. 크렘, 그 느끼한 놈 때문에 이게 다 뭐야.”

“미안.”

“…쳇.”

내가 사과하자 에클레어는 더 투덜거리지 못하고 혀를 찼다.

그녀에 대해서는 미안함도 고마움도 있었다. 단순히 내 연애 사업(?)만을 위해 수련회까지 따라와 주다니.

그러고 보면 나라고 검술까지 배워가면서 크렘에게 접근하고 싶던 건 아니었다. 다른 방법이 하나도 안 먹히니 어쩔 수 없던 거지.

“아, 잠깐만.”

에클레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조금 떨어진 곳, 식당 안쪽에 크렘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우습게도 크렘의 곁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변방을 지키는 피낭시에 제1기사단, 그러니까 쉬제트가의 갑옷을 입은 우리 가문의 기사들이었다.

정작 그 집안의 딸인 나는 크렘의 근처에도 못 가는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크렘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그냥 이것만 드리러 왔어요.”

“예?”

나는 버터 향이 밴 천 주머니를 열고 하나 남은 크루아상을 꺼내 크렘에게 건넸다.

“아까 저 때문에 스튜도 못 드셨잖아요. 다른 얘기 하러 온 건 아니니까 그냥 드세요.”

“…….”

내가 더 다가가려 하지 않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크렘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에클레어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네가 먹을 걸 넘겨주다니, 참사랑이구나.”

“시끄러, 누가 들으면 오해한다구.”

나는 새침하게 말하며 빈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오해한 사람이 한 명 있는 것 같았다, 카눌레의 저 표정을 보니.

* * *

“언니 먼저 들어가.”

“너, 밤에 무서우면 내려와. 알았지?”

에클레어의 숙소는 이곳 검은 탑의 2층이었고 나는 3층이었다.

에클레어는 대체 날 몇 살로 보고 있는 걸까 궁금해질 만큼의 반응을 보인 후에야 방에 들어갔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 내가 한 층을 더 올라갔다.

“크레페?”

“끄악!”

코너에서 웬 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하마터면 뒷걸음질을 치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그 괴한이 내 팔을 붙들어주어서 큰 사고는 나지 않았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그래, 기억하는구나.”

덥수룩한 수염에 가린 그의 웃는 얼굴은 여전히 험악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안심이 됐다.

변한 게 없잖아.

나는 괜히 울컥하는 마음으로 그의 허리에 매달렸다.

아빠가 당황한 듯 서툰 손동작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그 손길에 더 눈물을 참기 어려워질 뻔했다는 것은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미안해. 오랜만이지?”

“킁! 그래도 아빤 그대로네요.”

아빠의 옷자락에 코를 풀고 대답했다.

덥수룩하게 자라 아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수염을 자르면 전보다 나이 든 모습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빠의 첫인상과 똑같았다.

“하하, 고맙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사람들 있는 데서 아는 척할 순 없으니까. 곧 여기에 감사가 오거든.”

“감사요?”

“말로는 견학이라지만 뭐, 감사겠지. 몽블랑 후작님과 바움쿠헨의 뢰드그뢰드 후작님이 오시는데…….”

몽블랑 후작.

그 이름을 듣자 저절로 얼굴이 굳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부터 그에게 일체 편지하지 않았지만, 그동안에도 매년 마론 슈 선물은 꼬박꼬박 도착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한사코 받지 않았다.

지금껏 도착한 마론 슈들은 버려지거나 집안사람들이 나눠 먹거나 했을 것이었다.

솔직히 몽블랑 후작에 대한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크레페?”

“아, 아니… 몽블랑 후작님이 왜요?”

“그러니까 그분이 곧 견학을 오신다고……. 아니, 아니다. 신경 쓸 것 없어, 내부 사정이니까.”

아직 학생인 내게 할 말은 아니었다는 듯 아빠가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한층 어두워진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아빠가 날 위로하듯 어깨를 도닥였다.

“미안하구나. 아무튼 너만 신경 써줄 수는 없어. 네가 걱정되긴 한다만…….”

아빠는 아무래도 오랜만에 만난 나를 더 챙겨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괜히 아빠를 신경 쓰이게 만든 것 같아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놀러 온 것도 아닌데.”

아빠가 마주 미소 짓고 내 어깨를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그럼 난 카눌레한테도 가봐야겠다. 그 녀석도 정말 많이 컸던데, 그 검을 준 게 나라는 건 기억하려나.”

아무래도 아빠의 머릿속에서 나나 카눌레는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플러스 요소가 되는 것 같군.

나는 아빠의 즐거움을 굳이 빼앗지 않고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주다가 문득 떠올라 물었다.

