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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64)화 (64/181)

64화 

상황을 보니 지금 막 이동을 하려던 차인 것 같았다.

세이프!

부지런히 움직인 보람이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레페, 네가 무슨 일로…….”

“크레페?!”

방 모서리에 처져 있던 가림막을 젖히고 갈레트가 등장했다.

키슈와 피오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사이, 갈레트가 내게 다가와 날 와락 껴안았다.

“어디부터 들어야 할지 모르겠군.”

피오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포트에서 내려왔다.

나는 갈레트의 품속에서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 * *

공간 이동을 하는 방에는 이동용 포트와 리시버 외에도 마법사가 사용하는 책상과 의자, 거기에 심심할 때 소일거리용으로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진열된 책장, 쓰이는 일이 거의 없는 직사각형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다.

나는 나를 끌어안은 갈레트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해서 소파로 갔다.

피오르와 키슈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나를 따라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날 걱정했다고 울먹이는 갈레트의 등을 토닥여 달래고 조심스럽게 그를 떼어놓은 후, 이렇게 첫마디를 시작했다.

“내일 커스터드 축제에서 피오르 선생님이 연설을 맡았다는 얘기 들었어요.”

내가 키슈를 처음 만났던 것도 커스터드 검술 대회 직후에 있던 연설 자리에서였다.

그때 단상에서 끌려 나간 이후로 키슈는 두 번 다시 그 자리에 초청받지 못했다던데, 그건 그리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번에도 마탑 사람이 연설을 하러 온다는 사실이지.

“선생님이 포트를 이용해 학교로 이동하고 나면, 갈레트 오빠도 그 마나가 완전히 흩어지기 전에 슬쩍 마법진을 작동시킬 생각이었대요. 밤에는 카눌레 오빠 기숙사에서 묵고요.”

나는 요점을 추려 말하며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갈레트가 카눌레에게 썼던 것이었다.

피오르가 그것을 가져가려는 것을 갈레트가 끼어들어 빼앗았다.

“그 녀석이 너한테 내 편지를 보여준 거야? 깜짝 등장으로 놀라게 해주려고 한 건데! 아무튼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오빠!”

내가 큰 소리를 내자 갈레트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큼, 그래. 덕분에 네가 여기까지 와준 거니까.”

갈레트가 싱긋 웃었다.

이제 와서 착한 아이 같은 말을 해봤자 딱히 기특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키슈는 감상이 다른 듯 흐뭇하게 웃으며 드라마를 보는 관객처럼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다행히 피오르는 이 분위기에 편승하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대량으로 응집된 마나는 곧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 부분을 배우면서 작전을 떠올렸나 보군.”

그가 갈레트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갈레트, 어차피 마탑 안에서는 마법을 쓰든 마법 물품을 쓰든, 나가든 들어오든 다 알게 되어 있어. 여기 있는 마법사들을 얕봐도 유분수지.”

“어차피 크레페 얼굴만 보고 다시 돌아오려고 했단 말이에요.”

갈레트가 반성하는 기색 없이 툴툴거렸다.

나는 ‘마법 물품’이라는 단어를 듣고 문득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발동시켜 놓은 후에 아직 안 꺼놓고 있었구나.

이러다 또 픽 기절해 버리면 큰일이기에 뒤늦게나마 팔찌를 감싸 중지시켰다.

그리고 내가 마법 물품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혹시 들켰을까 싶어 앞에 앉은 키슈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그러나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아.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피오르도 마찬가지로 아무 위화감도 못 느낀 것 같았다.

내 몸에 있는 마나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서 눈치채지 못하는 건가?

어쩐지 점점 먼치킨 아닌 먼치킨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었지만 차치하고, 나는 가방을 뒤적여 준비해 온 공책을 꺼냈다.

“그것보다 이거. 오빠한테 주는 선물이야. 오빠가 나보다 똑똑하니까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저택과 학교 도서관을 오가며 알게 된 정보를 적어놓은, 이를테면 요점 정리 공책이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가 내 체질에 대해 신기하다며 감탄하거나 호기심을 표한 적이 있었기에 언젠가 보여주려고 따로 챙겨놨었다.

갈레트가 쓴 편지에도 ‘마탑 생활은 지루하지만 모르는 걸 새로 배우는 건 재밌다’고 적혀 있었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갈레트는 내게서 받은 공책을 대충 훑어보더니 곧바로 표정이 들떴다.

제대로 된 생일선물이라기엔 부끄러웠지만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고마워! 갖다 와서 볼게!”

“응?”

“자, 그럼 가요.”

물음표로 도배된 내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갈레트가 태연하게 소파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아직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키슈가 먼저 물었다.

“어딜 가요?”

“어디긴요. 당연히 학교…….”

“오빠는 어린애잖아! 빨리 내려가서 코 해! 나는 선생님이랑 같이 돌아갈 테니까.”

“뭐어?”

갈레트가 납득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그러나 나는 그 반항을 무시한 채 아래층으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오빠 공부하는 거 방해하기 싫어. 다음에 또 놀러 올 테니까 그때까지 공부 열심히 하고. 알았지? 절대! 학교 오지 마! 화낼 거야!”

