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73)화 (73/181)
  • 73화 

    학생을 호위하러 따라온 기사가 행렬 끝에 있는 마차에서 몇몇 재료를 꺼내 스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겨우 반나절 되는 여행길에 육포 대신 요리를 먹다니, 어쩐지…….

    “꼭 놀러 나온 것 같다. 그치?”

    에클레어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철없는 소리라고 눈총을 받을지도 모를 얘기였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 말에 내심 공감하고 있었다.

    일단 요새까지 동행하게 된 인원이 크렘과 나, 에클레어와 카눌레로 딱 네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변방이 워낙 위험하다고 소문이 나서 신청 인원이 적었던 건가? 아니면 다른 학년은 다른 요새로 배정받았다거나.

    뭐, 이유야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일단 참가 인원이 적은 만큼 크렘과 친해지기는 더 쉬워질 테니까 기뻐해야지.

    아무튼 기사들을 빼면 다 아는 얼굴이다 보니 도무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뜬 가을 날씨는 맑고,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하고, 향기로운 숲의 흙냄새와 스튜 냄새, 게다가 고소한…….

    “버터 냄새?”

    “크루아상입니다. 일인당 하나씩 나눠 드리고 있어요.”

    학생들의 호위로 동행한 기사가 포대에서 크루아상을 꺼내 건네주었다.

    출발하기 전에 미리 준비한 듯 빵은 이미 식어 있었지만, 그 버터 향에 홀린 나는 군침을 삼키며 받아 들었다.

    “어떻게 알았대. 개코야?”

    에클레어가 웃음기 어린 말을 한 것과 거의 동시에 스튜가 배식됐다.

    생각보다 빨리 나와서 나는 스푼을 들기도 전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눌레 오빠랑 크렘 님은?”

    “저기 왔네.”

    에클레어가 턱짓을 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우리보다 조금 뒤에서 오고 있던 남자들 몫의 마차가 저쪽에 멈춰 있었다.

    카눌레가 허리를 숙이고 마차에서 내렸다.

    포대 자루를 든 기사가 곧바로 크루아상을 건넸다.

    카눌레는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너 먹어라.”

    “응?”

    카눌레가 내게 크루아상을 건네주었다.

    날 챙겨주는 건가 싶어 카눌레를 올려다보자 그가 얼굴을 찡그리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마차가 흔들려서 속이 안 좋아.”

    그러고서 카눌레가 스튜 그릇을 들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날 챙겨주겠답시고 없는 말을 한 것 같진 않았기에 나도 군말 없이 크루아상 두 개를 내 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아껴 먹어야지.

    “후으!”

    에클레어가 뜨거운 스튜를 원샷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벌써 다 먹었어?”

    “많지도 않은걸, 뭐.”

    그녀가 그릇을 내려놓고 갑자기 자리를 비웠다.

    혹시 푸딩 일 때문에 아직도 카눌레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건가 싶어 내가 카눌레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나 카눌레는 뻔뻔하리만치 태연했다. 벌써 다 잊어버렸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거다.

    “…아니,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뒤늦게 수련회 참가 신청한 것도 나 걱정해서 그런 거 맞지?”

    “아빠 보러 가는 거거든.”

    카눌레가 정색했다. 어차피 긍정할 거라고 생각도 안 했다.

    “그것보다 크렘 님은 어디 갔어?”

    함께 식사하는 자리만큼 잡담하기 좋은 데도 없었다.

    나는 아직 한 숟갈도 안 먹은 스튜를 손에 들고 크렘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찾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차 바로 옆에 서서, 크루아상의 포대 자루를 든 기사와 그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표정을 보니 가벼운 잡담을 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친화력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크렘한테 왜 그렇게 신경을 쓰냐?”

    “엉?”

    둔한 카눌레까지 눈치챌 정도로 티가 났나 싶어 내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혹시라도 갈레트의 귀에 이런 얘기가 들어가면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

    하지만 카눌레는 이유를 더 캐묻는 대신 시선을 내리고 스튜를 먹었다.

    다 포기한 듯한 한숨을 내쉬며 그가 중얼거렸다.

    “다섯 살짜리 애가 몽블랑 후작님한테 작업 걸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무튼 그 얼굴 밝힘증 좀 어떻게 해봐. 내가 다 창피하다.”

    “오해거든!”

    반사적으로 빽 소리를 질렀다.

    재빨리 귀를 막았던 카눌레가 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해는 무슨… 윽.”

    갑자기 거대한 무언가가 카눌레에게 돌진했다.

    깜짝 놀란 내가 뒷걸음질친 그때, 에클레어의 외침이 들렸다.

    “푸딩, 힘내라!”

    이제 보니 이쪽으로 돌진해 온 것은 에클레어의 푸딩이었다.

    큼지막한 매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카눌레의 머리를 마구 쪼아댔다.

    “으윽, 이 미친 새가!”

    카눌레가 마구 팔을 휘저으며 먼 곳으로 피했다. 에클레어는 그것을 보며 보란 듯이 허리에 손을 얹고 콧바람을 내쉬었다.

    “흥, 복수다.”

    나는 만화의 한 장면 같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역시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은 기분이야.

    크렘은 결국 우리와 동석하지 않고 곧바로 제 마차에 도로 탔다.

    그와 대화를 나눴던 기사에게 묻자 속이 안 좋아서 스튜는 못 먹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아마 핑계겠지만.

    그래도 아프다고 들어간 사람을 억지로 끌어낼 수는 없었다.

    나는 별수 없이 숟가락만 빨며 크렘이 탄 마차를 빤히 쳐다보았다.

    매달린 굴비를 눈으로만 감상한 자린고비 같은 체험이긴 했으나 다행히 스튜는 제법 맛있었다.