“아, 혹시 팀 짤 때 저랑 크렘 님이랑 한 조로 넣어줄 수 있어요?”

“응? 어차피 그렇게 나눌 생각이긴 했는데…….”

‘왜?’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기분에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얼마 안 있어 부스스한 머리칼에 가려진 아빠의 눈썹이 팔자로 기울었다.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커선…….”

“아, 아빠, 나 숨 막혀.”

마구 포옹해 대는 갈레트의 성격은 유전이었던 건가.

* * *

어제, 신경 써주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하다는 아빠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놀러 온 것도 아닌데.’

대체 내가 왜 그랬지?! 신경 써달라고 당당히 말할걸!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침 회의는 식사 후에 이뤄졌다.

조 편성은 어제 아빠와 얘기했던 것처럼 나와 크렘이 한 조, 카눌레와 에클레어가 한 조가 됐고, 그 회의가 끝나자마자 행군이 시작됐다.

이미 들은 대로 우리의 임무는 ‘마을의 재건’을 돕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마을까지 가는 길에 쓸 승마용 말이 부족하다는 데 있었다.

몇 마리 있는 건 모두 건축 자재를 싣는 짐마차용 말들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 물품을 쓰지 말라는 얘기만 없었다면 지금보단 훨씬 사정이 나았을 텐데.

몰래 쓴다고 해봤자 내 체력 수준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만 덜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기만 해도 에클레어나 카눌레가 눈치챌 게 뻔했기에 나도 악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다들 고생하는 와중에 편법을 쓰는 것도 영 안 내켰고.

여기서 쓰러지면 승마용 말 한 마리쯤은 얻어낼 수 있을까.

“이곳에서 멈추지요.”

파타슈네 집에서 놀고 있을 브라우니가 신기루처럼 눈앞에 아른거릴 때쯤 행군이 멈췄다.

그나마 다행으로, 내가 참다못해 팔찌의 힘을 빌리기 전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는 행군이 멈추자마자 좀비처럼 흐늘대며 나무 그늘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잠깐 숨 고르기를 하고 땀을 식히는 동안, 아빠가 상황 정리와 함께 해야 할 일을 설명해 주었다.

원체 작은 규모였던 데다 대부분의 가구가 피해를 입은 상태였기에 이곳은 마을이라기보다 부락의 흔적만 남은 폐허 같았다.

듣자 하니 우리가 수련회를 오기 겨우 이틀 전에 습격이 있었다고 한다.

먼 곳의 일인 줄 알았는데, 몬스터로 인해 거처를 잃은 사람들을 눈앞에서 보니 새삼 사태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그럼, 짐을 내리겠습니다.”

아빠는 우리와 달리 판금 갑옷까지 입은 상태로 행군했음에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헥헥거리며 제일 작은 짐마차 뒤에 섰다.

우리는 안내에 따라 일렬로 서서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크렘이 마차에서 짐을 내리면 내가 전달받아 에클레어에게 넘겨주고, 에클레어는 그것을 다시 카눌레에게 건네는 식이었다.

크렘은 내게 물건을 넘길 때마다 손가락이 닿는 걸 경계하는 듯 시종일관 긴장한 모습이었다.

물론 나는 짐을 옮기는 데 정신이 팔려 거기에 따로 반응해 줄 여유도 없었다.

“으으, 이게 마지막이에요?”

“네.”

크렘이 짧게 대답했다.

천으로 여러 번 둘러싼 덩어리가 마지막 짐이었다.

두 팔 가득 들고도 크렘의 얼굴이 반쯤 가려질 정도로 큰 부피였지만, 그가 한 번에 든 것을 보니 이불처럼 가벼운 물건인 듯 보였다.

“윽.”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받자마자 짧은 신음성과 함께 휘청거렸다. 이불이 아니라 깨지지 않게 이불로 둘러싼 다른 물건인 듯싶었다.

방심하고 있던 터라 나는 그 무게로 인해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심…….”

크렘이 반사적으로 날 도와주었다.

짐을 받아 든 내 손 아래를 그의 손이 받쳐주었다.

내가 천 뭉치에 코를 박고 그를 올려다보자, 참으로 오래간만에 나는 그의 빨간색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

다행히 근처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크렘은 말없이 손을 뗐다. 그의 눈동자가 다시 갈색으로 돌아왔다.

나는 낑낑거리며 마지막 짐을 에클레어에게 넘기고 다시 크렘의 앞자리로 돌아왔다.

마무리할 일이 남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지만 그가 말했다시피 우리의 할 일은 일단락된 모양으로, 우리는 조금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옛날 생각이 나네요. 입학시험 때도 제가 넘어질 뻔한 거 도와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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