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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71)화 (71/181)
  • 71화 

    그런 이유로 설사 카눌레와 갈레트가 만날 일이 있더라도 나만은 그를 열심히 피해 다녔고, 피오르에게 갈레트가 죽는 예지몽을 꿨다고 얘기해 놓은 덕분에 제법 도움도 받았다.

    그 보람이 있었던 걸까, 갈레트는 올해 무사히 성인이 되었다.

    예지몽을 꿨다는 내 말을 믿고 협력해 주었던 피오르도 이제 마음 놔도 괜찮지 않겠냐며 날 설득했고,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순 없었기에 나도 큰맘 먹고 동의했다. 갈레트의 스무 번째 생일 파티를 저택에서 열자는 말에.

    그래, 스물이잖아. 두 번은 없을 성인식 날.

    피오르가 대충 저녁때쯤 도착할 거라는 연락을 해주긴 했지만 정확한 시간까지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나나 카눌레는 집에서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갈레트가 오길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갈레트. 스무 살. 마법사.

    갈레트와는 영 안 어울리는 낯선 단어들을 입안에서 중얼거려 보았다.

    마탑에서 성인이 된 갈레트는 내가 모르는 미래의 총집합체 같은 느낌이었다.

    으, 어색할 것 같아.

    “마법은 많이 배웠으려나…….”

    “보면 알겠지.”

    카눌레가 내 감상을 깨부수는 메마른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그가 괜히 야속해서 눈을 흘겼다.

    그 순간 앞뜰에 금빛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나는 옷을 털고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마법진만큼이나 화려한 금발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갈레트였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를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내가 다섯 살 때 봤던 아빠를 쏙 빼닮아 있었으니까.

    그는 집중하듯 눈을 감은 채였다.

    연한 마나가 마법진 주위를 아른거리다가 위로 솟구쳤다. 고요한 바람이 그의 왼쪽 귀에 매달린 귀걸이를 흔들었다.

    마탑에서만 생활하느라 머리를 다듬지 못한 듯 그의 머리카락은 조금 길었다.

    귀를 반쯤 덮은 머리칼에 마법사의 상징과도 같은 후드를 입고, 가슴에는 국상 기간임을 의미하는 검은색 백합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볼 수 없던 희귀한 모습에 어쩐지 괴리감이 느껴졌다.

    곧 마나가 잦아들었다.

    갈레트 뒤에 서 있던 피오르가 옆으로 한 걸음 나왔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내가 마주 인사하자, 피오르가 고개를 끄덕인 것과 동시에 갈레트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마주 보았다.

    “왔… 왔어? 오빠도 오랜만…….”

    “크레페에에!”

    갈레트가 덤벼들었다.

    나는 기세에 놀라 그를 피하려 했지만, 갈레트는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어 기어코 날 품에 안았다.

    “웁.”

    “흑흑, 보고 싶었어, 우리 동생!”

    “나도 동생이다.”

    카눌레가 무덤덤하게 태클을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 갈레트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내 정수리에 뺨을 비벼댔다.

    나는 답답함에 못 이겨 끙끙거리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하… 하하.”

    나는 갈레트의 등을 토닥이며 뒤늦게 대답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어색할지도 모른다니, 내가 뭘 걱정하고 있었던 걸까.

    * * *

    에이미는 갈레트의 학교 지인, 마탑의 사람들은 물론 나와 카눌레의 손님까지 잔뜩 초대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갈레트의 안전을 아직 걱정하고 있던 내가 반대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커스터드 검술 대회 날 있었던 국상 소식 때문이기도 했다.

    외부 손님은 피오르 단 한 명.

    파티라고 하기에는 분명 부족한 모임이었으나, 아무리 작은 모임이라고는 해도 명색이 갈레트의 생일 파티인데 실내복 같은 원피스에 검술 수련복, 마법사용 후드나 입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고 파티 전용 홀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끄응, 이런 옷 입는 것도 엄청 오랜만이네.”

    나는 방 안에서 낑낑대며 드레스 소매에 팔을 넣었다.

    요즘 이런 옷을 맞출 일이 없어 에이미가 임의로 마련해 준 의상이었는데, 끈을 엮어 사이즈를 조절하는 방식이었기에 준비된 옷을 못 입는 불상사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매일 편한 옷만 입다가 파티 드레스를 입으려니 불편하긴 하네…….

    “아가씨?”

    홀을 확인하느라 바빴는지 에이미가 조금 늦게 내 방에 들어왔다.

    “세상에, 혼자 입으신 거예요? 하녀 아이라도 부르시지.”

    “이 정도로 뭘요. 에이미가 금방 와줬잖아요.”

    밝게 대답했지만 에이미는 어쩐지 슬픈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다가와 등이나 어깨 옆의 리본을 마저 엮어주며 말했다.

    “저는 아가씨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질까 걱정이에요.”

    “전 에이미의 디저트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걸요.”

    그러자 에이미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가 처음 디저트 먹었을 때 어땠는지 아세요?”

    “저만 빼고 스테이크 먹었을 때 말하는 거죠?”

    “네?”

    “카눌레 오빠가 당근 편식하다가 혼난 날이요. 엄마가 저한테 푸딩을 떠줬잖아요.”

    매듭을 묶던 에이미의 손이 멈췄다.

    내가 만 한 살도 안 됐을 적의 이야기이긴 했지만 내 머릿속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크레페가 된 후 처음으로 디저트를 먹은 기념비적인 날을 내가 잊을 리가.

    “그때 저, 푸딩 접시에 코까지 박고 먹었었는데. 그것도 에이미가 만든 거였어요?”

    “아가씨…….”

