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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56)화 (56/181)
  • 56화 

    전에도 한 번 생각한 적 있었지만, 이 학교는 대학 캠퍼스처럼 넓었다.

    주로 쓰이는 건물만 해도 본관, 1관, 2관에 별관은 두 개, 연무장이 세 개에 운동장은 따로, 실내 강당, 야외 강당, 마구간에 보건실 건물까지 별개였다.

    “가, 같이 가아…….”

    나는 에클레어를 따라잡지 못하고 헥헥거렸다.

    앞서 달리던 에클레어가 날 돌아보더니 쯧, 혀를 차고 내 앞에 섰다.

    기다려주려는 거구나,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자마자 에클레어가 갑자기 팔을 불쑥 내밀어 나를 짐짝처럼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고 다시 교실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어리다고는 해도 이건 정말…….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속으로 한마디 중얼거렸다.

    언니, 멋져.

    원래 기숙사에선 매일 정해진 기상 시간에 확성 마법으로 방송을 해주는데, 나나 에클레어는 둘 다 푹 잠이 든 탓에 그것도 못 들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에클레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지각이 없던 일이 되진 않았다.

    교실에서 다음 수업을 준비하던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첫 수업은 이미 끝났다고 했다.

    첫날이라 가볍게 오리엔테이션만 했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결석 기록을 남기긴 싫어서 우리는 같이 선생님을 찾아갔다.

    다행히 그녀는 우리를 혼내지 않았다. 대신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들어온 지 며칠 만에 둘 다 향수병이 걸린 모양이군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민망한 기분으로 부은 눈을 비비적거렸다. 선생님이 못 본 척 에클레어에게 말했다.

    “두 분이 수석, 차석이에요. 서로 힘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수석인데요?”

    갑자기 에클레어가 눈을 빛냈다.

    선생님이 순간 당황한 듯 멈칫했다가 내 눈치를 봤다.

    “크레페 님이 수석입니다만…….”

    “…….”

    에클레어의 어깨가 눈에 띌 만큼 축 늘어졌다. 선생님이 그녀를 토닥였다.

    “에클레어 님도 대단하세요. 하지만 크레페 님은 일찍이 마탑에 들어가셨을 정도라…….”

    괜히 옆에 있던 나만 찔리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에클레어는 부은 눈으로 날 잠깐 노려보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교직원실을 나갔다.

    “언니?”

    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에클레어는 끝까지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 척 교실로 돌아갔다.

    남은 수업도 있으니 이따 기숙사에서 다시 말을 걸어볼까…….

    나는 쭈뼛거리며 그녀를 따라 교실로 향했다.

    보통 소설 같은 데서는 같이 펑펑 울고 나면 훨씬 친해지던데. 역시 소설은 소설일 뿐인가.

    살짝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교실 문을 열었다.

    에클레어는 일찌감치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날 아는 척하는 낌새도 없었다.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문을 막고 서 있던 시간이 길었는지 복도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쟤가?”

    “그래!”

    뒤를 돌아보자 그들이 합, 입을 다물고 가던 길을 갔다. 입학시험을 보러 온 날부터 기숙사에 들어온 날, 첫 수업 날에 이르기까지 나를 둘러싼 수군거림은 끝날 낌새가 안 보였다.

    이게 천재의 숙명이겠지.

    이미 해탈한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척 교실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에클레어와 카눌레의 옆자리는 둘 다 비어 있었다.

    누구 옆에 앉아야 욕을 덜 먹을까.

    조금 슬픈 고민을 하던 찰나였다. 구름처럼 복슬복슬한 머리를 한 소년이 불쑥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레이디.”

    레이디?

    그는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태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크림색 머리카락에 느끼한 언행을 보니 그제야 입학시험 때의 일이 기억났다.

    얘도 합격했구나.

    초면에 다이어트 어쩌고 했던 말이 떠올라 썩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 남자아이는 내 생각과 상관없이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그가 가슴에 올렸던 손을 내리며 눈을 떴다. 갈색 눈이었다.

    어라? 저번에는 빨간 눈이지 않았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입학시험 때 부딪치고 상대방을 보며 카눌레와 똑같은 빨간색 눈이라고 생각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햇빛 때문인가 싶어 슬쩍슬쩍 발을 옮겨 각도를 바꿔보았지만 이리 봐도 저리 봐도 갈색이었다.

    크림색 머리에 갈색 눈이라면, 혹시 내가 찾는 사람일지도? 아냐, 처음 봤을 땐 분명 빨간색 눈이었다구.

    나는 가는눈을 뜨고 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레… 레이디?”

    귀신에 홀린 사람이라도 보듯 상대가 말을 더듬었다.

    나는 뒤늦게 내 태도가 어떻게 보였을지 깨닫고 민망해져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려 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레이디 대접에 오글거려 할 틈도 없이, 나는 그의 눈색이 바뀌는 것을 목격하고 문득 중얼거렸다.

    “아, 빨간 눈.”

    그러자 갑자기 그가 내 손을 놓고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예, 예?”

    그의 눈이 도로 갈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눈이 다시 빨간색이 됐다.

    “이게 뭐야? 마법 썼어요?”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수업 시작합니다! 크레페 님, 크렘 님, 자리에 앉아주세요.”

    그 순간 선생님이 들어왔다. 산만해져 있던 교실 분위기가 한순간에 정리됐다.

