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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59)화 (59/181)
  • 59화 

    “내가 말이지, 사실 애 보기는 질색이란 말야.”

    크바스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근데 내가 왜 저 녀석이랑 이렇게 자주 놀아주겠냐?”

    나는 저들의 대련에 한눈이 팔려 크바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에클레어의 공격은 여전히 눈으로 따라잡기 벅찰 정도였으나 카눌레의 표정 변화는 알 수 있었다.

    이제 카눌레도 그녀의 공격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랑 겨우 몇 번 대련하더니 패턴을 익히더라고, 쟤가.”

    해설 같은 크바스의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카눌레가 에클레어의 공격을 정통으로 막아냈다.

    에클레어가 당황한 듯 일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역시! 오빠가 훈련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가문 기사들이 다 오빠한테 재능이 있다고 했단 말이야!

    이 일전에 마르크의 명예가 걸려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부터 슬슬 카눌레의 움직임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에클레어의 빠른 공격을 차분히 받아치는 모습에 몰입해 홀린 듯 탄성이 나올 때쯤, 크바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검법에도 가위바위보처럼 상성이라는 게 있거든.”

    그 순간 에클레어가 카눌레를 등지고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녀의 검 끝이 카눌레의 턱을 노리고 솟아올랐다.

    카눌레가 헉,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곡예를 보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나도 카눌레 못지않게 놀란 얼굴로 크바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날 보고 있지 않았다.

    “크크, 카눌레도 꽤나 애먹을 거다.”

    크바스가 사악하게 히죽거렸다. 그 모습이 영 불길… 아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어느새 모여든 인파를 헤치고 분홍색 머리카락이 불쑥 튀어나왔다.

    “크바스! 애들이 싸우면 네가 말려야지!”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싸움 붙였대요!

    라고 고자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그러나 크바스가 눈치 빠르게 내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제, 젤라토, 네가 여긴 웬일이냐?”

    “아, 이거.”

    젤라토가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벌써 다 됐구나.

    나는 고자질하려던 것도 잊고 마법진이 수놓아진 손수건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의 자수 실력을 한순간이나마 의심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준수한 완성도였다.

    “그보다 쟤네들은 왜 싸우고 있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그냥 대련이야. 재밌잖아, 보고 있자고.”

    크바스가 젤라토의 등을 툭 치고 말했다.

    그 순간 에클레어의 공격 속도가 한 단계 올라갔다.

    “자, 잠깐!”

    눈에 보일 정도로 카눌레의 표정이 당황에 젖었다.

    그런데 잠시 후, 묵직한 바람이 에클레어의 눈앞을 덮쳤다.

    “윽.”

    그녀의 앞머리가 눈을 찌른 듯 순간 공격이 멈췄다.

    카눌레가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목검을 힘으로 맞받아쳤다. 에클레어의 검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검은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바닥에 내리꽂혔다.

    “…….”

    카눌레가 에클레어와 그녀의 검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상황만 보자면 카눌레의 승리가 당연했지만, 아까 크바스와 카눌레의 육박전 때도 그러했듯 한 명이 항복 선언을 하기 전까지는 싸움이 계속되는 것 같았다.

    카눌레랑 싸워보라고 부추긴 게 나였는데, 언니한텐 좀 미안한 짓을 했나.

    아무튼 검을 든 카눌레에게 에클레어가 맨손으로 대항하기는 힘들 듯했다.

    대련의 막바지임을 직감한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에클레어가 외쳤다.

    “푸딩!”

    “어디?”

    나도 모르게 외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민망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연무장에 갑자기 푸딩이 뚝 떨어질 리가 없잖아.

    아니나 다를까, 카눌레도 괴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하냐? 요즘 크레페랑 붙어 다니더니 별 이상한 짓을…….”

    피이익―

    그때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거뭇한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지나 에클레어의 목검을 발로 낚아챘다.

    에클레어가 키우는 흰 매였다.

    “잘했어, 푸딩.”

    매가 떨어뜨린 검을 받아 들고 에클레어가 보란 듯 미소 지었다.

    흰 매가 에클레어의 팔 토시를 횃대 삼아 앉았다.

    대처할 틈도 없이 우위를 빼앗긴 카눌레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 에클레어! 고작 대련하는 데 푸딩까지 쓰면 어떡해.”

    젤라토가 두 팔을 내저으며 끼어들었다. 흰 매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에클레어도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검 끝을 내렸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승자의 그것이었다.

    에클레어가 가슴을 펴고 훗, 웃었다.

    “다음엔 제대로 준비해 봐! 그래도 날 이기긴 힘들겠지만?”

    “에클레어! 미안해, 카눌레.”

    젤라토가 말 안 듣는 어린애 끌고 가듯 에클레어의 팔을 잡고 멀어졌다.

    혼자 남은 카눌레가 날 쳐다보았다.

    “왜, 왜?”

    그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카눌레가 내게 성큼성큼 걸어와 으르듯 물었다.

    “너, 쟤한테 무슨 얘길 한 거야? 내가 왜 적이 되어 있어?”

    카눌레가 언제부터 이렇게 눈치가 빨라졌지.

    “그냥 좋은 라이벌 하나 생겼다고 생각해. 은혜는 잊지 않을게, 오빠.”

    오빠를 팔아넘긴 기분이 제법 쏠쏠하더라고.

    뒷말은 삼키고 멋쩍게 웃었다. 카눌레가 기가 막힌다는 듯 연신 헛웃음을 뱉어냈다.

    “허? 하, 참 나. 하!”

    “더 할 말 없으면 난 이만…….”

    슬쩍 빠져나가려 뒷걸음질을 치는데 카눌레가 내 팔을 잡았다.