    에이미는 내가 당연히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듯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내 어깨의 리본을 묶어주던 그녀의 손을 토닥이고는 생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요. 전 에이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니까.”

    * * *

    파티가 열리는 메인 홀에는 아직 나 혼자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심심함을 느낄 새도 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홀 안을 두리번거렸다.

    에이미의 주도로 꾸며졌을 장식과 디저트의 탑.

    모이는 사람보다 더 많은 연주자들과 넓은 홀 안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음악.

    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이 나올 법한 화려함이었다.

    아마 인원수보다 훨씬 많은 디저트가 준비된 건 날 위해서겠지.

    “드실 거죠?”

    어느새 에이프런을 두른 에이미가 내게 쟁반을 내밀었다.

    모인 사람은 연주자를 포함해도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는데, 쟁반 위에 놓인 음료는 열 잔도 넘어 보였다.

    “이건 에이미의 일이 아니잖아요.”

    “뭐 어때요. 오랜만에 뵙는 건데.”

    확실히 새삼스러운 말이긴 했다.

    하지만 에이미가 몽블랑에게 영지 관리 업무를 위임받은 지도 벌써 8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베이킹에 옷 시중에… 참, 소탈하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아가씨 열다섯 생일도 못 챙겨드렸잖아요. 사실 그 옷도 그날을 위해 준비한 건데.”

    에이미의 웃는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녀의 말대로, 얼마 전에 지난 내 열다섯 번째 생일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보냈다.

    어차피 사교계에 진출할 생각도, 마탑에서 나오지 못할 갈레트를 굳이 괴롭히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에클레어가 푸딩인지 케이크인지를 만든다고 소란을 피우긴 했지만.

    ‘이번에도 말야. 나랑 오빠가 거대 푸딩이랑 케이크 만들어줬을 때, 그때도 네가 크렘한테 케이크 한 조각 갖다 주지 않았어? 근데 크렘은 거기에 손도 안 댔었지?’

    얼마 전 에클레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것도 내가 크렘을 따라 수련회를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수많은 사건 중 하나였다.

    “응, 고마워요. 맛있게 먹을게요.”

    나는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녀가 든 쟁반에서 음료 한 잔을 들었다.

    “마론 슈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올해에도 몽블랑 후작에게서 선물이 온 모양이었다.

    내가 짧게 대답하자 에이미는 가볍게 예를 갖춘 후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는 손에 든 투명한 잔을 쳐다보았다. 뿌연 색의 음료 안에 작게 조각난 레몬과 민트 잎.

    레모네이드라…….

    사실 레모네이드는 뒷맛이 떫어서 내가 그리 좋아하는 음료는 아니었다.

    각종 에이드부터 주스, 샴페인과 와인까지 다양한 음료 중에 그냥 제일 가까운 걸 들었을 뿐.

    에이, 뭐 어때.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고 생각하며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민트 때문인지 레모네이드보다는 모히또와 비슷한 맛이 났다.

    “…맛있네.”

    그런 생각을 하며 뷔페식 테이블에서 작은 초코 브라우니 두 개를 집어 한입에 넣었다.

    브라우니는 뷔페식에 걸맞게 작은 사이즈였기에 두 개를 한 번에 먹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미각이 마비될 것 같은 진한 단맛. 거기에 이어 레모네이드를 함께 마시자 묵직하고 오묘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음, 이거 꽤나 중독적일지도.

    내가 자라면서 입맛이 바뀐 건가?

    “하나씩 먹어라. 넌 그 나이 되도록 입맛이 안 바뀌냐?”

    내 생각과 전혀 반대되는 내용으로 카눌레가 시비를 걸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입안에 남은 브라우니를 우물거리느라 대꾸해 주지는 못했다.

    카눌레는 콧바람을 훅 내쉬고 에이미가 든 쟁반에서 라즈베리 에이드를 골라 들었다.

    분홍색의 음료는 그가 입은 검회색 제복과 별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눈 색깔과는 어울렸다.

    “술 마시는 거야?!”

    뒤이어 갈레트도 도착했다.

    집 안에서 열리는 파티인 만큼 그의 옷차림은 그럭저럭 간소해 보이는 블라우스에 조끼를 입고, 목에는 프릴 자보를 맨 형태였다.

    “우리 애기가 이렇게 크다니…….”

    입장하자마자 큰 소리를 낸 갈레트가 울컥한 듯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의 혼잣말을 듣다못한 내가 레모네이드를 꿀꺽 삼키고 갈레트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나 아기 아니야.”

    이것도 술 아니고.

    “그래, 그래.”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갈레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본 거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대우는 좀 심하잖아.

    어린애 취급에 삐친 내가 부루퉁한 표정을 짓자 갈레트는 손가락을 들고 내 볼따구니를 쿡 찔렀다. 결국 나는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카눌레의 옷차림은 아빠를 따라 드레스 코드를 맞췄던 내 다섯 살 생일날을, 갈레트의 옷차림은 학교 친구들을 불렀던 그의 생일날을 떠오르게 했다.

    내가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참 나, 누가 보면 크레페가 결혼하는 줄 알겠다? 형도 이제 결혼 준비나 해.”

    카눌레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끼어들었다.

    계속 아이일 것 같은 갈레트가 결혼?

    어색하고 낯선 단어 조합에 나는 갈레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친 갈레트는 내 시선을 다른 뜻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내가 우리 크레페를 두고 결혼을 어떻게 해! 걱정하지 마, 크레페. 평생 같이 살 테니까.”

    “징그러.”

    “징그러.”

    나와 카눌레가 동시에 말했다.

    갈레트가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동안 둘이 많이 친해졌구나.”

    음,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너무 데면데면하게 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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