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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61)화 (61/181)
  • 61화 

    나는 신청서를 작성하는 내내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물론 디몬은 ‘운명에게는 자신을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다’고 했으니 이 정도의 일로 운명이 아예 뒤바뀌진 않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둘의 러브 라인이 나오진 않았고.

    그래, 크렘과 스캔들이 나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찜찜한 기분을 애써 털어내고 마법 물품 사용 여부를 묻는 항목에 동그라미를 쳤다.

    신청서를 접수한 후 뒤를 돌자, 카눌레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응?”

    “설마 검술 대회 신청한 거야? 네가?”

    “…….”

    굳이 확인시켜 줄 필요는 없겠다 싶어 나는 조용히 옆으로 비켜났다.

    * * *

    원래 검술 대회에 참가하는 1학년은 많지 않다고 들었다.

    물론 카눌레나 에클레어는 처음부터 검술을 취미로 했으니 그들의 대회 참가 소식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대회 참가 신청을 한 신입생이 크렘과 나를 포함한 단 네 명이라는 사실은 조금 놀라웠다.

    그리고 마르크는 다른 것에 더 놀라워하는 듯했다.

    “진짜 나가시려고요? 아니, 대체 왜요?”

    그러게요. 왤까요.

    이제 슬슬 익숙해지려는 반응을 뒤로하고,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크가 내 소식을 듣더니 심경이 복잡해진 듯 연신 눈썹을 씰룩거렸다.

    “아무튼 카눌레 오빠 검 여기 있죠?”

    차마 크렘을 꾀어내기 위해서라는 말은 못 하고 화제를 돌렸다.

    내가 중간고사도 치르기 전에 저택에 들른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카눌레가 아빠에게서 받은 검에 새겨진 마법진을 참고하기 위해.

    돌아보면 젤라토의 자수가 새겨진 손수건을 쓰고도 에클레어의 머리카락을 흔들 정도의 바람을 일으킨 것이 고작이었다.

    확인해 보니 지금 완성되어 있는 손수건의 마법진도 썩 효과가 시원찮았기에 아무래도 카눌레의 검을 직접 보며 참고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작은도련님 없이 혼자 들르신 게 검 때문이었다고요?”

    마르크가 오묘한 표정을 했다.

    “이걸 보러 오신 줄 알았는데…….”

    그때 에이미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나와 마르크가 있는 연무장까지 트레이를 끌고 오고 있었는데, 보통 디저트를 내올 때 쓰던 것과 달리 이번에 거기 올라가 있는 것은 수북한 종이들이었다.

    “이게 뭔데요?”

    “큰도련님의 편지요!”

    “아…….”

    그러고 보니 기숙사 방 번호를 알려주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갈레트는 그동안 저택으로 편지를 보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미안함 반, 민망함 반으로 손을 뻗어 편지 하나를 잡아 펴 보았다.

    [잘 지내? 벌써 열세 번째 편지야.

    여전히 마탑 생활은 지루하지만 모르는 걸 새로 배우는 건 재밌더라.

    크레페 너도 여기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편지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갈레트를 마탑에 밀어 넣어놓고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에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내가 두 장 남짓 되는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에이미가 들으라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으휴, 매정한 아가씨! 그렇게 바빴어요? 얼마 후면 생일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죠?”

    “그건 아니에요! 검술 대회만 끝나면 갈레트 오빠한테 바로 생일 축하한다고 편지할 생각이었다고요.”

    편지를 읽느라 정신없어도 대답은 해야겠다.

    내가 곧바로 부정하자 에이미가 고개를 젓고 고쳐 말했다.

    “도련님 말고 아가씨 생일 말이에요!”

    내 생일?

    그건 정말 까맣게 잊고 있던 게 맞았다.

    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에이미가 마르크와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괜히 민망해지는 기분에 남은 편지를 마저 읽었다.

    [아무튼 네가 보고 싶긴 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볼게.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면 곧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맞지? ―갈레트가.]

    맞긴 뭐가 맞아.

    갈레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적어도 내 나이가 열 살이 넘을 때까지(가능하다면 아예 성인이 될 때까지) 갈레트와 일체 만날 생각이 없었다. 특히나 이 집에서는 더욱이 말이다.

    원작처럼 눈앞에서 그의 죽음을 목격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렇게 저렇게 핑계를 대고 기숙사에만 머무르다 보면 갈레트도 체념하겠지.

    나는 내게 애정을 퍼붓던 갈레트가 어느 순간 내게 데면데면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썩 씁쓸한 그림이었으나 그래도 그가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그 편지를 도로 곱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침울해진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 에이미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이번에 생일 파티하러 내려오실 수 있죠? 큰도련님도 초대했는데.”

    ‘곧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맞지? 맞지? 맞…….’

    갈레트가 편지 끝에 썼던 그 말이 별안간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안 돼요!”

    “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에이미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을 지은 너머로 연무장 가운데에서 기사들을 지도하고 있던 기사단장이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아니요! 단장님은 저랑 같이 어디 좀 가실까요?”

    마르크가 서툴게 단장의 등을 떠밀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나는 감사의 뜻을 담아 그쪽에 눈짓을 하고 에이미에게 말했다.

