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 * *
카눌레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에클레어는 제 책상에 앉아 공부 중이었다.
푸딩의 상태가 심각하거나 내게 따로 할 말이 있었다면 저런 태도일 리가 없었다.
나는 잠깐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어정쩡하게 내 의자에 앉았다. 물론 그녀의 바로 옆자리였다.
집중하고 있는데 말 걸어도 괜찮으려나?
순간 고민했지만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에클레어가 별안간 펜을 내려놓고 의자 다리를 드르륵 당기며 다가오더니 내게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야,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둘 다 열심히 하자!”
“…응?”
듣자 하니 다행히 푸딩에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일이 에클레어의 열정과 라이벌 의식에 더욱 불을 붙인 것만은 분명했다.
“자, 크레페, 빨리!”
“끄응…….”
꼭두새벽부터 날 흔들어 깨운 에클레어가 재촉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같이 훈련을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검술 시간마다 날아다녔던 그녀의 체력을 내가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겠냐고!
“나 어제 늦게 잤는데에…….”
하기 싫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 웅얼거려 보았지만 에클레어는 양보하지 않았다.
“약한 소리 하지 말고! 혹시 알아? 크렘을 이기고 나면 ‘날 이긴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악!”
“일어나아!”
에클레어에게 맞은 등짝이 화끈거렸다.
“아, 알았어.”
도저히 말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덕분에 잠이 다 깬 나는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우당탕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어제 늦게까지 잠 못 들었던 이유.
혹시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그걸 곱게 접어 챙기고 에클레어를 따라 기숙사를 나갔다.
* * *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서 새벽 운동까지 마친 내가 수업 내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간혹 고개가 앞이나 뒤로 확 고꾸라질 때마다 번쩍 정신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카눌레나 에클레어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어제 카눌레랑 무슨 얘기 했는데? 그것 때문에 잠 못 잔 거야?”
수업이 끝날 때쯤 에클레어가 뒤늦게 물었다.
“별건 아니고 이런저런… 하암.”
대답 중간에 의도치 않은 하품이 나왔다.
에클레어는 본인이 더 민망하다는 듯 으휴, 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내심 하품이 지금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카눌레랑 대화했던 내용은 비밀로 하고 싶었으니까.
“아무튼 마저 훈련하자! 시간이 얼마 안 남았잖아.”
“끄엑. 또?”
에클레어가 내 등을 떠밀며 꺼낸 청천벽력 같은 말에 저절로 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에클레어는 그에 대해 놀리는 말을 하는 대신 엄격한 표정으로 콧바람을 내뿜었다.
“너 수련회도 가겠다며! 내가 아끼는 동생이 변방에서 개죽음당하게 놔둘 순 없지. 빡세게 훈련시켜 줄 테니까 나만 믿으라구.”
이건 에클레어의 걱정에 고맙다고 감동해야 할 타이밍일까……?
순간 격한 갈등에 휘말렸지만 차마 고맙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 반응과 상관없이 에클레어는 기어이 날 연무장으로 데려다 놓았다.
여자 기숙사와 남자 기숙사 사이, 경사로 아래에 있는 제3연무장.
수업이 다 끝났을 시간인데도 연무장에는 제법 사람이 많았다.
나나 에클레어처럼 검술 대회가 가까워져서 자율 훈련을 하러 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다들 힘이 남아도는구나!
“자, 가자.”
에클레어가 가볍게 말하고 워밍업을 시작했다.
워밍업. 사전적 의미를 따지자면 본격적인 운동을 하기 전 가벼운 몸풀기.
하지만 오늘 아침을 떠올려보면 그녀의 몸풀기는 운동장 30바퀴였다.
세상에, 누가 그걸 몸풀기로 해?
“아휴, 못 해먹겠다!”
결국 나는 두 바퀴도 다 못 뛰고 배 째라 하며 운동장 한가운데에 드러누웠다.
에클레어는 땀을 조금 흘렸을 뿐 숨차 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 체력으로 지금까지 검술 수업은 어떻게 받고 있었냐?”
에클레어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말했다. 나는 물론 대답해 줄 여력도 없이 헥헥거리느라 바빴다.
“으휴, 빨리 일어나. 몬스터 나오면 적어도 도망은 가야 할 거 아냐?”
내 눈물 나는 체력에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하건만, 그녀의 표정에 동정심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나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세우고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하지만 그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자 에클레어가 옅은 한숨을 내쉬고 내 옆에 쪼그려 앉아서 볼록 튀어나온 내 배를 꾹 눌렀다.
“으핫! 뭐, 뭐 하는 거야!”
내가 콩벌레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소리쳤다.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법 안 써? 힘들면 쓰지.”
그녀의 질문을 듣고 나는 내 팔찌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침에 운동장 뺑뺑이 돌 때 이미 마법을 쓴 터라, 다시 이걸 사용하기엔 걸리는 점이 많았다.
기절하기 전에 증상이 없으니, 까딱 잘못하면 또 픽 쓰러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잖아도 과보호와 오지랖 경계선에 있는 에클레어였다. 방심했다가 다시 한번 기절하면, 만에 하나라도 그녀의 걱정이 갈레트급으로 업그레이드될 가능성이…….
“으으!”
