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때 방 안이 환해지며 에클레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일 축하해!”
“엥?”
갑자기 눈앞이 밝아져서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마법등 불빛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나니 이 방에 있는 게 에클레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눌레, 빨리!”
“추… 축하…….”
“이게 무슨…….”
오늘이 대체 누구의 생일이란 말인가.
나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에클레어가 내 팔을 끌어당기며 기숙사 문을 걸어 잠갔다.
“조심해, 카눌레가 아무리 남매라도 여자 기숙사에 들어온 걸 들키면 안 되잖아.”
“아, 응… 아니, 이게 뭐야? 생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정신을 차렸다.
에클레어가 나를 책상 앞까지 이끌었다.
책상 위에는 생크림을 끼얹은 수플레 팬케이크가 놓여 있었는데, 초보의 솜씨인 듯 두께는 납작했고 색도 반쯤 탄 갈색이었다.
덧붙여 꼭대기엔 초콜릿 크림을 이용해 ‘생일 축하해, 크레페’라는 문구가…….
“급해서 케이크는 준비 못 했지만.”
에클레어가 머쓱해하는 얼굴로 첨언했다.
그녀의 옷에 초코 크림 따위가 묻어 있는 것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직접 만들었어?”
“늦은 시간이라 일손이 없다고 하더라고. 우리 오빠가 좀 도와줬어. 참고로 말하자면, 카눌레는 별 도움 안 됐고.”
나 한 명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고생했다니, 감동적이라고도 할 만한 일이었다.
오늘이 내 생일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카눌레도 분명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사정을 설명해 달라는 바람을 담아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카눌레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못 이겨 붉으락푸르락해진 상태였다.
그 얼굴색을 봐도 그렇고 표정을 봐도 그렇고, 도무지 상황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왜 가만히 있어? 단거 좋아한다며. 생일이면 생일이라고 말을 했어야지! 나, 나도 이 정돈 해줄 수 있어.”
에클레어가 내 어깨를 툭 치고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넋을 놓고 그녀의 행색을 살폈다. 내일이 대회인데 이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크림이 묻은 옷과 쑥스러워하는 표정까지.
나는 그제야 카눌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래서 얘기 못 한 거구나.
“응, 고마워.”
내가 웃으며 화답했다.
그래, 그냥 오늘이 생일이라고 하지, 뭐.
【 열다섯, 재도전 】
[커스터드 검술 대회 참가 신청서]
이름 :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
사용할 무기 : 검
마법 물품 사용 여부 : X
관련 경력에 ‘없음’이라는 단어를 휘갈겨 쓴 것을 마지막으로 신청서를 접수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서자 검은 머리의 청년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심이냐?”
짝다리를 짚고 선 카눌레였다.
7년이 지나도 저 아니꼬운 표정은 그대로구나.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지만 시간이 되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전보다 훌쩍 커진 그의 체격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너, 옛날에 훈련하다 말고 기절했던 거 기억 안 나?”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런 걸 걱정해?”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 천막을 나가려던 때, 접수원이 내 이름을 불렀다.
“밀 크레프 님? 학년 기재를 잊으셨는데요.”
“아, 8학년이에요.”
대답을 들은 접수원이 날 대신해 신청서를 마무리해 주었다.
나는 카눌레를 뒤로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일찌감치 접수를 마치고 날 기다리던 에클레어가 날 발견하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참 독하다, 독해. 크렘이 뭐가 그리 좋다고 7년씩이나…….”
“쉬잇!”
내가 펄쩍 뛰어 에클레어의 입을 막았다.
크렘도 접수를 하러 온 듯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니 다행히 대화에 정신이 팔려 언니의 말은 못 들은 것 같았기에 나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 번도 유의미한 결과를 얻은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대회에는 매년 꼬박꼬박 참가했다.
아니, 의미가 아예 없진 않았지.
내가 출전 정지를 당한 첫 대회일, 크렘은 부전승을 기록했다. 기사 지망생을 위한 수련회에 신청할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설마, 진짜 수련회에 참가 신청을 할 줄이야!
내가 7년 만에 검술 대회에 출전하기로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크렘은 지난 특훈 때 그랬듯이 검술 시간에도 순업을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결과만 봐도 열심히 하는 것치곤 성적이 늘 부진했던 터라, 나는 지금껏 크렘이 대회 참가를 하는 이유가 그냥 교양 수업에 빠지기 위한 핑계이겠거니 했다.
검을 휘두르다 말고 그쪽을 볼 때마다, 그는 계속 다른 귀족들과 희희낙락 잡담이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에 크렘이 기사 수련회에 신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크렘이 그렇게 본격적으로 기사를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진작 알았더라면 나도 열심히 운동을…….
“으휴, 알았다구!”
에클레어가 내 손을 힘으로 떼어냈다.
나는 맥없이 떨어져 나간 내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빵빵한 손바닥과 통통한 손가락, 말랑말랑해 보이는 손목까지.
“에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진작 알았더라면은 무슨.