    “저 진짜로 바빠서 그래요. 중간고사도 봐야 하고, 그다음엔 검술 대회에도 참가하거든요. 카눌레 오빠 뒷바라지도 해줘야 하고요.”

    잊을 만하면 내 변명거리가 되어주는 카눌레에게 내심 이해를 구하고 말을 이었다.

    “집에 어른이 없으니 예산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웬만하면 방학에도 계속 기숙사에 있을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니…….”

    에이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귀족이 아니라 동네 꼬마였다면 당장에라도 내 등짝을 때리며 괘씸하다고 혼쭐을 내주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아니, 잠깐만요. 검술 대회에 참가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의 뜻인데요.

    * * *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에이미는 내 대회 참가 소식에 더 충격을 받은 듯 더 이상 생일 파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1학년인데 위험하게 무슨 짓이냐며 걱정 어린 잔소리가 시작됐을 뿐.

    나는 그녀에게 시달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마법진 분석에 필요할 것 같은 책들을 미리 꺼내놓고 있으려니 얼마 안 있어 누군가 도서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부탁을 받은 마르크가 저택에 보관되어 있던 카눌레의 검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도서관에 들어온 것은 마르크가 아니라 에이미였다.

    나는 혼날 것을 아는 아이처럼 합, 입을 다물고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에이미는 말없이 트레이를 밀며 다가오더니 그 위에 싣고 온 카눌레의 검과 갈레트의 편지 뭉치, 직접 준비한 듯한 초코 타르트와 홍차를 내려놓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아가씨의 사정을 생각하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네? 아, 아뇨! 사과할 것까지야…….”

    아까에 이은 잔소리를 예상했던 내가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에이미가 말을 이었다.

    “혹시 부탁을 하나 드려도 괜찮을까요?”

    “부탁이요?”

    “큰도련님께 파티가 취소됐다는 얘기를 전해주셨으면 해요. 많이 기대하고 계셨을 텐데 저는 차마…….”

    그러면서 에이미가 내 쪽으로 편지를 슬쩍 밀었다.

    나는 편지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에이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눈물이라도 훔치는 듯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가 떨리는 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뗐다.

    “에이미.”

    “흑… 네?”

    “저도 이제 여덟 살이에요. 우는 척은 안 통한다고요.”

    “…그런가요?”

    에이미가 머쓱함을 숨기지 못한 투로 대답했다.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 편지를 내 앞으로 끌어왔다.

    “오빠한테는 내가 편지할 테니 걱정 마요. 이것도 잘 먹겠습니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하고 포크를 들었다.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초코 필링을 가르고 포크를 꽂자 곧 끄트머리에 딱딱한 파이지가 닿은 것이 느껴졌다.

    포크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부수고 한입 크기로 자른 것을 들어 올리자 단면에 초코 칩 녹은 것이 듬성듬성 보였다.

    입안 가득 차오른 군침을 삼키고 경건한 의식이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포크를 입에 넣었다.

    “움……!”

    타르트보다는 브라우니 같은 질감의 필링이었지만 맛은 전혀 달랐다. 아무래도 초코 타르트가 아니라 초코 치즈 타르트인 것 같았다.

    혀 위에서 초콜릿의 쌉싸름함과 크림치즈의 풍미를 즐기던 나는 그것을 채 삼키기도 전에 다시 포크를 들었다.

    “입에 맞아요?”

    말없이 입을 오물거리기만 하던 내게 에이미가 먼저 물었다.

    오랜만에 먹는 단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아차 싶어 입안에 남은 음식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네! 디저트 가져다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내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본 에이미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아무쪼록 무리는 하지 마세요. 아셨죠?”

    “헤헤, 네!”

    나는 손등으로 찜찜한 입가를 문대고 그녀를 향해 웃었다.

    아무래도 일은 이것부터 다 먹고 시작해야겠다.

    【 생일 아닌 생일 파티 】

    검술 대회 참가자 대상의 보충 수업, 특별 훈련이 시작됐다.

    나는 에클레어와 함께 운동장 한쪽에 가서 줄을 맞춰 섰다.

    “역시 너도 참가하기로 한 거야?”

    덩치로 보면 이미 성인과 비슷한 크바스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역시’라는 말에 나는 대번에 그가 말을 건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응. 경험은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에클레어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괜한 불똥이 튈까 무서워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크바스의 물음이 그것보다 빨랐다.

    “저 녀석은 왜 있어?”

    “어, 그러니까 나는…….”

    나는 은근슬쩍 말끝을 흐렸다.

    검술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크바스는 이미 황실 기사단이 눈여겨보고 있다는 말이 떠돌고 있을 정도로 특출난 인재였다.

    그 앞에서 대회 참가 얘길 꺼냈다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은 나고 싶지 않았다.

    “얘도 대회 나가!”

    그러나 에클레어가 날 대신해 답해 주는 바람에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도토리, 아니 크레페가? 얘가?”

    놀랍게도 그 말을 들은 크바스에게는 비웃는 듯한 기색이 없었다.

    그는 나를 깔보는 것도, 코웃음 치는 것도 아닌 괴상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보는 사람이 저절로 불쾌해질 법한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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