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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69)화 (69/181)
  • 69화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연무장 중심에서 마지막 연습을 하거나 무대 뒤에서 다른 시합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연습할 깜냥도, 구경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빈 천막에 들어가 간이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크렘과 친해지기 위해 크렘을 이겨야 하다니, 이 무슨 모순적인 상황이란 말인가.

    “걱정돼?”

    내 한숨을 들었는지 에클레어가 피식 웃었다. 지금만큼은 그 여유로움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럼 걱정 안 되게 생겼어?”

    괜히 퉁명스럽게 답하며 눈을 흘겼다.

    그러자 에클레어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족보까지 구해놓고.”

    “쉬잇!”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나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며 에클레어의 말을 저지했다.

    키득거리던 에클레어가 알았다는 듯 손을 휘젓고 말을 이었다.

    “뭐, 어차피 둘 다 마법 물품 쓸 거잖아. 그럼 힘 차이는 별로 안 날 텐데, 크렘이 검술에 능한 것도 아니니까 열심히 하면 승산 있지 않겠어?”

    “나 마법 물품 사용 안 함으로 체크했는데…….”

    “뭣?!”

    그러고 보니 얘기 안 했구나.

    에클레어의 반응을 보며 뒤늦게 깨달았다.

    태연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한 내 태도를 보고 에클레어는 배로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어가며 물었다.

    “왜, 왜?”

    필요 없으니까?

    에클레어의 박력 넘치는 대응에 나는 차마 그 태평한 대답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에클레어는 정작 당사자인 내가 본인보다 무덤덤하게 답하는 모습에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럼 둘이 왜 붙은 거야?”

    “홀수라 짝이 안 맞았나 보지.”

    연신 남 일처럼 답하자 에클레어는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봤겠냐’고 책망하듯 눈을 흘겼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참 나, 내가 어쩌다 너랑 친구가 된 건지 모르겠다.”

    “내가 언니한테 열심히 작업을 건 덕분이지.”

    “어쭈.”

    에클레어는 내 진지한 대답을 농담처럼 받아들이고 피식 웃었다.

    그때 밖에서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은 카눌레 드 보흐도 쉬제트와 파타슈 로렌의 대결이 있겠습니다.」

    익숙한 이름에 에클레어가 바깥을 손짓했다.

    “구경 갈래?”

    * * *

    마나는 불이나 얼음을 만들 때만 쓰이는 게 아니라 움직임을 가볍게 만들거나 힘을 세게 하는 등, 전투를 용이하게 해주는 마법 물품을 작동시키는 데에도 필요했다.

    그런 마법 물품들은 기본적으로 초고가품이었고, 내가 알기로는 우리 가문에도 전투 관련 마법 물품은 하나뿐이었다.

    카눌레가 아빠에게 받아 재활용하고 있는 고물 검.

    무가인 우리가 그 정도였다. 만일 마법 물품을 대회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한다면 대회의 상위권은 죄다 졸부의 몫이 될 게 뻔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법 물품을 훈련과 실전에 두루 사용하고, 더 나아가 주무기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에클레어가 그런 경우였다.

    만일 그녀에게 마법 물품 사용을 금지시킨다면 승산이 크게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검술 대회에서는 마법 물품의 사용을 허가해야 할까, 불허해야 할까?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서는 그 답을 운에 맡기고 있었다.

    “마나 사용을 허가합니다!”

    심판을 맡은 기사가 추첨 주머니에서 꺼낸 파란 공을 높이 치켜들었다.

    무대에 선 카눌레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대결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관람석은 학생이 아닌 외부인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나와 에클레어는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타슈가 이쪽을 등지고 있어 전체적인 구도를 보기는 힘들었지만 근처에 사람이 적어 충분히 명당이라 할 만했다.

    “와, 허가래. 내가 지금 싸웠어야 했는데.”

    에클레어가 몸이 달은 듯 작게 발을 굴렀다.

    작년 대회 때 그녀는 카눌레와의 시합에서 패했다. 저 추첨에서 마나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준비해 주십시오.”

    심판의 말에 파타슈와 카눌레가 거리를 벌리고 섰다.

    언뜻 보인 파타슈의 얼굴에는 이미 다 이긴 듯 자신만만한 감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객석에서 누군가 외쳤다.

    “아들! 파이팅!”

    키슈였다.

    나는 객석에서 바글대는 사람들 중 유독 눈에 띄는 키슈의 빨간 머리색을 발견하고는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내 긴장을 눈치채지 못한 에클레어가 신나서 종알거렸다.

    “당연히 카눌레가 이기겠지? 덩치부터 차이 나는데. 저 신입생한테 뭔가 비장의 무기라도 있다면 모를까. 아니, 평민이랬으니까 마법 물품 같은 것도 없겠구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무대를 주시했다.

    에클레어는 반응 없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전! 개시!”

    심판이 시작을 알리고 뒤로 물러났다.

    파타슈가 곧바로 달려들었다.

    짧은 순간 카눌레의 머리카락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이쪽저쪽으로 흔들렸다고 느꼈다.

    파타슈가 마나로 바람을 일으킬 때 주로 일어나던 현상이었다.

    아마 보통은 이 직후 거센 마나 폭풍이 카눌레를 떠밀거나 했겠지만…….

    “…….”

    파타슈는 어느새 엉덩방아를 찧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들의 검이 제대로 맞붙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카눌레가 어리둥절해 있는 파타슈에게 검 끝을 겨누었다.

    검을 든 카눌레의 손목에는 내게서 받은 손수건이 묶여 있었다.

    “뭐, 뭐야?”