    기사의 솜씨라 투박하긴 해도 밖에서 먹는 음식이었기에 더 각별하게 느껴진 건지도 모르겠다.

    식사 시간이 지나고, 긴 시간 동안 마차 안에 있던 게 답답했는지 에클레어와 카눌레는 말을 타고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에클레어는 내게도 승마를 권했는데,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긴가 보다.”

    하늘이 울긋불긋하게 물드는 저녁 시간, 마차의 창문 밖에서 카눌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쟁여뒀던 크루아상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던 나는 먹던 것을 입에 물고 후다닥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북쪽 변방. 바움쿠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슈트루델 제국의 끝자락. 몬스터들의 공격에 시달리는 최전방이자 아빠와 우리 피낭시에 제1기사단이 있는 곳.

    얼빠진 사람처럼 높은 벽을 쳐다보고 있자,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에클레어가 한 소리 했다.

    “크레페, 위험하니까 머리 내밀지 마.”

    “그래, 승마도 안 배운 꼬맹이는 간식이나 마저 먹어.”

    “배, 배웠거든.”

    잘 못해서 그렇지.

    내 말을 들은 에클레어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에클레어는 날 밀어내고 1등을 차지했다. 내가 승마 시험으로 평균을 다 깎아먹은 덕분이었다.

    아무튼 나는 의미 없는 반항을 더 하는 대신, 다시 마차 안으로 고개를 넣고 남은 크루아상을 한입에 넣었다. 다 식었어도 반죽 결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으으, 버터 냄새 너무 좋아.

    내가 짧은 시간이나마 풍미를 음미하고 있던 그때, 마차가 멈춰 섰다.

    나는 마차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턱을 내려왔다.

    변방의 기사들은 단단히 쌓여 있는 돌벽 앞에 횡대로 서 있었다.

    석양이 반사되어 그들의 갑옷에는 은은한 주황빛이 감돌았고, 기수는 쉬제트의 상징인 페가수스가 수놓아진 깃발을 들고 있었다.

    곧 학생을 인솔하던 교사가 다가가 그들과 뭐라 대화하기 시작하자 카눌레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뭐 해.”

    “으, 응.”

    홀린 듯 서 있던 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열을 맞춰 섰다.

    피이익―

    활공하던 푸딩이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에클레어의 가죽 견갑 위에 앉았다.

    곧 기사단의 대열 사이로 낯익은 산적, 아니 아빠가 걸어 나왔다.

    “기사 수련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선 이곳에 있는 기간 동안 모든 마법 물품 사용을 엄금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후에 있을 입소식 때 전달해 드리도록 하죠. 인솔자를 따라 배정된 숙소를 확인하시고 짐을 정리한 뒤 다시 모여주십시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기수가 깃발을 옆 사람에게 넘기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그것을 신호로 우리를 이곳까지 호위해 준 기사들이 엄격한 예를 표한 후 마차와 함께 돌아갔다.

    결국 나는 아빠와 인사 한마디 못 나누고 기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사람 얼굴 못 본 지 10년은 된 거 알아?’

    문득 갈레트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 * *

    전공이 나뉘어 있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기사직이나 관리직 중 한쪽을 지망하고 있었다.

    선택 과목이 나뉠 때 관리 지망생은 세법을, 기사 지망생은 군사학을 주로 선택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기사 수련회는, 기사 지망생의 필수 코스 중 하나였다.

    그래도 이왕이면 편한 곳으로 가는 게 보통일 텐데 크렘은 왜 이 변방까지 나왔을까?

    덕분에 아빠를 만날 수 있게 된 건 좋았지만, 아직 크렘이 뭘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조금 개운치 않은 기분이었다.

    “오늘부로 에클레르 오 바니유!”

    “카눌레 드 보흐도 쉬제트!”

    “크렘 브륄레 커스터드!”

    “미,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 이상 4인은! 기사 수련생으로서…….”

    뭐, 뭐더라.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졌다.

    카눌레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와 카눌레 사이에 서 있던 크렘이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

    “기사 수련생으로서 변방의 임무를 익히고,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선서합니다.”

    “서, 선서!”

    나는 발표할 때처럼 한 손을 높이 치켜들고 마무리했다.

    지켜보던 기사들 무리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윽, 민망해라.

    하지만 우리 앞에 선 아빠의 표정에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답변했다.

    “좋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변방을 지켜온 프랄린 세자르 쉬제트 백작입니다. 여러분은 이곳에 있는 동안 두 조로 나뉘어 근방을 순찰하고, 몬스터로 피해를 입은 마을의 재건을 돕게 될 겁니다.”

    반쯤은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같은 느낌으로 따라왔건만, 말하는 내용을 보니 학생이 해야 할 게 생각보다 본격적인 모양이었다.

    나는 아빠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조는 2인 1조를 기준으로, 조 편성은 내일 아침 회의에서 발표하겠습니다. 순찰할 곳도 그때 지정할 테니 늦지 않게 참석해 주십시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해산한 후에 저녁 식사 시간을 갖도록 하지요.”

    2인 1조?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크렘을 곁눈질했다.

    만일 그와 내가 같은 조가 된다면 내 흑심을 채우기 훨씬 쉬워질 것 같았다.

    물론 내 맘대로 조를 구성할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으로, 아까 말했다시피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마법 물품의 사용을 금합니다. 언제 비상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 이곳에 있는 동안은 항상 신변에 주의를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감사합니다!”

    우리가 입을 모아 외쳤다. 아빠는 일이 남은 듯 곧바로 등을 보였다.

    물론 전장에서 웃으며 인사하는 것까지 바라진 않았지만, 너무 냉정하네.

    나는 애매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갈레트가 아빠에 대해 한 말 때문에 더 신경이 쓰이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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