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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58)화 (58/181)

58화 

마법사의 자질은 마나를 얼마나 몸 안에 품을 수 있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보통 ‘마법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마법을 쓸 만큼의 마나가 없는 체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마법은 통하기 마련이었고, 나처럼 아예 마나가 빗겨 가는 체질에 대해서는 나도 배우거나 들은 적이 없었다.

‘하늘을 나는 말에게는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는,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내용만 빼면.

그건 나도 브라우니를 키우며 몇 번이고 느껴본 감각이었다.

파타슈가 알을 부화시킬 때도 그랬고, 우리 저택에 찾아온 몽블랑이 테스트를 해본다면서 브라우니에게 마나를 내뿜을 때도 그랬다.

지금까지는 아펠의 마법 실력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페가수스의 특성이었던 모양이구나.

관련된 연구나 전례가 없으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브라우니가 부화할 때 곁에 있었던 것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랑 같은 체질인 브라우니는 마나를 써서 하늘을 날 수 있단 말이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그간 배웠던 지식을 총동원해 마법 수식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마나 증폭, 감지, 변환, 그런 것들은 다 필요 없었다. 필요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

흡수.

내 가설이 맞다면…….

나는 심호흡을 하고 공책에 그린 마법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리고 오른쪽 손목을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목에 선명히 남아 있던 서약의 문양이 스며들 듯 사라졌다.

“…됐다.”

성공해 놓고도 놀라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왜 이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 허무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내 마나는 오라처럼 겉을 맴돌고 있는 듯했다.

카눌레의 검을 내가 작동시킨 것, 내 손이 닿았을 때 크렘의 마법 반지가 작동하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됐다.

페가수스를 키운다는 게 전례 없던 일이라 키슈나 피오르도 몰랐던 거구나.

“좋았어, 이거라면!”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했다. 갑작스레 대마법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하자 들뜨는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헤헤, 당분간 바빠지겠는걸?

* * *

“뭐야? 갑자기 뛰어나가더니.”

에클레어가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왔어?”

가볍게 맞아주는 말만 하고 나는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에클레어가 궁금했는지 내게 다가와 기웃거렸다.

“수업 땡땡이치고 한다는 게 자수 놓기야?”

에클레어의 말투에 기가 막히다는 심경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하지만 나는 집중하느라 받아쳐 주지도 못했다. 소일거리로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해서 하는 거였으니 더욱.

마법을 쓰고 싶을 때마다 공책을 펴고 마법진 계산부터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대신 공식을 도식화시킨 마법 도구를 하나 만들어놓기만 하면…….

“아얏.”

나는 자수바늘에 찔린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피는 안 났지만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하긴 내가 할 줄 아는 자수는 전생에 한 번 해본 십자수밖에 없지.

“끄응…….”

“참 나.”

에클레어가 가볍게 혀를 차고 내 손에서 손수건과 자수바늘을 빼앗아갔다.

“도안 있어?”

나는 얼떨떨하게 마법진 그림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클레어가 내 손에서 가로채듯 그것을 가져갔다.

“언니 이런 거 잘해?”

“…….”

에클레어가 인상을 찌푸리고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어렵네.’ 하는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어려우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자존심 때문에 못 한다고는 못 할 것 같아서, 나는 먼저 손을 뻗어 그녀에게서 손수건을 돌려받으려 했다.

그러자 에클레어는 갑자기 등을 돌리고는 다시 나가는 문을 열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 있어.”

그러고서 그녀가 찾아간 건 남자 기숙사의 젤라토였다.

젤라토는 난데없는 에클레어의 부탁에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웬 자수를…….”

“제가 해도 괜찮아요.”

“아냐, 우리 오빠 잘한다니까?”

에클레어가 제 자랑을 하듯 가슴을 폈다. 그러자 젤라토가 거절하지 못하고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 알았어. 크기가 작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산책이라도 하다 올래?”

“고마워, 오빠!”

에클레어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는 내 팔을 끌어당겼다.

나는 남자 기숙사를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젤라토의 숨겨진 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정말 오빠가 자수 놓을 줄 알아?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냥 해주겠다고 한 거 아니구?”

“걱정하지 마. 예전에 내가 자수 배우다 때려치웠을 때 오빠가 내 숙제 대신해 줬거든.”

문득 몽블랑의 손수건이 떠올랐다.

거기에 증폭 마법진을 수놓은 것도 피오르였다고 했다.

순간 머릿속에서 피오르와 젤라토가 나란히 앉아 자수를 놓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갈레트 오빠도 이제 그런 걸 배우는 건가?

“아, 아무튼! 그럼 언니는 자수 때려치우고 뭐 했는데?”

나는 고개를 털어 잡념을 물리치고 다시 물었다.

“나는…….”

그때 에클레어가 우리 기숙사로 돌아가던 걸음을 멈췄다.

“저거 카눌레야?”

에클레어가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언덕 아래에 있는 연무장에 크바스와 카눌레의 모습이 보였다.

또구나.

더 이상 말리러 갈 생각도 없었다.

나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네. 또 싸우려나 보… 응?”