    나는 아직 얼떨떨한 기분으로 근처 빈자리에 앉았다. 카눌레의 옆자리였다.

    “왜 여기… 하아.”

    그가 한숨을 삼키고 슬쩍 옆으로 비켰다. 나는 발끈해서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내가 학교에 들어와서 꼭 꼬셔내야겠다고 결심한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익히 말했듯 바니유 공작가의 에클레어였고, 다른 한 명은 크림색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크렘이었다.

    풀 네임 크렘 브륄레 커스터드.

    맛있겠다.

    …가 아니라, 크렘은 이름에서도 나오다시피 커스터드 귀족 학교가 세워진 이곳의 영주, 즉 커스터드 자작가의 아들이었다.

    에클레어도 그렇고 크렘도 그렇고, 내가 아는 건 그들이 커스터드 귀족 학교 출신이라는 것뿐이었는데 다들 한 반에서 만나게 되니 느낌이 묘했다.

    하지만 크렘이 빨간 눈이라는 정보는 없었는데.

    선생님이 저 남자애를 크렘이라고 부른 걸 보면 쟤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공책에 크렘과 에클레어에 대한 정보들을 낙서하기 시작했다. 들키지 않게 한글로.

    문득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날 쳐다보던 크렘이 움찔하고 수업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역시 마법 물품 같은 걸로 눈 색을 숨기고 있다는 가설이 제일 그럴싸했다.

    근데 왜?

    왜 내 손이 닿으면 그 마법이 풀리는 거지? 왜 눈 색을 굳이 감추려는 거고?

    나는 ‘왜’라고 쓴 글자에 여러 번 동그라미를 치며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옆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짝꿍이 된 카눌레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에겐 내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짓하는 걸로만 보일 테니까.

    “너, 나 아는 척하지 마라.”

    그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을 보자 선생님은 학생들을 등지고 칠판에 글을 쓰고 있었다.

    나도 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그러기엔 이미 늦은 거 아냐?”

    “알려질 땐 알려져도 티 내지 말라고. 형이 열 살에 입학했을 때도 시끄러웠는데, 이제 한술 더 떠서 여덟 살에 입학이라니. 둘은 어떨지 몰라도 난 부담스럽단 말이야.”

    카눌레의 입술이 병아리 부리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설마 이걸로 비뚤어지려는 건 아니지, 오빠?

    나는 꺼내지 못할 말을 삼키고 이때다 싶어 조건을 내걸었다.

    “대신 덩치한테 물들지 마.”

    “뭐?”

    “바른 생활에 고운 말만 쓰라구.”

    “너 인마, 날 진짜 어린애로 알고…….”

    “크흠.”

    카눌레의 목소리가 조금 커지자 선생님이 나무라는 말 대신 헛기침을 했다.

    카눌레가 아무 일 없던 척 스윽 고개를 숙였다.

    봐봐, 룸메이트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인마라니!

    나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눈에 빡 힘을 줬다. 카눌레가 질린 표정을 짓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약속한 거다.’

    이겼다.

    나는 결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으실까요, 레이디?”

    수업이 끝나자마자 크렘이 날 조용히 불러냈다. 아마 눈 얘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좋다고 쫄래쫄래 따라가기에는 아직 크렘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 남아 있었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크렘 브륄레 커스터드는 그리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크레페의 미모에 반해 옆자리를 맴돌다가 아펠의 권력에 깨갱 하고 도망치는 서브 남주… 아니, 대사 있는 엑스트라에 가까웠다.

    거기에서도 사교계의 귀공자라거나 알아주는 카사노바라거나 하는 부연 설명이 있긴 했지만, 아무튼 그리 좋은 인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

    게다가 사실 바람둥이 캐릭터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크렘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내 인상은 그냥 양아치였다.

    으음, 이렇게 말하니까 어린애한테 좀 미안하네.

    물론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 할 처지였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하진 못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슬쩍 카눌레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귀족과 대화를 나누느라 이쪽은 신경도 못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웬만하면 모르는 척하자고 방금 약속했으니 대놓고 부르기도 좀…….

    “에휴, 갑시다.”

    결국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크렘에게 나가자고 손짓했다.

    1학년 교실이 있는 2층의 복도를 따라 제일 구석, 코너를 돌아 멈춘 크렘이 주변의 인기척을 살폈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이러다가 쉬는 시간이 끝날 것 같아서 나는 먼저 그에게 물었다.

    “크렘 브륄레 커스터드 님 맞으시죠?”

    “네, 네. 맞습니다.”

    크렘이 대번에 긍정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두 번째 질문을 했다.

    “눈 색이 빨간색인 걸 숨겨야 하나요?”

    “…….”

    크렘은 대답 대신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그의 갈색 눈에 물감이 번지듯 빨간색이 들었다.

    크림색 머리카락에 빨간 눈은 꼭 버터 생크림에 라즈베리 소스를 뿌린 것처럼 맛있어 보였…….

    크흠, 저택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단것 금단 증상이 나오려 하네.

    나는 민망해져 헛기침을 했다.

    내 생각을 알아볼 재간이 없는 크렘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영지 내에서 빨간색 눈은 그리 인식이 좋지 못합니다. 악마의 눈이라느니 해서요. 영지민들 사이에 안 좋은 소문이라도 돌까 봐 부모님이 반지를 맞춰주셨어요.”

    그러고는 크렘이 도로 반지를 손에 끼웠다. 눈이 다시 갈색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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