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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70)화 (70/181)
  • 70화 

    “크레페 님, 무대 중앙으로 나와주십시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떨림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심판의 목소리는 웅웅거렸고, 에클레어가 정신 차리라며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크레페!”

    “으, 응!”

    “문제 있습니까?”

    심판이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푸다닥 털고 손에 맺힌 식은땀을 옷에 닦았다.

    “크, 크레페, 갑자기 왜 그래?”

    에클레어가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나는 울음을 참고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 무대 공포증 있나 봐.”

    “뭣…….”

    에클레어의 얼굴에 한순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스쳤다.

    마음 같아선 나의 진지함을 한바탕 설파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억울함을 토로할 만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크레페 님! 기권하실 겁니까?”

    “가가가가요!”

    나는 덜덜 떨리는 턱을 악물고 가검을 꽉 꼬나 쥐며 무대 중앙으로 나갔다.

    야외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여태껏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띌 만큼의 행적을 남겼고, 그들이 수군거리는 것도 익숙해져 있었다.

    단지…….

    “크레페 님, 파이팅!”

    내 속도 모르고 키슈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이 긴장은 객석에 키슈가 있는 것을 보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키슈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갈레트의 첫 대회가 있던 날이기도 했다.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크바스의 발에 걸려 데굴데굴 구르다 장외패라는, 내가 8학년이 되도록 본 적 없는 역대급 망신.

    어쩌면 그게 내 미래의 모습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

    갈레트 오빠한테 조금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무대 중앙, 거대한 마법진의 가운데에 섰다. 마구(魔具) 사용이 감지되면 그것을 알려주는 용도의 마법진이었다.

    “자세 잡아주십시오! 대전!”

    심판이 손을 치켜들었다.

    나는 허겁지겁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크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만져보고 싶게 하는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다음으로는 겁먹은 듯한 눈동자와 꾹 다물린 얇은 입술이 보였다.

    잠깐만, 겁을 먹었다고?

    “개시!”

    내 눈을 의심하던 그때, 심판이 시작을 선언했다.

    나는 크렘의 기습에 대비해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크렘은 자리에서 옴짝하지 않았다.

    “개시!”

    제 목소리를 못 들었다고 여긴 듯 심판이 다시 손을 치켰다가 내렸다. 하지만 나나 크렘은 둘 다 제자리에 서 있었다.

    “개, 개시!”

    불쌍한 심판이 세 번째 개시를 선언했다. 대전에 집중하고 있던 객석이 다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크렘의 가검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도 긴장한 걸까? 마법 물품이 없어서 검을 드는 것도 힘에 부치나?

    이런저런 가정을 해보며 나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슬쩍 다가갔다. 크렘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크렘은 또다시 물러났다.

    “저… 두 분, 이건 댄스파티가 아닌데요.”

    심판이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나는 한번 검을 휘둘러보았다. 내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한 쇳덩이가 훙 하는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다.

    하지만 크렘은 그것을 막지 못하고 피했다. 아예 날 이길 생각이, 아니 나랑 검을 맞부딪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 나랑 검을 맞대기만 해도 원래 눈 색을 들키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구나.

    “다시 중앙으로.”

    심판이 손을 치켜들었다. 공방 하나 없이 유사 댄스파티만 벌어지는 이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했다.

    크렘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경기장 중앙으로 왔다.

    “크레페, 한 대만 쳐! 그럼 이기겠다!”

    에클레어가 응원 아닌 응원을 했다.

    그 목소리 때문만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나는 조금 진정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길게요?”

    크렘은 대답도 없이 식은땀만 흘렸다.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한 후 팔찌를 감싸 쥐었다.

    팔다리가 한층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의 감지 마법진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야, 내 몸 안에는 마나가 없으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치사한 방법이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반칙은 아니었다.

    나는 크렘을 위해서라도 빨리 이겨야겠다 싶어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러자 크렘이 몸을 돌려 내 공격을 피하고 곧바로 검을 내리그었다.

    그 직후 이어지는 사선 긋기.

    그 순간 나는 카눌레에게서 받은 검술 족보 첫 페이지를 떠올렸다.

    내려 긋기, 사선 긋기, 그다음은…….

    찌르기.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 든 검을 크게 휘둘렀다. 야구 배트처럼 휘두른 쇳덩이에 크렘의 검이 맞아 날아갔다.

    홈런이었다.

    “…….”

    크렘이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제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객석에서 별안간 폭소가 터져 나왔다.

    “푸하하, 저게 뭐야!”

    “하하핫!”

    “조, 종료! 크레페 님의 승리입니다!”

    심판이 종료를 선언했다.

    나는 부끄러움에 못 이겨 후다닥 무대를 내려갔다.

    에클레어가 곧바로 다가와 마법도 안 쓰고 대체 어떻게 한 거냐며 대답을 보챘다.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아직도 넋이 나간 크렘의 뒷모습을 곁눈질하다가 멋쩍게 입맛을 다셨다.

    어째 이겨놓고도 좀 찝찝하구만.

    * * *

    나는 당연히 2회전 광탈이었고, 에클레어와 카눌레의 대결은 마법 물품 사용 금지 추첨으로 인해 카눌레의 승리로 끝났다.

    에클레어는 또 운발 땜에 졌다며 바닥에 분풀이를 했다.

    결승은 카눌레와 크바스의 대결이었다. 작년에 이어 연속 2년째였다.

