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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72)화 (72/181)
  • 72화 

    내가 새삼스런 반성을 하는 사이, 에이미가 다가와 갈레트에게 쟁반을 내밀었다.

    “큰도련님도 한잔 하시겠어요?”

    “고마워요, 에이미.”

    갈레트가 쟁반에서 선택한 것은 알코올 향이 나는 화이트와인이었다.

    격세지감이로구나.

    옛날 그대로인 것 같다가도 그는 분명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못 보던 귀걸이가 달랑거리고 있는 왼쪽 귓불도 그렇고 피오르와 엇비슷할 만큼 큰 키도, 호리호리한 몸매와 어딘가 어른스러운 분위기까지.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엄마가 아빠한테 왜 반했는지 알 것 같네.

    아까도 생각했지만 갈레트는 날이 갈수록 아빠를 닮아가는 것 같았다.

    단순히 금발이나 자안(紫眼)을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역시 부자지간이라 그런가?

    “왜?”

    말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내가 신경 쓰인 듯 갈레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반짝거리는 외모가 부담스러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헤헤 웃었다.

    갈레트도 마주 웃었다.

    “나랑 취급 차이 너무 나는 거 아니냐.”

    잠시 잊혔던 카눌레가 반눈을 뜨고 끼어들었다. 갈레트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와인을 마시며 새치름하게 답했다.

    “넌 얼마 전에 봤잖아.”

    “…3년 됐거든?”

    “징그럽게 그걸 다 세고 있었어?”

    “나도 까먹고 있었는데 크레페 때문에 기억난 거라고!”

    “그래쪄? 우리 동생 기억력도 좋아!”

    “됐다. 내가 말을 말지.”

    태클 걸지 않는 게 나았을 결과만 얻고, 카눌레는 질린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그들 사이를 중재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마법은 잘 배우고 있어? 아직 바쁘지?”

    사실 바쁘냐는 말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었다.

    슈트루델은 신성 제국이었고 마법사들은 신을 모시고 있었기에 마탑은 황궁의 직속 기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가슴에 옮겨 단 검은색 브로치만 봐도 명백했다.

    아니나 다를까, 갈레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공부보단 다른 일 때문에 바쁘지. 아무래도 국상 기간이고, 조금 있으면 황태자 즉위식도 있거든.”

    “…….”

    아펠. 곧 황태자가 되는구나.

    화제를 돌리려고 꺼낸 질문이었지만 막상 아펠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어차피 바쁜 건 네가 아니라 우리잖아.”

    피오르가 끼어들었다. 이제 막 갈레트가 내준 옷으로 갈아입고 온 듯했다.

    마탑에 처박혀서 사교 활동이 거의 전무한 그는 마땅히 파티복이라고 할 만한 옷도 없는 것 같았다.

    오늘 로브를 입고 온 것만 봐도 그랬지만, 오래전 날 마탑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을 때도 그는 예복을 입고 있었다.

    황궁의 공식 행사에 참가할 때에나 입는 옷 말이다.

    제자의 생일에 선물을 주긴커녕 제자의 옷을 빼앗아 입다니.

    “오셨어요?”

    하지만 나는 몰상식한 피오르를 보며 웃음기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는 몸 전체를 감싸는 예복이나, 반대로 아예 헐렁헐렁한 연구원용 로브 말고는 처음 입어보는 사람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귀족다운 고급 실크 셔츠를 입고도 저렇게 양아치 같아 보이는 사람이 또 있을까?

    가슴에 매달린 큼지막한 리본이 언밸런스하다 못해 우스울 지경이었다.

    “크흠, 웃지 마.”

    피오르도 스스로의 차림이 어색한 듯 꽉 죄는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

    나를 따라 웃던 갈레트가 말했다.

    “저도 짐 싸느라 바쁘긴 하잖아요. 다른 분들만큼 바쁘진 않겠지만.”

    “짐을 싸?”

    그 단어를 캐치한 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그러자 갈레트와 피오르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피오르가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마탑이 곧 폐쇄될 거야. 가을까지 탑을 비워야 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탑 폐쇄에 대한 정보는 원작에서도 읽어 알고 있었지만, 그건 분명 아펠이 마법을 배운 다음의 일이었다.

    하지만 갈레트랑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 아펠이 마탑에 들어왔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아…….”

    “그럼 형 백수 되는 거야?”

    카눌레가 내 말을 끊었다. 하마터면 원작의 내용을 입 밖에 낼 뻔한 내가 합, 입을 다물었다.

    갈레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게. 이제 어떡하지. 학교에 다시 편입해야 하나? 이 나이에 저학년부터 시작하기도 그렇고…….”

    “내 제자로 들어오라니까.”

    “연구실이나 있어요?”

    “…없지.”

    피오르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 말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피오르가 정식 제자를 권할 정도면 갈레트의 실력도 봐줄 만한 정도는 된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호신 능력과 반드시 비례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니 안심하기엔 일렀다.

    그래도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 이제 갈레트도 성인이니까 에이미 대신 영주 업무를 보라고 할까?

    아니, 그런 얘기를 꺼냈다가 몽블랑을 자극하기라도 하면?

    내가 생각할 때 갈레트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마탑이 암살자 따위가 드나들 수 없을 만큼 보안에 철저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갈레트가 마탑에 들어간 것이 ‘정치에 관심 없다’는 뜻으로 보였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근데 이제 와서 영주 업무에 손을 대면 다시 위험해질지도…….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끙끙 앓고 있으려니 피오르가 내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 일’도 네 눈앞에서 일어난 거라고 했으니 갈레트가 내 제자가 되면 안전할 거야. 그 내용이 항상 들어맞는 게 아니라는 연구 결과도 있고.”