내 나이 열다섯.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의하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만큼의 미인이 돼 있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토실토실한 아기 돼지 같은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운동은커녕 매일같이 티타임만 즐겼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즐긴 건 다 즐기고 살았으니 딱히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주먹을 꽉 말아 쥐며 크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도 진작 접수를 마친 듯 지금은 검술 연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검 끝이 흔들리는 게 보일 만큼 서투른 실력이었지만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검 손잡이를 꼬나 쥔 고운 손가락이나 흰 피부, 화려한 이목구비에 몽실몽실해 보이는 머리카락이 더 신경 쓰였지.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사내 티가 나는 인상이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 원작에서도 나왔듯 사교계의 귀공자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외모이기도 했다.
귀족들은 보통 열다섯 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사교계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교계 활동’이라는 건 그냥 친구들을 초대한 생일 파티 정도인 데 반해, 크렘은 정말 사교계에서 알아주는 유명 인사였다.
아직 성인도 아닌 열아홉 살에, 언젠가 에클레어가 했던 말마따나 자작가의 아들이면 그리 대단한 직위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 그것도 미남이라서 그런 거겠지?
“내가 절세미인이었으면 먼저 친해지려고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결국 내가 원작의 미모를 얻지 못해 아쉬워했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는 내가 뭘 할 것도 없이 크렘이 먼저 크레페의 미모에 반해 접근해 왔었으니까.
“그렇게 좋냐? 너한테 관심도 없는 애잖아.”
에클레어가 내 혼잣말을 듣고 대꾸했다.
나는 내가 또 속마음을 입 밖에 냈다는 것을 깨닫고 민망하게 헛기침했다.
“됐어. 말이 헛나온 거야.”
“헛나오긴, 뭘. 저번에도 너, 그 녀석 생일 파티 때 쳐들어갔다가 쫓겨났잖아. 그러게 초대장 없으면 가지 말라니까.”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저번엔 네가 같이 스터디를 하자고 했는데도 걔 쪽에서 거절했고.”
그것도 그랬지.
“이번에도 말야. 나랑 오빠가 거대 푸딩이랑 케이크 만들어줬을 때, 그때도 네가 크렘한테 케이크 한 조각 갖다 주지 않았어? 근데 크렘은 거기에 손도 안 댔었지?”
그건 그럴 만했다. 설탕을 부어 넣은 덕에 맛은 있었지만 생긴 모양은 독을 탄 것처럼 흉측한 케이크였으니까.
물론 그 케이크를 만드느라 고생한 에클레어에게 대놓고 그런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점차 입맛이 씁쓸해졌다. 내가 정말 갖은 방법을 다 썼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만일 크렘이 검술 시간에 조금이라도 날 상대해 주었다면, 아마 나도 매년 검술 대회에 참가 신청서를 냈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면 1회전은 통과할 수 있었지도 모르고.
물론 이제 와 후회하기엔 너무 늦은 일이었다.
역시 남은 방법은 이것뿐이겠군.
에클레어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나는 재차 의지를 다졌다.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에클레어가 마저 투덜거렸다.
“어쨌든 난 그 녀석 별로야. 겨우 특별 훈련 몇 번 같이 받는다고 새삼스럽게 친해질 것 같지도 않고.”
“그래,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라, 하고 대충 맞장구를 쳐줬다.
이제 나는 에클레어의 오해를 일부러 부정하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됐다, 다치지만 마.”
그녀도 내가 자신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고 대충 마무리했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걱정 안 해도 돼. 내 목표는 딱 2회전 진출까지니까.”
그러자 에클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차.
“너 설마!”
* * *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해 반드시 한 번은 참가해야 한다는 기사 수련회. 장소나 날짜는 매년 바뀌지만 신청 자격은 항상 똑같았다.
커스터드 검술 대회 2회전 진출자.
올해 수련회 참가 희망 인원을 조사한다는 전단을 뚫어져라 읽던 에클레어가 눈썹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진짜 꼭 가야겠어? 이렇게 된 이상 네가 1회전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무슨 그런 사악한 말을 하고 그래? 별일 없을 거야.”
“하지만 이번 수련회 장소 좀 봐. 변방이라고, 변방! 몬스터들이 우르르 쏟아진다는 거기!”
“괜찮아. 오랜만에 아빠랑 만날 수도 있고.”
“아.”
이번 수련회 책임자의 서명란에는 분명히 우리 아빠의 풀 네임, ‘프랄린 세자르 쉬제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클레어는 그걸 뒤늦게 들여다보다가 ‘아무튼!’ 하며 말을 이었다.
“너 갈 거면 나도 따라갈래! 참 나, 거기까지 가서 또 픽 기절하면 어쩌려고. 진짜 깡다구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하…….”
에클레어가 혀를 차며 친언니처럼 구시렁거렸다.
나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난처하게 웃었다.
예전에 기절했던 건 체력 때문이 아니라 마나 부족 때문이었다고 말해 봤자, 걱정하는 사람 귀에는 핑계처럼 들릴 테니까.
덧붙여 내 ‘체질’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직 갈레트와 카눌레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이건 큰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