    작년에도 축제 구경을 왔던 사람들은 모두 카눌레와 크바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둘의 시합에는 학생들의 것 같지 않은 박진감이 있었다.

    “와아…….”

    나는 카눌레의 검이 그리는 깔끔한 궤적을 보며 홀린 사람처럼 탄성을 내뱉었다.

    물론 그것을 예상한 듯 막아낸 크바스의 대응도 눈요깃감이었다.

    “연장전으로 갈 것 같은데?”

    에클레어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쪽에 문외한인 나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그들의 싸움은 호각으로 보였다.

    “그만! 잠시 판정하겠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 심판이 중지를 선언했다.

    크바스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뭐라 말했다. 카눌레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관중들은 나 때와는 다른 이유로 웃고 있었다.

    몇몇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얼굴로, 몇몇은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은 황실 기사단에 입단이 결정된 청년과 그에게 도전하는 장래 유망한 기사 지망생이라는 타이틀에 매료되어 있는 듯했다.

    “진짜 이기는 거 아냐?”

    나도 조금 들뜬 목소리로 어깨를 들썩였다.

    나이 차를 감안하면 카눌레의 재능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쳇, 나도 뽑기 운만 있었으면…….”

    에클레어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시합에 흥분해 있느라 그녀를 위로해 줄 여유가 없었다.

    카눌레는 지금까지의 대회에서 한 번도 크바스를 이긴 적이 없었다. 게다가 크바스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기에 이번 축제는 그들의 마지막 시합이었다.

    나는 어쩌면 카눌레보다 더 두근거리고 있었다.

    곧 심판이 무대 중앙으로 나와 손을 치켜들었다.

    “연장전을…….”

    그때, 누군가 다급하게 무대에 뛰어올라 왔다.

    연장전 발표가 확실시된 상황이었기에 관객들은 다시 흥미진진해하며 무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축제는 그대로 중지되었다.

    사유는 황비의 서거였다.

    * * *

    황비라고 해도 그녀는 슈트루델 제국 유일의 국모였다. 황후가 오래전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는 아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국상에 학교는 한 달간 휴교를 결정했고, 전 제국이 침중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때문에 우리도 원래 예정되어 있던 갈레트의 스무 번째 생일 파티를 훨씬 간소하게 치르기로 했다.

    “엄청 오랜만이네. 삼 년쯤 됐나? 사 년?”

    카눌레가 흙바닥을 툭툭 차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되물었다.

    “언제 봤는데?”

    “저번에 내 생일이라고 파티했잖아. 열다섯 살 때였나?”

    “흐응…….”

    그때구나.

    부모님이 없는 저택에서 큰 파티를 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카눌레의 열다섯 살 생일에는 나름 사람을 초대했었다.

    사교계에 진출할 예정이 없더라도 열다섯 생일 정도는 챙겨야 한다는 게 에이미의 주장이었으니까.

    카눌레는 질색했지만 마르크가 ‘나중에 기사가 되고 싶으면 얼굴도장 정도는 찍어놓는 게 좋을걸요?’ 하고 말하자 거기 넘어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거기 참석하지 않았다.

    카눌레는 겨울생이었고 그때는 한창 눈이 내리고 있었기에, 감기에 걸려 기숙사에서 푹 쉴 거라는 핑계로 아예 저택에 돌아오지도 않았다.

    물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한 것이었다.

    “너도 진짜 매정하다. 입학하고 나서 한 번도 안 본 거지?”

    “됐어. 오늘은 보잖아.”

    카눌레가 알아주길 바란 적은 없으니 가볍게 손만 내젓고 말았다.

    덧붙여 카눌레의 열다섯 살 생일에 갈레트가 준비한 선물은 공책 한 권과 커다란 상자였다.

    공책에는 갈레트의 수제 마법진이 잔뜩 그려져 있었는데, 사실 그냥 공부하던 연습장을 가져온 것이었기에 카눌레는 울컥하며 그 공책을 바닥에 패대기쳤다고 한다.

    표지에는 갈레트의 이름까지 쓰여 있었다나.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이미가 ‘변방에 계신 주인님의 선물 센스가 큰도련님께 유전된 것 같아요.’ 하는 내용으로 내게 편지를 써서 알려줬다.

    덧붙여 그것과 더불어 준 상자는 쿠키와 단것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건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저택에서 돌아온 카눌레가 과자를 한 아름 안고 여자 기숙사 문을 발로 찼을 때, 그가 얼마나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누가 봐도 카눌레가 아니라 날 위한 것들이었기에 나는 민망하게 웃었고, 결국 에클레어와 내가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는 비하인드가 있다.

    아무튼 카눌레에게는 삼사 년이겠지만 내게는 칠팔 년 만의 만남이었다.

    새삼스럽지만 그렇게 계산하고 나니 괜히 아까보다 긴장됐다.

    나는 현관 계단에 쪼그려 앉아 멍하니 앞뜰을 쳐다보았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갈레트가 죽는 것은 내 열 번째 생일 파티,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원래 그가 죽기로 되어 있던 내 열 번째 생일에는 물론이고, 그 이후의 내 생일, 여타 다른 행사가 있을 때에도 절대 갈레트를 만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는 크레페의 이야기였고, 디몬이라면, 아니 악질적인 취향을 가진 작가 디저트몬스터라면 분명 이런저런 정치적 요인보다는 주인공인 ‘크레페’의 정신적 충격을 위해 갈레트를 죽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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