순간 아찔한 상상을 해버린 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에클레어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그녀의 뒤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한가운데 퍼질러 앉아서 뭐 하냐?”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선 남자였다.
“크바스 오빠? 연습하러 왔어?”
에클레어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크바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뭐, 졸업반이라고 대충 할 순 없으니까. 황실 기사단의 명예가 있지.”
그 말대로, 크바스는 황실 기사단에 입단이 예정된 상태였다.
작년의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얄밉지만 실력은 인정하는 수밖에.
그러고 보니 황실 기사단이면 아펠이랑도 만나겠지?
“대회 연습하러 온 거야? 이 녀석은 왜 퍼질러져 있어?”
크바스가 에클레어를 향해 묻고 마지막엔 날 내려다보았다. 그때까지도 바닥에 앉아 있던 내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졸업을 앞둔 11학년이었으니 8학년인 나와는 세 계단밖에 차이나지 않았지만 나이는 나보다 아홉 살이나 많은 스물넷이었다.
키 차이나 덩치 차이도 있었기에, 그를 앞에 두자 느낌으로는 그가 내 키의 두 배쯤 되는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아예 일어선 다음에도 이 정도라니.
“와, 진짜 너무 컸다. 옛날에는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크바스는 ‘어쭈?’ 하듯 눈썹을 찡긋하고 내 머리통에 큼지막한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넌 위로는 안 크고 옆으로만 컸구나.”
“…….”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런 건가.
“크흠. 나랑 크레페, 둘 다 대회 나가.”
에클레어가 뒤늦은 대답을 하며 끼어들었다. 그 말을 들은 크바스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가 대놓고 비웃는 말을 하기 전 에클레어가 잽싸게 덧붙였다.
“1회전 상대는 크렘이야.”
“뭐? 커스터드 자작가의?”
크바스가 한 번 되묻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진짜냐? 야, 이거 기대되는데?”
그런 말을 하며 크바스가 내 머리통을 꾹꾹 눌렀다. 불쾌한 것보다도 크렘에 대한 동정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는 자리를 옮겨 그의 손바닥에서 벗어난 다음 대놓고 질문했다.
“크렘 님 실력이 그렇게 별로예요?”
“뭐, 노력은 가상하다만.”
크바스가 차마 그렇다고 잘라 말하지 못하고 대충 말을 흐렸다.
나는 그 대답만으로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걔 상대는 우리가 아니라 크레페잖아. 방심하면 질걸?”
어느새 무기 보관함에서 가검을 꺼내 온 에클레어가 내게 그것을 내밀었다. 크바스가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섰다.
“어디, 도토리가 얼마나 컸나 볼까?”
…저는 아직 쉬고 싶은데요.
그들과 달리 검술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핑곗거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언덕 위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볼게!”
“뭐?”
“크, 크레페?”
* * *
“어라?”
나름 서둘렀다고 생각했는데 계단을 올라오자 그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연신 사방을 살피며 검은 머리카락을 봤던 것 같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히 봤는데…….
미행하던 대상을 놓친 삼류 탐정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이내 빽빽하게 나무가 심어진 산책로에 들어섰다.
“오, 오빠?”
빛이 나무에 가리자 그제야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았다.
하늘에는 달이 떠 있고 주변에 느껴지는 인기척도 없었다.
언뜻 형상만 확인하고 마구잡이로 따라온 터라 방향을 잡기가 힘들었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건가? 약속대로 기숙사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게 나았으려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냐?”
“끄악!”
“쉿.”
카눌레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니, 앞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뒤에서 나타나고 그래…….
내심 민망함을 담은 변명을 웅얼거리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눌레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산책로를 벗어나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여기면 되겠지.”
카눌레가 주변에 대한 경계를 낮추지 않고 멈춰 섰다.
“크흠, 빨리 왔네?”
쫄았던 게 부끄러워 괜한 인사말을 꺼냈다.
카눌레가 언짢아하는 얼굴로 짝다리를 짚었다.
“너야말로 기숙사에서 기다리라니까, 이 시간까지 쏘다니기나 하고.”
내가 쏘다니고 싶어서 쏘다닌 줄 아나.
반항심이 들긴 했지만 나도 이런 시간까지 에클레어가 날 안 놔줄 줄은 몰랐다.
대꾸 없이 부루퉁한 표정을 짓자 카눌레가 먼저 운을 띄웠다.
“물건은?”
“여기.”
짧게 대답한 내가 아침에 챙겼던 손수건을 품에서 꺼냈다.
카눌레는 곧바로 내 손에서 그것을 챙기려 했고, 나는 그의 손길을 피해 손수건을 도로 거두었다.
“오빠는?”
행동을 저지받은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가 품속에서 공책 한 권을 꺼냈다.
“…자.”
어째 누아르 범죄 영화의 한 장면 같네.
괜히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충동을 참고 내가 먼저 공책을 확인했다.
“음, 틀림없군.”
혼자 상황에 취해 한껏 분위기를 잡자, 카눌레가 휙 하니 내 손수건을 가져갔다.
“내놔.”
“앗.”
내가 말리기도 전에 그가 손수건을 앞뒤로 살펴보았다.
처음엔 무심한 표정이었던 카눌레의 표정이 점차 어린아이처럼 들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