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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68)화 (68/181)

68화 

내가 저기에 마법진으로 자수를 놓느라 밤을 샌 거란 말이지.

단순한 관상용 마법진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의 들뜬 얼굴을 보니 괜히 뿌듯했다.

카눌레가 뒤늦게 내 흐뭇한 미소를 눈치채고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쌀쌀맞은 태도로 민망함을 숨기려 한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래서, 설명은?”

카눌레가 고자세로 묻고는 나무에 기대어 섰다. 달빛이 그의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의 나이도 이제 열여덟 살이었다. 그동안 검술을 갈고닦는 데 소홀했던 적도 없기에 그의 외모도 이제는 장성한 청년, 정확히는 신입 기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이기기 힘든 상대, 정확히는 꼭 이기고 싶어 하는 상대가 있었다.

내가 목을 가다듬고 설명했다.

“그 손수건을 들고 있어. 손목에 묶든 발목에 묶든, 몸에 닿게만 하면 돼.”

“그러면?”

“이게 내 체질을 참고해서 만든 마법진이거든. 마법을 막을 순 없어도 상대방의 마나 응집을 흩뜨려주는 덴 충분할 거야. 오빠의 마나가 필요하긴 하지만, 아마 한 시합 정도는 버텨주겠지.”

“좋아.”

카눌레가 짧게 말하고 내 손에서 손수건을 가져갔다.

“진짜 1학년한테 지면 나 콱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버릴 거야.”

카눌레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렇다. 그가 이런 꼼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싶어 하는 상대는 바로…….

열네 살 먹은 꼬마 마법사 파타슈.

새삼스럽지만 어디 아동용 애니메이션에나 붙을 것 같은 제목이구나.

나는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제 카눌레가 날 먼저 찾아와 한 말도 그에 관련된 것이었다.

대진표를 확인하니 자신의 1회전 상대가 파타슈였다는 것.

마법 물품 사용 여부에 관해 따로 추첨을 거치지 않아도 파타슈는 시합 때 마법, 정확히는 마나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애초부터 대회 규칙에 ‘마법 물품 금지’는 있어도 ‘마법 사용 금지’는 없었다.

그야, 보통 학생은 마법을 쓸 줄 모르니까.

거기에 덧붙이자면, 애초부터 검술 대회에 나올 만큼 무예에 능한 마법사도 드물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아펠이 괜히 세계관 최강자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어쨌든 카눌레는 바로 그것이 마음에 걸려 파타슈를 이기고 싶다며 날 찾아온 것이었다.

파타슈가 간단한 손짓만으로 카눌레를 발라당 뒤집었던 게 그들의 첫 만남이기도 했고.

어릴 때 기억이라는 건 참 오래 가네…….

“뭘 봐?”

아무튼 말을 해도.

새삼 옛날 일을 떠올리느라 정신을 놓고 있던 내가 뚱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파타슈 님한테 지는 게 그렇게 싫어?”

“검술 대회에서 마법 쓰는 게 반칙이지!”

카눌레가 발끈해 쏘아붙였다.

내가 깜짝 놀라 손가락을 내 입술에 댔다.

“쉬잇!”

“…….”

그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파타슈가 시합 때 쓸 마법이라고 해봐야 마법진 쓰는 마법이 아니라 순수 마나를 이용하는 수준이겠지만 카눌레는 그것도 싫은 모양이었다.

더 파고들어 봤자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될 것이 뻔했기에 나는 그만 화제를 돌렸다.

“내가 해야 할 건?”

“흥, 그것만 제대로 외워놔. 응용을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 시합 때도 거기 적힌 대로 공격하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는 바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카눌레가 마법처럼 내 검술 실력을 끌어 올릴 수도 없을 테니까.

“알았어.”

“좋아, 거래 성사. 오늘 일은 비밀로 해!”

카눌레가 짐짓 진지하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아무래도 곧바로 기숙사에 돌아가려는 것 같아서 내가 그의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에클레어나 크바스 오빠를 이기는 건 걱정 안 돼?”

“하, 두고 봐라. 갈레트 형 생일 선물로 우승 상패를 넘겨줄 테니까!”

“응? 생일 선물 안 챙길 거라며.”

“말이 그렇다고!”

카눌레가 빽 소리치고는 멀어졌다.

아무튼 나이를 먹어도 저 성질머리는 그대로구나.

* * *

에클레어는 내가 떠난 후에도 혼자 훈련을 한 듯 완전한 밤이 되어서야 기숙사에 돌아왔다.

막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를 내가 웃으며 맞았다.

“왔어?”

“너야말로 뭐 하느라 먼저 온 거야?”

에클레어가 삐친 듯 새초롬한 표정으로 내 책상까지 성큼 다가왔다.

아차 싶어 공책을 덮었지만 그걸 수상쩍게 여긴 듯, 그녀가 공책을 높이 들었다.

“이게 뭔데 그래?”

“아, 안 돼!”

에클레어가 만세 하듯 두 손을 위로 뻗자 키가 작은 나는 그 공책을 도로 빼앗을 수가 없었다.

그래, 나만 꼬맹이다 이거지?

나는 괜히 씩씩거렸다.

에클레어나 카눌레는 나보다 세 살이나 위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한 살 어린 파타슈조차 나보다 키가 컸다.

잠깐, 설마 내 키 여기서 더 안 자라는 건…….

순간 떠오른 생각에 오싹해졌다.