    “그 일이요?”

    갈레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피오르가 말한 ‘그 일’이라는 게 내가 말했던, 갈레트의 죽음에 대한 일임을 깨달았지만 굳이 내가 나서서 말뜻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자 피오르도 자신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듯 헛기침을 하고 말을 돌렸다.

    “아무튼 크레페 너도 마탑이 완전히 폐쇄되기 전에 한번 오지 그러냐? 아펠 슈트루델의 황태자 즉위식에 참석하는 것도 괜찮고. 너도 마탑 출신이니 출입을 막진 않을 텐데.”

    아펠의 황태자 즉위식.

    원작의 내용대로라면 아펠과의 첫 만남은 나의 열다섯 살 생일이 시작이었다.

    이번엔 아무 이벤트도 없이 넘어간 그날.

    갑자기 찾아가면 놀랄까? 반가워할까? 혹시 날 잊은 건 아니겠지?

    무의식적으로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이름을 듣자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복잡하긴 했지만 원작에서 귀가, 아니 눈이 닳도록 강조하던 미남이 어떤 모습인지도 좀 궁금했고.

    하지만 피오르의 다음 말을 듣고 나는 그 호기심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다음 달 초순인데 어때?”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안 돼요. 제 기사 수련회 날짜랑 겹치거든요.”

    그러자 갈레트와 피오르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엉?”

    “네가 기사 수련회에?”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마지막은 카눌레의 감탄사였다.

    …그러고 보니 카눌레한테도 말을 안 했었구나.

    “아니, 다들 왜 그래요? 내가 검술을 배우면 세상이 망하기라도 한대?”

    괜히 민망해서 일부러 뚱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갈레트의 귀에는 이미 내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한 내가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크흠, 제대로 기사를 지망하는 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이번이 정말 좋은 기회 같았거든. 이번 수련회 장소가 어딘지 알아?”

    “아하.”

    카눌레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기사 지망생이라 이번 공고도 진작 확인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갈레트는 아직 대화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얼마나 놀랄까, 하는 기대감에 내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아빠가 있는 북쪽 변방이래! 오랜만에 아빠 얼굴도 보고, 좋을 것 같지?”

    “아빠?”

    갈레트가 갑자기 눈썹을 찌푸렸다.

    “엄마 장례식 때 오지도 않은 사람을 보러 간다고?”

    “…….”

    기대와는 다른 반응에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간 아빠와 만나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만, 설마 갈레트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오, 오빠…….”

    “그 사람 얼굴 못 본 지 10년은 된 거 알아?”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원래부터 우리 삼 남매 중에 아빠를 제일 좋아했던 사람은 나도 카눌레도 아닌 갈레트였다.

    그랬던 그가 이제 아빠를 향해 저런 차가운 말을 한다는 사실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집안싸움은 손님 없을 때 해라.”

    짧은 나무람과 함께 피오르가 우리 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갈레트가 아차 한 듯 입을 다물자 피오르는 한숨을 내쉬고서 화제를 돌려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바뀐 화젯거리라는 게 키슈에게서 전해 들었다던 파타슈와 카눌레의 대전이었기에, 그 꼬맹이가 벌써 입학을 했냐느니, 용건도 없이 내게 접근하면 가만 안 둘 거라느니 하는 얘기들로 갈레트는 한참 더 열을 올려야 했다.

    【 북쪽 변방이라는 곳 】

    갈레트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내가 기사 수련회에 참석하는 걸 반대하는 눈치였으나, 당연히 그의 반응이 어떻든 상황이 바뀌진 않았다.

    ‘엄마 장례식 때 오지도 않은 사람을 보러 간다고?’

    갈레트가 했던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돌았다.

    내가 변방으로 향하는 마차를 탄 당일까지 그랬다.

    물론 내가 수련회에 참가하기로 한 이유는 크렘과 친해지기가 1번이었고 아빠를 볼 수 있다는 건 부차적인 이득일 뿐이었다.

    그러나 갈레트의 말이 내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부분을 파고들었다는 건 분명했다.

    아빠는 엄마의 장례식 때는 물론 그 이후에도 저택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통신구로 연락을 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도 통보에 가까운 안부 인사를 나누었을 뿐, 길게 사담을 나눈 것도 아니었다.

    통신구가 워낙 고가의 소모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빠와 편지를 자주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마 나보다는 에이미나 몽블랑이 아빠와 더 자주 얘기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빠가 우리를 잊었을 거라곤 생각한 적 없지만.

    “크레페, 안 내려?”

    어느새 마차가 멈춰 있었다. 날 따라 수련회에 참가 신청을 한 에클레어가 앞장서 마차에서 내렸다.

    커스터드 귀족 학교가 있는 자작령은 수도를 기준으로 북서쪽에 있었다.

    아빠가 있는 북쪽 변방은 그래도 동해보다 가까운 편이었으나, 공간 이동 마법을 쓰지 않으면 말이나 마차를 타고 꼬박 반나절은 움직여야 하는 거리였다.

    아침에 출발한 만큼 당연히 벌써 도착했을 리는 없었고, 잠시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멈춘 것 같았다.

    마차가 멈춘 곳은 마을이나 식당이 아니라 숲속의 공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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