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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57)화 (57/181)
  • 57화 

    “제 눈 색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레이디께서도 이 사실을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빨간 눈이 악마의 눈이라고? 이 영지에만 있는 소문 같은 건가?

    과학이 덜 발전한 중세에는 그런 미신도 충분히 중요할 수 있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나는 얼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근데 제가 눈 색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설마 마탑에 다녀오셨다던 소문이 사실인가요?”

    “그건 사실이지만…….”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진짜 눈 색을 어떻게 알았냐고?

    나도 이 현상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마탑에 다녀왔다는 건 헛소문이 아니었지만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었다.

    차라리 행동으로 보여주자 싶어 그에게 성큼 다가가 팔뚝을 잡았다.

    “그냥 이러니까 풀리던데요?”

    “맞네, 빨간색.”

    아무도 없던 복도의 코너에서 뜬금없이 카눌레가 튀어나왔다. 옆에는 뭐 씹은 표정의 에클레어도 함께였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카눌레가 크렘에게 다가가 돈이라도 빼앗을 듯 으름장을 놓았다.

    “근데 너 방금 뭐랬냐? 빨간 눈이 뭐? 악마? 너 진짜 악마가 뭐 하는지 보고 싶냐?”

    “…….”

    고운 말만 쓰라고 방금 경고했던 것 같은데.

    나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치켜들 것 같은 카눌레를 빤히 쳐다보았다.

    카눌레가 내 시선을 느끼고 뒤늦게 아차 한 기색으로 고쳐 말했다.

    “물론 나는, 아니 저는 악마가 아니지만요. 그래도 입은 함부로 놀리지 말… 크흠. 입조심해 주세요.”

    그래, 애썼다.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노력이 가상하니 봐주자.

    하지만 크렘은 이런 서투른 위협에도 전혀 내성이 없는 듯했다. 그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 얘기는 저희 영지를 포함한 북부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같은 거예요. 저도 어째서 레이디의…….”

    “레이디?”

    카눌레가 괴상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나도 내 나이에 레이디 소리 듣기가 민망해서 고개를 돌려 못 들은 척했다.

    그러자 우리 눈치를 본 크렘이 하던 말을 멈추고 짧게 물었다.

    “…크레페 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카눌레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렘이 말을 이었다.

    “크흠, 저도 어째서 크레페 님의 손길이 닿을 때에만 마법이 풀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역시 모르는구나.

    그러고 보면 마법에 대해선 내게도 수수께끼가 많았다.

    오른쪽 손목의 문양이 왜 아직 남아 있는지, 마법사들의 마법진이나 아펠의 투명화 마법도 꿰뚫어보면서 정작 왜 나는 마법을 하나도 못 쓰는지, 그 이유 같은 것들 말이다.

    새삼 아쉬워서 괜히 입맛을 다셨다.

    그동안 크렘은 이곳에 있는 에클레어와 카눌레에게도 자신의 눈 색에 대해 비밀로 해달라며 연신 당부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은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감사합니다. 설마 크레페 님께 벌써 약혼자가 있을 줄은 몰라서 실례를 저질렀네요.”

    약혼자?

    낯설기 그지없는 세 글자에 나는 문득 옆을 쳐다보았다. 카눌레도 날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친남매야!”

    “친남매거든!”

    카눌레와 내가 동시에 외쳤다. 당황한 크렘이 말을 더듬었다.

    “에, 예? 그, 그렇습니까?”

    아, 비밀로 하자고 했는데.

    나는 뒤늦게 말실수를 깨닫고 카눌레를 돌아보았다. 그도 실수했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곧 카눌레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약혼자 소리 들을 바엔 이게 낫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 마나 없는 마법사 】

    그 이후 크렘은 더 이상 내게 접근하지 않았다.

    이해는 갔다. 나와 손이든 어디든 닿기만 하면 마법 효과가 풀리는데, 당연히 가까이 오기도 싫겠지.

    덧붙이자면 에클레어가 날 대하는 태도도 변한 게 없었다.

    그나마 그녀가 날 아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 거다.

    “야, 이거.”

    에클레어가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내게 펜 한 자루를 내밀었다.

    “아, 고마워.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덜렁대긴.”

    여전히 톡 쏘는 말투로 에클레어가 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했다.

    봐, 또 날 챙겨줬잖아.

    나는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기분이었다. 역시 에클레어가 날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바로 저번에 있었던 일만 봐도 그랬다. 지난번 내가 크렘을 따라 복도로 나갔을 때.

    카눌레가 말하길, 내가 경계심 없이 크렘을 따라 졸래졸래 교실을 나가자 에클레어가 날 걱정한 듯 몰래 내 뒤를 밟았다고 했다.

    에클레어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교실을 나갔다는 것도 몰랐을 거라고.

    암만 생각해도 내가 오빠를 헛키웠구나.

    아무튼, 나는 에클레어가 내게 가진 감정이 호감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녀가 날 걱정해 줬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으나, 표독스러운 말만 안 할 뿐 언짢아하는 듯한 눈빛이나 톡톡거리는 태도는 그대로였으니까.

    나는 괜히 그녀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았다.

    “뭐 봐?”

    “…….”

    “공부 어렵지?”

    “…….”

    “비둘기 모이 내가 줘봐도 돼?”

    “비둘기 아니라고!”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에클레어가 펜을 놓고 큰 소리를 냈다.