“뭐야, 커스터드 검술 족보인가.”

그러는 사이에 에클레어가 공책을 펼쳐 보았다.

점프까지 해서 그것을 낚아챈 내가 공책을 품에 안은 채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남의 걸 함부로 보구 그래?”

“겨우 이거 조사하러 갔다 온 거야?”

“겨우라니! 내가 검술 대회 1회전을 통과하려면 이 정도 예습은 필수라고! 물론… 나쁜 짓이지만…….”

발끈한 것도 잠시, 곧 내 말끝이 흐려졌다.

원래 타 귀족가의 검술을 분석하는 건 큰 실례였다.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는 편법이긴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면 검술 대회의 출전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었기에, 나는 에클레어를 향해 최대한 불쌍한 척 눈망울을 굴렸다.

“이를 거야……?”

“아니?”

에클레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제야 안도했다.

“겨우 크렘 브륄레를 이기는 데 족보까지 필요하다는 사실은 경악스럽지만.”

그녀가 킥킥거리며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까 카눌레 1회전이 그 녀석이더라? 네가 후원해 줬다는 꼬마.”

나랑 겨우 한 살 차이인데 꼬마라고 불리는 게 나까지 덩달아 언짢았다.

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에클레어가 뻔뻔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왜?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1학년인데 꼬맹이 맞지.”

내가 한숨을 내쉬며 공책을 도로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런 내 행동이 에클레어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 것 같았다.

“그 녀석이 뭔데 후원까지 해줬어? 진짜 검술 천재라도 돼?”

“됐으니까 아무 데나 시비 걸고 다니지 마. 젤라토 오빠한테 이른다?”

“유, 유치하게 왜 이래?”

“먼저 유치한 짓 한 게 누군데 그래?”

젤라토 말에 껌뻑 죽던 어린 시절의 에클레어에게는 제법 잘 통하는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그녀도 어엿한 아가씨였다.

민망한 옛날이야기를 들추자 에클레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너, 너어…….”

“왜 그래요, 언니?”

나는 시치미를 떼며 방긋 웃었다.

그러자 에클레어가 눈을 번뜩이고 선언했다.

“너, 대회까지 매일 아침마다 나랑 달리기해!”

“…….”

…이제 와서 사과해도 안 물러주겠지?

【 수련회로 가는 관문 】

부담과 긴장으로 잠을 설친 만큼 눈꺼풀이 무거웠다.

나는 도톰하게 부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에클레어는 제 침대 위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대련이나 결투가 있는 날 가벼운 명상을 하는 건 그녀의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오늘도 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오늘이 대회 날이잖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벌떡 허리를 일으켰다.

기척을 느낀 에클레어가 눈을 뜨고 내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일어났어?”

그 순간 확성 마법 소리가 들려왔다.

「곧 커스터드 검술 대회가 시작됩니다. 출전 등록을 한 학생들은 야외 강당 뒤쪽, 제2연무장으로 모여주세요.」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내가 멍청한 얼굴로 에클레어를 올려다보자, 그녀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자.”

* * *

“크레페 님?”

검술 대회의 참가자 대기실은 제2연무장에 설치된 천막이었다. 에클레어와 함께 그쪽을 향해 가던 중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제일 먼저 새빨간 머리색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키슈 님!”

“역시! 맞죠? 진짜 오랜만이네요!”

키슈도 반가운 듯 화색을 띠고 다가왔다.

기숙사에 들어오며 나와 브라우니는 생이별을 해야 했지만 그간 아예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얘기했던 대로 키슈가 연구를 겸해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브라우니를 데리고 저택에 방문해 주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본 게 파타슈의 입학 서류를 준비해 줄 때였지, 아마?

파타슈가 신입생인 만큼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그녀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그간의 안부를 물어왔다.

7년여의 시간 동안 보지 못한 파타슈보다도 격한 반응이었다.

“아는 분이야?”

에클레어가 슬쩍 물었다.

“응, 파타슈네 어머니셔.”

“아아.”

에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키슈 로렌이에요. 마탑에서 연구를 하고 있답니다.”

“에클레르 오 바니유라고 합니다.”

에클레어가 자세를 바로 하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에 얹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기사 지망생다운 예법이었다.

“제 아들을 아세요?”

“얼마 전에 인사를 나눴습니다.”

에클레어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그녀의 대처에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외부인에게까지 막나가진 않는구나. 다행이야…….

“아, 파타슈 님 보러 오신 거예요?”

내가 키슈에게 물었다.

“그렇죠. 1학년이 벌써부터 대회 얘기를 해서 놀랐거든요. 검술은 가르친 적도 없는데. 아, 갈레트 님한텐 연설 초청이 들어왔다고 둘러대고 나왔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감사 인사를 했다.

키슈가 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감사는요. 부탁하신 대로 갈레트 님은 마탑에서 꼼짝 못 하게 뺑이 쳐 드릴게요.”

나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제 성인이 다 된 청년을 뺑이 쳐 달라고 부탁한 입장에서는 살짝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아무튼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그때 에클레어가 어깨로 나를 살짝 밀었다.

“야, 차례 아니라도 가서 준비는 하고 있어야지.”

“앗, 그러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시합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크레페 님이요?”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키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민망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었다.

나는 먼저 실례하겠다고 인사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됐어요. 그럼 이따 다시 봐요!”

“네, 객석에서 응원할게요!”

키슈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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