    에클레어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심판은 침착했다.

    “종료! 카눌레 승!”

    파타슈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 설마 날 찾는 건가?

    키슈의 양아들이니 마법을 배우긴 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나 배열이 흐트러지는 느낌만으로 범인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찔리는 것이 있는 나는 뒷걸음질을 쳐서 슬쩍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파타슈가 무대 밑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하고 시선을 멈춘 것이다.

    뜨끔.

    찔끔한 내 표정을 보고 확신한 듯, 파타슈가 와락 인상을 찌푸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뭐라 중얼거리는지는 들리지 않았으나, 에클레어는 귀신같은 통찰력으로 그 입 모양을 읽어냈다.

    “어, 쟤 욕하는데?”

    별로 알고 싶지 않던 정보였다.

    * * *

    이제 곧 내 순서였다. 나는 천막으로 돌아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아침에 에클레어가 명상하던 것을 흉내 낸 거지만 사실 배가 고파서 집중은 잘 안 됐다.

    그러던 중 누군가 가림막을 제치고 천막으로 들어왔다.

    “크레페 님이 도와준 거죠?!”

    혀 짧은 말투가 아니라는 게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익숙한 목소리.

    나는 눈을 뜨기도 전에 그게 파타슈라는 것을 깨닫고 침착한 척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마요! 학교에서 마법진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쿨럭!”

    갑자기 파타슈가 기침을 터뜨렸다.

    감정이 그렇게까지 격해졌나 싶어 간이 탁자에 있던 물컵을 건넸다.

    목을 적시고 나서야 좀 진정한 듯하던 파타슈가 한쪽 눈살을 찌푸리고 날 쳐다보았다.

    “크흠. 죄송합니다.”

    결국 그의 시선에 못 이긴 내가 먼저 사과하는 말을 꺼냈다.

    카눌레의 손수건에 마법진이 있는 것까지 봤다면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렸네요. 저번에 게시판 넘어졌을 때도 도와주셨죠?”

    “은혜를 원수로 갚으셨네요.”

    “하, 하하…….”

    결국 카눌레와 갈레트에 이어 나까지 독설의 희생양이 되어버렸구만.

    나는 뭐라 대꾸도 못 하고 멋쩍게 웃었다.

    다행히 파타슈는 나를 더 질책할 생각은 없는 듯 입술을 비죽이며 물컵을 내려놓고 빈 의자에 앉았다.

    그의 선키는 나보다 조금 커져 있었지만 앉은키는 비슷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게 다섯 살 때쯤이었기도 하고, 워낙 오랜만에 재회한 만큼 내 기억에서 그는 어린아이인 채 멈춰 있었기에 이제야 옛날 생각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만 보고 파타슈를 어려워했던 게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허구한 날 후드를 뒤집어쓰고 무뚝뚝하게 폭군의 곁을 지키던 신비주의 캐릭터가…….

    “아, 진짜 다 이긴 거였는데.”

    저렇게 의자 등받이를 끌어안고 툴툴거리고 있다니.

    매치가 힘들 정도라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나는 재빨리 헛기침을 하는 척 입을 가렸지만 그의 눈을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웃음이 나와요?”

    “안 나올 건 뭐야?”

    대놓고 시비 거는 듯한 그 말은 물론 내가 꺼낸 말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천막을 쓰는 에클레어가 돌아온 것이다.

    “곧 시합에 나가야 하는 사람 상대로 폐 끼치면 곤란하지, 후배님.”

    저런 어설픈 존칭만 쓴다고 다가 아닐 텐데.

    “저한테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 들른 것입니다만?”

    “후원받는 입장이면 조용히 있는 건 어때? 친구도 아니면서.”

    눈앞이 아찔해진 것과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 왜 자꾸 내 앞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나이는 제가 더 가깝거든요?”

    “나랑은 반말하거든?”

    에클레어가 계속 자존심을 건드리자 파타슈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같은 집에서 살았던 적도 있다고요!”

    “난 같은 방에 산다!”

    “저는……!”

    거기까지 말한 파타슈가 다시 마른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들의 대화, 아니 유치한 말싸움이 잠시 끊긴 틈을 타서 내가 끼어들었다.

    “언니, 그만 좀 해. 나이 차이가 몇인데. 부끄러워 못 살겠다, 정말.”

    “흥. 그러게, 아직 변성기도 안 지난 어린애한테 내가 너무 심했나?”

    에클레어가 콧대를 세웠다.

    물을 마시던 파타슈가 정곡을 찔린 듯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반응하니 내가 더 민망하군.

    「다음은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와 크렘 브륄레 커스터드의 대결이 있겠습니다.」

    싸움이 더 심해지기 전이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척 자리에서 일어나 파타슈의 등을 떠밀었다.

    “크흠, 죄송합니다. 저 이제 나가야 돼요. 오늘 일은 나중에 사과드릴 테니 파타슈 님도 이만 돌아가 보세요. 유치한 기 싸움은 둘 다 그만하구요!”

    “흥.”

    에클레어가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

    파타슈는 마지막까지 불퉁한 얼굴로 에클레어를 쳐다보다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우리 사이에 애기가 있다는 건 말하면 안 되는 거죠?”

    “…….”

    나는 대답 대신 파타슈의 뒤통수를 때렸다.

    * * *

    “마나 사용을 불허합니다!”

    심판이 추첨 주머니에서 꺼낸 빨간 공을 높이 치켜들었다.

    마법 물품 사용에 X 표시를 한 건 나였으니 저 결과는 분명 내게 더 유리했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크레페?”

    에클레어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마저도 꿈속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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