    나는 놀라지도 않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알아. 근데 이래야 언니가 들은 척이라도 하잖아.”

    담담히 대답하자 에클레어가 날 빤히 보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것을 못 들은 척 내 책상에 올려놓은 유리병을 열고 에클레어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

    엄마가 줬던 알사탕을 넣어둔 병이었다.

    에클레어도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사탕을 먹는 대신 내 손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엄마는…….”

    잠시 말을 고르듯 조용하던 에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바니유 공작님이랑 재혼했어. 젤라토 오빠는 공작님의 아들이었고, 나랑 엄마는 굴러들어 온 돌이었지.”

    어쩐지 에클레어는 젤라토와 닮은 곳이 거의 없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쳤다.

    에클레어가 말을 이었다.

    “근데 얼마 안 지나서 엄마가 돌아가셨어. 하지만 아빠랑 오빠는 너무 착해서 나한테 눈치도 안 주고, 재혼 생각도 없다고 하고…….”

    나는 문득 젤라토를 떠올렸다.

    저보다 훨씬 덩치 있는 크바스에게도, 성적으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 갈레트에게도 그는 큰형 같은 이미지였다. 물론 나한테도 꽤나 믿음직스러워 보였고.

    어찌 보면 에클레어가 젤라토에게 껌뻑 죽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근데 오빠가 학교에 들어오면서 갈레트 얘기를 엄청 하더라. 배알도 없지, 자기보다 두세 살은 어린 애가 대단하니 뭐니. 그러잖아도 크바스인지 뭔지 그놈 뒤처리하러 붙어 다니는 것도 눈꼴사나운데.”

    그건 나랑 좀 말이 통하겠군.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에클레어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학교에 들어온 거야. 갈레트인지 디저트인지, 그런 꼬마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려주려고.”

    에클레어가 말을 맺고 결연한 눈빛을 비쳤다.

    하지만 나는 갈레트가 ‘그런 꼬마애 정도는’이라고 표현될 수 없는 천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빠는 학교 그만뒀잖아.”

    “그래! 그래서 내가 널 이기려고 했는데!”

    갑자기 에클레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란 나는 하마터면 알사탕이 든 병을 놓칠 뻔했다.

    에클레어가 잠시 침묵하다가 도로 의자에 앉았다.

    “넌 마탑에 다녀온 천재라며. 내가 널 어떻게 이겨. 진짜 쉬제트 인간들…….”

    …이거 내가 사과해야 하나? 똑똑해서 미안하다고?

    나는 얼떨떨하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한마디 했다.

    “그럼 카눌레 오빠를 이겨보는 건 어때?”

    “…….”

    에클레어가 한숨을 내쉬다 말고 날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내 제안이 그럴듯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그녀가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어떤 앤데?”

    으음, 미끼를 이렇게 덥석 물 줄은 몰랐는데.

    * * *

    “마나를 다루는 방법은 마탑에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본 강의에선 마법학, 즉 이론만 배우니 참고하세요.”

    마법학 선생님이 짧은 설명을 끝내고 판서를 시작했다.

    넓은 칠판에 마나의 기본 원칙과 마법진의 정의, 가설들이 빽빽이 채워지고 있었다.

    마법학은 우리 신입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과목 중 하나였다.

    심지어 마법진이면 껌뻑 죽는 카눌레도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물론 카눌레는 원래부터 마법진을 구경하는 것만 좋아했고 마법 공부는 싫어했지만.

    “좋아, 지금이 앞서갈 기회야!”

    에클레어도 카눌레가 졸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꽉 주먹을 말아쥐었다.

    나는 그녀가 열의를 불태우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사람들이 이 맛에 소개팅 주선을 해주는 건가? 괜히 뿌듯하네.

    물론 그런 달콤한 감정과는 몇 광년 떨어진 상황이겠지만.

    “여긴 이렇게야.”

    내가 슬쩍 손을 끼워 넣고 에클레어의 필기를 고쳐주었다.

    선생님이 판서를 마치고 돌아서서 날 쳐다보았다. 내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크레페 님? 마탑에서 공부하고 오셨다고 했죠? 이 부분을 설명해 보시겠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크렘도 얘기했듯 내가 마탑에 다녀왔다는 사실은 반쯤 헛소문으로 치부되고 있던 듯했다.

    민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찬찬히 정리했다.

    “우리가 마나를 못 느끼는 이유에 대해 연구한 글입니다. 하나는 훈련이 부족할 뿐 연습만 하면 누구나 마나를 느낄 수 있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 글은 선천적인 재능 유무의 차이라는 내용, 마지막 하나는 신체적으로 마나를 품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나는 말을 하다 멈췄다. 그리고 눈썹을 찡긋거렸다.

    뭔가…….

    “네, 맞습니다. 앉으셔도 됩니다.”

    선생님이 손짓했다. 하지만 나는 가는눈을 뜨고 칠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신체적으로 마나를 품을 수 없는 사람?

    “크레페 님?”

    “아아앗!”

    나는 별안간 탄성을 내지르며 교실을 박차고 나왔다.

    “뭐, 뭐야?”

    교실 문 너머에서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카눌레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내가 왜 잊고 있었을까? 브라우니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나가 모두 날 빗겨 나가던 그 감각을!

    나는 수업도 땡땡이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업 중인 시간이라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체적으로 마나를 품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방금 전에 수업에서 나온 이야기는 나도 일찍이 알고 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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