“자, 잠깐…….”

어차피 그를 말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에 나는 거의 일방적인 얘기만 쏟아내고 그를 방으로 밀어 넣었다.

이 정도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방문을 닫은 내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털었다.

뒤를 돌아보자 날 따라 내려온 피오르의 표정이 괴상했다.

키슈는 익숙하다는 듯 웃고 있었지만, 그거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고.

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싱긋 웃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 괜찮으면 제 마차를 타고 가시겠어요?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 그래.”

* * *

나를 기다리고 있던 마르크는 내가 손님을 데리고 나오자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내가 사정을 얘기해 주자마자 가문의 기사답게 곧은 자세로 서서 예를 취하고, 피오르를 나와 같은 마차에 안내한 후 자신은 여분으로 가져온 말에 올라탔다.

“할 말이라는 게 뭐지?”

갈레트를 만류할 때 ‘잘 시간(정확히는 코 할 시간)’이라고 얘기했듯, 하늘은 이미 어두워진 지 한참이었다.

피오르의 입장을 생각하면 마차를 이용해 커스터드 영지까지 가는 것보다는 마탑의 마법진을 통해 공간 이동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편했을 것이다.

나는 피오르의 질문을 듣고 그가 굳이 날 위해 동행해 줬음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곧바로 준비한 말을 꺼냈다.

“엄마가 절 마탑에 들여보낸 이유를 아시나요?”

그러자 피오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 말이 뜬금없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네가 똑똑해서 그런 것 아니었나?”

“정확히는 예지몽을 꿨기 때문이에요.”

“…….”

피오르가 입을 다물었다.

마법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예지몽을 꾼다는 얘기는 원래 마법사인 그도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인 듯했다.

물론 내 말의 반 정도는 거짓이었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지.

그렇게 되뇐 내가 말을 이었다.

“저, 갈레트 오빠가 제 눈앞에서 죽는 꿈을 꿨어요. 그래서 오빠를 마탑에 들여보낸 거고요. 마탑이라면…….”

“마탑이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구나.”

피오르가 대번에 내가 하려 했던 말을 파악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고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제가 훌륭한 마법사가 돼서 갈레트 오빠를 지켜주려고 했는데,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그게 잘 안 됐잖아요. 그래서…….”

말을 하면 할수록 내가 잘한 게 없는 것 같아 의기소침해졌다.

엄마를 지키지 못한 것에 더불어 갈레트마저 잃을까 봐, 나는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랑 키슈 님이 오빠를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과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갈레트가 나를 생각하는 게 각별하니만큼, 또 나를 따라오겠다느니 마탑을 탈주하겠다느니 하는 일이 재발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렇다고 아직 어린 갈레트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겁을 주고 싶진 않아.

“크레페.”

“네?”

내 이름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피오르는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경의 렌즈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빛, 마차의 진동과 덜컹이는 소리. 거기에 이따금씩 들리는 말의 투레질 소리까지.

나는 그의 시선이 꼭 내 거짓을 판별하려는 것처럼 느껴져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네가 올해 몇 살이지?”

피오르가 맥락 없는 질문을 했다.

나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여덟 살이요.”

“그래…….”

피오르의 대답에는 옅은 한숨이 섞여 있었다.

그가 별안간 손을 들어 내 머리 위에 올렸다. 쓰다듬었다고 하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알겠다. 무슨 어린애가 이렇게 걱정이 많아.”

그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발밑에 놓았던 짐 가방을 번쩍 들어 옆자리에 내려놓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피오르는 계획보다 늦게 도착했다며 곧바로 학교 본관으로 향했다.

나는 그의 등을 향해 다시 보자는 인사말과 함께 손을 흔들고, 나와 동행해 준 마르크에게도 감사 인사를 했다.

“급하게 연락해서 죄송해요. 이제 돌아가 봐도 괜찮아요.”

“아, 크레페 님.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만, 저택에 선물이 도착했는데 언제 가지러 오실 겁니까? 아니면 여기로 가져다드릴까요?”

“선물이요? 아빠가 보냈어요?”

얼마 전에는 내 생일이었고, 얼마 후에는 갈레트의 생일이었다. 나는 당연히 아빠가 보냈으려니 생각하고 확인차 물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마르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몽블랑 후작님께서 아가씨의 생일 선물로 마론 슈를…….”

“버려주세요.”

“네?”

마르크가 귀신 소리라도 들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나는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결국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휴우…….”

밤바람이 서늘하긴 했지만 기숙사가 그리 멀진 않았기에 굳이 옷을 껴입지는 않았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나와 에클레어가 지내는 방은 1층이었다.

나는 우리 방의 창문이 이미 덧문까지 닫혀 있는 것. 그리고 그 틈새로 빛 한 점 새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걸음 소리를 죽였다.

깨우지 않게 조심해야지.

에클레어가 잠이 든 게 분명했다.

내일이 대회 날이니만큼 컨디션 조절은 필수일 것이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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