문득 옆을 보니 에클레어는 이미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냥 기숙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대련을 말릴 수 없다면 차라리 못 본 체하는 게 마음 편할 테니까.

그러나 에클레어를 놓고 혼자 들어가긴 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윽.”

주르륵 모래 쓸리는 소리와 함께 카눌레가 뒤로 밀렸다. 그러자 크바스가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발차기를 날렸다.

카눌레가 팔뚝으로 그 공격을 막았다.

으악, 보는 내가 다 아프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실눈을 뜨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대련용 목검은 일찌감치 바닥에 내팽개쳐진 듯했다.

그들은 연무장 구석까지 굴러간 검을 도로 집어 올 여유도 없이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다.

“크바스?”

에클레어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전 속에 그 목소리를 잘도 듣고 크바스가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뭐야, 너네 왜 같이 구경하고 있…….”

그 타이밍을 노리고 카눌레가 주먹을 날렸다.

크바스가 어린애 공격 막듯이 그 펀치를 받아넘기며 혀를 찼다.

“대화 중인 거 안 보여? 기사도가 빵점이네.”

“쳇.”

카눌레가 가볍게 혀를 차고 목검이 있는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잠깐만, 선배가 언제부터 신입생을 상대로 대련을 했어?”

에클레어가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발뒤꿈치를 들고 물었다. 젤라토라는 연결 고리가 있어서인지 반말이 자연스러웠다.

크바스도 그 말투에 대해 지적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하던 거나 마저 하지?”

카눌레가 매섭게 목검을 내질렀다. 그건 검술을 전혀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날쌘 공격이었다.

“이크.”

크바스가 옆으로 휙 비켜섰다. 그를 노렸던 목검이 허공을 찌르자 크바스가 그 목검을 맨손으로 잡았다.

“뭐야, 진검처럼 하자며! 반칙!”

카눌레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이와 체구, 경험의 차이가 있기 때문인지, 허점을 찌를 때가 아니면 카눌레는 크바스의 상대가 못 되는 것처럼 보였다.

“떼쓰는 게 완전 어린애네.”

그런 카눌레를 보고 에클레어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뭐?”

카눌레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건 누가 봐도 에클레어가 시비를 건 상황이었다.

“어, 언니.”

나는 당황해 에클레어의 옷자락을 슬쩍 당겼다.

그녀의 라이벌 의식을 카눌레에게 돌리긴 했지만, 그래도 둘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분위기 왜 이래? 아, 둘 다 신입생이었지. 사이 안 좋아?”

크바스가 수다스럽게 물었다.

카눌레가 목검을 거두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흥, 딱히 좋고 안 좋고 할 것도 없…….”

“그럼!”

크바스가 카눌레의 말을 끊고 히죽 웃었다.

“둘이 한번 싸워볼래?”

아무튼 이놈은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구나.

에클레어는 카눌레를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의지에 불타고 있었고, 카눌레는 걸어오는 시비를 피할 성인군자가 아니었기에 대련은 쉽게 성사됐다.

나는 의도한 건지 아닌지 사사건건 방해만 해대는 크바스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크바스는 내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연무장만 보고 있었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싸움 붙이니까 좋아요?”

“어이쿠, 이게 누구야. 너무 작아서 안 보였네.”

“웃기구 있네.”

“하여간 말버릇하곤.”

그가 쯧, 혀를 차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너도 검술 수업 들어야 하잖아. 지금부터 잘 봐둬.”

그러고서 그는 지금까지 본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에클레어 언니도 검술 잘해요?”

질문이 무색하게도, 에클레어는 팔 보호용 토시와 다리 각반을 능숙하게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옆에 널브러져 있던 목검을 세게 떨치며 답했다.

“자수 때려치우고 배웠지.”

“바니유 공작가도 무가거든. 젤라토는 약골이지만.”

크바스가 거들었다.

그 말에 에클레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쪽을 째려보았다. 날 향한 눈빛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난 준비 끝났어.”

카눌레가 짝다리를 짚고 신발코로 바닥을 툭툭 쳤다. 딱히 긴장감 있어 보이진 않았다.

“에클레르랬나? 에클레어? 아무튼 적당히 해줄 테니까 너무 겁먹지 말고…….”

그때였다. 에클레어가 목검을 세게 쥐고 카눌레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카눌레는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헉 소리를 내며 검을 쳐냈다.

그야말로 맹공이었다.

나는 에클레어의 공격 속도를 차마 따라가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크바스가 큭큭거리며 보란 듯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바니유가 괜히 공작가겠냐? 아마 몸에 두르고 있는 게 전부 마법 물품일걸? 그것만 있으면 더 빠른 속도! 더 강한 힘! 이라고나 할까.”

크바스가 광고 문구처럼 요상한 제스처를 하며 말을 맺었다.

“바, 반칙 아니에요?”

“에이, 학교 수업도 아닌데. 그걸 잘 다루는 것도 실력이지.”

“…….”

나는 멍청한 얼굴로 에클레어와 카눌레의 공방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카눌레는 공격을 막기에 급급해 보였지만 용케도 급소는 보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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