    “야, 잠깐.”

    “응?”

    카눌레의 시선이 바닥으로 가 있었다. 바닥에는 내가 계산하던 수식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곤란한 질문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슬쩍 발로 문질러 그 흔적을 지워버렸다.

    “너 설마, 아까 그 바람…….”

    “나 바빠아!”

    빠르게 카눌레의 팔을 뿌리치고 인파에 섞여 그 자리를 벗어났다.

    크바스는 왜 그러느냐며 카눌레를 붙잡았고, 카눌레는 내 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야! 내가 파타슈 그 꼬맹이한테 당한 게 있는데 모를 줄 알았냐고!”

    몰랐으면서!

    * * *

    카눌레가 짐작한 대로, 에클레어의 시야를 방해하는 바람을 일으킨 건 나였다.

    평소 파타슈의 마나를 많이 접했던 만큼 제일 먼저 떠오른 방법이었다.

    뭐, 딱히 카눌레 편을 들었다기보다는 단순한 테스트 의미였지만!

    듣는 사람 없는 변명은 여기까지 하고, 아무튼 그날의 작은 성공 이후 나는 홀로 마법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의 소득은 없었다.

    보통의 마법사는 몸 안에 축적해 놓은 마나를 이용해 마법을 쓰지만 나는 그 마나가 제로였다.

    그 방식대로 마법을 사용하려면 마나를 내 몸에 흡수시키고 그것을 다시 증폭시킨 후 활용하는 마법진을 짜야 하는데, 암만 생각해도 그걸 실전에서 써먹긴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주무기는 결국 젤라토가 수놓아준 손수건을 이용하는 것이 됐다.

    아주 약간의 마나를 흡수하고, 실제 마법을 사용할 때는 내 몸의 겉을 맴도는 마나를 쏘아내는 것.

    증폭을 시킬 수 없으니 한계는 명확했다.

    사실 카눌레와 에클레어의 대련 때, 나는 바람을 일으켜 에클레어를 아예 밀어버리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실제 내 공격은 그녀의 앞머리를 훅 휘날리게 한 게 전부였다.

    그건 장점이나 단점이라고 잘라 말할 수 없는 특성이었다.

    대신이라고 할 것까진 없겠지만, 아마 나는 온갖 마법이 휘몰아치는 전장에 맨몸으로 뛰어들어도 멀쩡할 테니까.

    하지만 그럴 일도 없을 텐데 꼭 검술을 배워야 하나.

    나는 한숨을 삼키고 내 손에 쥐어진 검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진검은 아니고 가검, 그중에서도 목검이었다.

    커스터드 귀족 학교는 매년 축제마다 검술 대회를 열 만큼 검술을 중요시했다.

    대부분의 학생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1학년 때부터 검술 수업을 신청해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수업을 듣기로 한 이유는…….

    “왜 그렇게 죽상이야?”

    에클레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크렘을 빤히 보고 있던 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내가 몸 쓰는 건 잘 못하거든.”

    “그래?”

    에클레어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하고는 제 손에 들린 검을 이리저리 휘저어보았다.

    그녀 역시 카눌레와 마찬가지로 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묵직해 보이는 검을 잘도 휘두르고 있었다.

    “그쪽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검술 선생님이 우리를 향해 말을 걸었다.

    워낙 전 세계의 요인들이 모이는 학교라서인지 선생님도 기본적으로는 모두 존대를 썼다.

    “크레페가 검이 무겁나 봐요.”

    에클레어가 나를 대신해 답했다.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 허벅지보다 튼튼해 보이는 팔을 내밀어 내 손에서 검을 가져가 몇 번 휘둘러보았다.

    선생님은 우락부락한 덩치의 남자였다. 마르크도 제법 건장하긴 했지만 그 옆에 서면 고시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에게 이 정도 목검이 무거울 리 없었다.

    “으음,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힘들면 검술 수업은 몇 년 후에 다시 신청해도 괜찮습니다.”

    “아, 아니에요! 열심히 할게요!”

    나는 다급히 대답하며 목검을 돌려받았다.

    낑낑거리며 자세를 잡자 선생님이 머쓱해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팔을 높이 들어 나뭇가지를 꺾었다.

    그가 팔을 세게 휘둘러 수련용 허수아비를 후려쳤다.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잔가지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에클레어가 눈을 크게 뜨고 와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들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이 내게 가지의 굵은 부분을 내밀었다. 목검 대신 나뭇가지를 휘두르라는 배려인 듯 보였으나, 아직 붙어 있는 몇 장의 나뭇잎들이 날 민망하게 만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걸 티 내는 건 실례일 것 같아서 나는 얌전히 나뭇가지를 받아 들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인지 가지 표면의 까칠한 감촉이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선생님, 제 자세 좀 봐주실 수 있나요?”

    에클레어가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배운 검술을 과시했다.

    수업 시간이니 마법 물품을 쓴 것도 아닐 텐데 검 끝까지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이쪽을 흘끗거리던 카눌레도 은근히 ‘나 그쪽 신경 쓰여요’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니유 공작가의 검법인가 보군요. 젤라토 님께도 말씀드렸지만, 바니유가의 검법은…….”

    선생님이 보기에도 에클레어의 실력이 제법 두드러진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어린아이에게 하기엔 조금 어려워 보이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그 열띤 가르침을 피해 슬쩍 옆걸음을 쳤다.

    아무래도 내 실력으로는 에클레어와 나란히 있기 조금 부끄러워서.

    그러다 문득 크렘을 발견했다.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친 것에 화들짝 놀라며 제자리로 돌아가 태연한 척 검술 연습을 계속했다.

    “에휴…….”

    나는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때문이었다, 내가 검술 수업을 신청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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