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크렘이 이번 기사 수련회에 신청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했고, 이제 나만 그 수련회에 참가한다면 그 기간 동안은 크렘과 동고동락하게 될 것이었다.
그 정도 시간이면 분명 크렘과도 친해질 수 있을…….
“엇, 검술 대회 대진표 나왔나 보다.”
에클레어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앞을 보자 접수를 받던 천막에서 사람이 나와 게시판에 큰 종이를 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접수를 마치고도 바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우리처럼 대진표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게시판 앞으로 모여들었다.
“처, 천천히 가아!”
내가 정신없이 이리저리 휩쓸리는 동안 에클레어는 미어캣처럼 몸을 바짝 세우고 인파 사이로 재빨리 파고들었다.
나는 뒤늦게 그녀를 따라잡고 끙끙거리며 균형을 잡았다.
“나랑 카눌레는 준결승쯤 가야 붙겠네.”
시력이 좋은 에클레어가 순식간에 제 이름을 발견했다.
그들은 여전히 검술에서 라이벌 관계였다.
카눌레야 뭐,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적을 많이 만들어놓는 스타일이었으니까.
“그, 그래?”
은근슬쩍 책임 회피적인 생각을 하며 나도 내 이름을 찾아 분주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2회전에 진출하는 게 목표인 만큼 1회전 상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왕이면 신입생이랑 붙고 싶다.
8학년이 하기에는 다소 양심 없는 기도를 하던 도중에 누군가에게 확 떠밀렸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게시판에 이마를 박은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부딪힌 곳을 손으로 문질렀다.
“어라.”
바로 눈앞에서 나는 내 이름을 발견했다.
상대를 확인한 내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몇 번 읽든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 대(對) 크렘 브륄레 커스터드.
“크레페, 네 이름은 어디 있어? 안 보이… 악!”
내 뒤편에서 종알거리던 에클레어가 별안간 악 소리를 냈다.
그리고 지옥철을 연상케 할 만큼 바글바글하게 몰린 사람들이 동시에 내게 몸을 기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기우뚱.
“엑.”
“위험해요!”
게시판이 통째로 기울었다.
거기에 두 손을 짚고 있던 나도 함께 넘어지려는 순간,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품 안에 거대한 짐볼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둥실.
투명한 짐볼을 껴안고 앞구르기를 하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나는 게시판이 부서지는 와장창 소리와 함께 거대한 공을 껴안은 듯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으아아아!”
“크레페!”
당황한 에클레어의 외침과 별개로, 나는 두 바퀴 반 정도를 구르고 그대로 우뚝 섰다.
“어, 어라?”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나는 결코 체조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내 손과 몸을 내려다보았지만 여전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듯한 묘한 감각이 여운처럼 일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이 느낌은 설마?
“다친 데 없어요?”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천막 앞, 갈색 피부의 소년이 내게 다가왔다.
브라우니의 아빠이자 올해 입학한 신입생, 내가 후원해 주고 있는 미래의 대마법사 파타슈였다.
* * *
“진작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아, 아녜요. 파타슈 님도… 바쁘셨을 텐데.”
나는 파타슈와 짧은 인사를 나누는 도중에도 계속 그의 전신을 힐끗거렸다.
그동안 몇 번 편지를 주고받긴 했으나 실제로 보는 건 입학 이후 처음이었다.
브라우니와 만날 때나 필요한 서류에 서명을 할 때는 거의 키슈가 수고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두면 입학 시기를 놓칠 것 같아서 공부만 시키는 중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런 이유로 파타슈의 모습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날카로운 눈매나 어두운 피부색, 언뜻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은 어렸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일단 나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커진 키가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크레페 님이 워낙 유명해서 먼저 찾아가기 어색하더라고요.”
파타슈가 민망한 듯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아, 혀 짧은 말투가 아니라는 것도 어색하다.
“뭐야, 괜찮아?!”
얼빠진 얼굴로 파타슈를 뚫어져라 보던 중 에클레어가 후다닥 다가왔다. 방금 전의 소란이 이제 막 수습된 모양이었다.
에클레어는 인파에 밀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나와 파타슈를 번갈아 보았다.
“이건 누구?”
“이거요?”
‘이거’라는 대명사를 강조하며 파타슈가 눈매를 치켜떴다.
파타슈와 에클레어, 둘 다 인상 더럽기로 둘째라면 서러울 인물들이었기에(카눌레까지 합쳐 톱3 정도 될 거다.) 그들 사이에는 스파크라도 튈 듯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쪽은 파타슈 님! 파타슈 로렌 님이야.”
그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싶어 내가 끼어들었다.
에클레어가 대답을 듣고 흐음, 콧소리를 냈다.
“크레페, 네가 후원해 줬다는 신입생?”
“마, 맞아.”
누가 나서서 말한 게 아니어도 이런 이야기는 금방 퍼지기 마련이었다. 아마 파타슈가 먼저 날 찾아오지 못한 건 그 소문 탓도 있을 것이다.
물론 거짓말해서 좋을 건 없었기에 나는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클레어가 파타슈를 슥 훑어보았다.
“평민인 줄 알았는데, 바움쿠헨인? 여긴 무슨 일로?”
무시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드러나 보이는 태도였다. 불쾌한 시선에 파타슈가 인상을 찌푸렸다.
“언니!”
일이 커지기 전에 내가 나서서 에클레어를 말렸다.
물론 파타슈는 그녀보다 어리고 키도 작은 신입생이었으니 얕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도 공작 영애라는 작위는 엄청났고 말이다.
하지만 파타슈의 행보를 생각하면 당장 여기서 난동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도 갈레트와 카눌레에게 지지 않고 맞받아치곤 했으니까.
“크흠, 괜찮아요.”
그러나 파타슈의 대응은 내 생각보다 차분했다.
“슈트루델 사람입니다. 여긴 검술 대회의 대진표를 확인하러 온 거고요.”
“1학년이 대회에 나오는 거야?”
“언니도 1학년 때 대회 나갔잖아. 파타슈 님, 죄송해요. 다음에 다시 봐요.”
아무래도 이 둘을 붙여놨다간 보는 사람 바글바글한 곳에서 사건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나는 대충 인사하고 에클레어를 잡아끌었다.
그러면서 게시판 앞에서 카눌레의 모습을 발견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에게 알은체를 하진 못했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이 내가 아닌 파타슈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다.
* * *
“세상에! 너랑 크렘이랑 붙는다고? 님과 친해지기 위해 그 님을 짓밟아야 하다니, 이 무슨 비극적인!”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에클레어가 한껏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새장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클레어의 하얀 매, 푸딩이 반갑다는 듯 날개를 파닥거렸다.
“놀리는 거야?”
“설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클레어는 웃는 얼굴이었다. 나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에클레어는 태평하게 푸딩이 든 새장을 창가로 가져가 문을 열어주었다.
“잘 다녀와, 푸딩.”
몸을 꺼낸 푸딩은 새장 꼭대기에 앉아 에클레어와 눈인사를 하고, 익숙하게 그녀의 근처를 한 바퀴 휘돌고 난 후에 창문을 나갔다.
딱히 놀라거나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처럼 선선한 저녁이면 푸딩이 혼자 산책하다가 알아서 돌아오곤 했으니까.
나는 빈 새장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에클레어를 보다가 말을 걸었다.
“크렘 님 어때?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어차피 둘 다 마법 물품 쓸 거잖아? 그니까 가능성이 없진 않을 것 같은데. 그보다 나는 아까 봤던 그 꼬마가 더 신경 쓰인다.”
“파타슈 님?”
무시하면 무시했지, 에클레어가 누군가를 대상으로 먼저 ‘신경 쓰인다’는 말을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열넷의 나이로 귀족 학교에 입학한 신입생. 그 정보 어디에 신경 쓰일 만한 게 있는 걸까?
나나 갈레트처럼 아주 어릴 때 입학한 것도 아니고, 열넷이면 평범한 수준이었다.
물론 평민이면서 키슈의 양아들이 될 만큼 마나를 다루는 재능이 있으니 마법에 한해서는 천재라 하겠지만, 에클레어가 그걸 알 리도 없고 말이다.
“1학년이 대회에 참가한다는 건 어디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 아냐. 게다가 네 후원을 얻어낼 만큼의 재능…….”
에클레어가 추리 소설에 나오는 탐정처럼 읊조렸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앞머리에 가려 어두워졌다.
눈치챈 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클레어가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설마 검술의 천재? 내 라이벌?”
…어차피 헛다리 짚을 거면 분위기 잡지 말라구.
아무래도 에클레어의 머릿속엔 검술 말고 다른 쪽 재능에 대한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에클레어에게 파타슈의 정보를 정정해 주는 대신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하긴 또 모르는 일 아닌가. 못 본 사이에 파타슈가 검술도 열심히 훈련했을지.
푸드덕, 푸드덕.
“야.”
그때 누군가 창문 너머에 섰다.
나와 에클레어가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푸, 푸딩!”
창 너머에 있던 것은 카눌레였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푸딩의 발을 꽉 쥐고 서 있었고, 불쌍한 푸딩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날개를 파닥거리는 중이었다.
나는 경악스러운 풍경에 순간 정신 줄을 놓았고, 그사이 에클레어가 달려들어 카눌레의 팔을 쳐냈다.
“아야.”
카눌레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낮은 신음성을 냈다.
푸딩이 지친 듯 비치적비치적 날갯짓해 새장으로 들어갔다.
에클레어가 푸딩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 카눌레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너네 새 탈출했길래 내가 붙잡아 왔는데, 고맙다고 안 하냐?”
“야만인이야?! 왜 새를 그따구로 잡아!”
“아. 아야.”
뒤늦게 내가 나서서 카눌레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러나 내게 느껴지는 감각은 마치 단단한 돌을 때리는 것 같았고, 카눌레의 얼굴도 딱히 아프다는 듯한 표정이 아니었기에 그의 아야 소리는 얄미움만 더할 뿐이었다.
“푸딩 혼자 풀어놓으면 산책하고 돌아온단 말야! 하여간 이쪽에 오질 않으니 알 리가 없… 아니, 그러고 보니 여긴 무슨 일로 온 건데?”
“너 잠깐 나와봐.”
카눌레가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에클레어를 돌아보았는데, 그녀는 아직 푸딩의 상태를 살펴보느라 내게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였다.
내가 슬쩍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 금방 갔다 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