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그건 전부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카눌레는 연무장에 있었으니까.
연무장은 언덕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언덕 윗길을 지나던 내게는 아래의 상황이 훤히 보였다.
카눌레는 연무장에서 옷깃을 가다듬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덩치도 함께 있었다.
반사적으로 그들이 대결했던 게 떠올랐다.
순간 눈을 의심하던 나는 카눌레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언덕을 구르듯 달려 내려갔다.
“으앗! 뭐, 뭐야, 이 어린애는?”
“쟤 걔잖아, 최연소 합격이라는.”
작은 소란은 내가 교내 어디를 가도 함께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오빠!”
카눌레가 내 목소리를 듣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뽕 하고 빠져나와 다급히 카눌레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또 싸우는 거야? 저 덩치가…….”
“크바스라고.”
크바스가 짝다리를 짚고 끼어들었다.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카눌레에게 말을 이었다.
“저게 또 시비 걸었어?”
“참 나. 그냥 대련한 거야.”
카눌레가 코웃음을 쳤다. 걱정하는 마음도 모르고 참으로 야속한 대응이었지만 그나마 예상이 빗나가 다행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은땀이 난 이마를 소매로 닦았다.
“그럼 위험한 거 아니지?”
“벌써 끝났어.”
“도토리는 모를 세계가 있단다.”
크바스가 자랑하듯 끼어들었다. 내가 그쪽을 노려보자 크바스는 뻔뻔하게 ‘왜. 뭐.’ 같은 소리만 했다.
그래, 위험한 것만 아니라면야…….
썩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뒤로 물러났다. 카눌레가 옷을 털어 내 손자국을 폈다.
내 뒤에 관객처럼 서 있던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말이 들렸다.
“그게 대련이었어? 결투인 줄 알았는데.”
“그러게. 그렇게 아찔한 대련은 생전 처음 봤어.”
역시 안 되겠어!
나는 단숨에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카눌레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역시 싫어! 나 없을 때 저거랑 얘기하지 마아!”
“애 취급 좀 하지 말라고오오!”
카눌레가 내 무게로 휘청휘청했다.
그때 크바스가 끼어들어서 날 번쩍 들어 올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얘랑 나 룸메거든?”
“거짓말! 오빠는 신입생인데 어떻게 재학생이랑 룸메가 돼요!”
“내 룸메였던 갈레트가 나갔으니까 그렇지.”
에?
나는 토끼 눈을 뜨고 카눌레를 쳐다보았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던 카눌레가 곧 내 시선을 느끼고 날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불만 있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어쩐지, 갈레트 오빠 입이 험해졌다 했더니 덩치가 룸메이트라 그랬던 거구나!
이대로 있다간 카눌레마저 안 좋은 물이 들 게 분명했다.
나는 사지를 바동거려 크바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젤라토에게 이 사태를 고자질하러 달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기숙사 방을 바꾸는 건 자기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젤라토의 말을 듣고 나는 좌절하게 된다.
한숨을 참을 수 없는 하루였지만 실의에 빠져 잠이나 청할 때는 아니었다. 내일이 첫 수업 날이기 때문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미뤄두었던 짐 정리에 착수했다. 내가 들고 온 가방 외에도 에이미가 사람을 시켜 기숙사로 보내준 옷가지가 가방 두 개는 더 나왔다.
“게으르긴. 그런 건 미리 해야지.”
에클레어가 얄밉게 콧방귀를 뀌고 제 침대에 누웠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시끄러울 텐데 미안. 잘 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어차피 살가운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가방을 열고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탑에서 들고 나온 가방을 열었을 때, 나는 손을 멈췄다.
여기 있었구나.
“할 거면 빨리 하고 자지, 왜…….”
에클레어가 짜증을 부리며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멈췄다.
“가, 갑자기 왜 울고 그래?”
왜 울고 그러냐고?
나는 도로 고개를 내렸다. 풀어헤친 작은 주머니 속, 색색의 사탕 위로 투명한 눈물이 떨어졌다.
“야…….”
에클레어가 당황한 듯 이불을 걷고 앉았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이 축축해졌다. 입술이 떨려서 이를 악물었다.
엄마의 장례식 때, 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울지 않았다. 내겐 아직 지켜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으니까. 힘들다고 투정 부릴 여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끝까지 엄마에게 한마디 사과도 못 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지키지 못했어.”
“뭐?”
“내가 엄마를 지켰어야 했는데.”
시야가 흐렸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에클레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가 돌아가셨어?”
“우윽…….”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사탕 주머니를 꽉 쥐었다. 이것은 엄마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때 들었던 엄마의 목소리도 생생히 되풀이됐다.
‘우리 딸, 엄마 믿지?’
힘들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지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네가 뭐라고 엄마를 지켜? 너 바보야?”
손이 덜덜 떨렸다. 에클레어의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어서 눈을 꽉 감아버렸다.
“넌 몰라!”
“모르긴 왜 몰라! 우리 엄마도……!”
그녀의 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맺힌 속눈썹을 조심히 떴다. 에클레어의 눈빛은 여전히 사나웠지만, 그녀의 표정은 울음을 참으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우리 엄마도… 돌아가셨단 말이야.”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에클레어가 매섭게 내 옷자락을 쥐고 덩달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에클레어의 침대에서 잠들었다. 마지막 남은 소원으로 엄마를 살릴 수 있기를 빌며.
* * *
꿈인가? 현실인가?
눈을 뜨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통 하얀 방에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한 서고. 디몬을 만났던 그 장소에 내가 서 있었다.
아니, 꿈이면 어때? 전능한 신이라면 내 꿈 하나 모를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인생 서고 한가운데에 대자로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디몬 님, 마지막 소원 쓸게요! 엄마! 엄마 살려주세요! 아니면 다시 시간을 돌려줘요. 내가 엄마를 지킬 수 있게!”
대답을 대신하듯, 책장 너머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그 소리를 따라 달음박질했다. 코너를 돌자 검은색 제복 바지가 보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츠부터 시작해 깔끔하게 잠근 단추, 금줄을 엮어 만든 매듭 장식, 어두운 단풍색의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헤어스타일에 단아한 생김새의 이목구비까지.
분명 엄마였다.
“어, 엄마?”
그래,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했잖아! 디몬 님이 살려주신 거야!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안기려 달려갔다. 그러나 엄마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 채 들고, 뭉툭한 끄트머리로 내 어깨를 눌러 더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그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엄마가 아니구나.
“엄마를 정말 좋아했나 보구나.”
엄마의 얼굴, 엄마의 목소리로 디몬이 말했다. 낯설고, 한편으론 꺼림칙한 광경이었다.
내가 제일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했던가.
나는 그녀를 안으려던 두 팔을 내리고 한탄하듯 말했다.
“이런 식으로 희망 고문할 필요 없잖아요.”
“고의는 아니었어.”
디몬이 담담하게 말하며 팔을 저었다. 아무것도 없던 타일 바닥에서 흰 테이블과 의자가 쑥 올라왔다.
그녀가 거기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내게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난 그녀와 다정히 담소나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꺼냈다.
“소원 들어주세요. 엄마를 살려줄 수 있어요?”
“안 돼. 네가 첫 번째 소원으로 말했잖아. 내가 운명에 개입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
정말 엄마가 살아 있다면 그런 대답이 돌아올 리도 없었다.
결국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만 재확인한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예상한 대답이었지만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담담하려고 애쓰며 질문을 바꿨다.
“그럼 왜 왔어요?”
“네가 부르길래.”
울다 지쳐 잠깐 디몬을 떠올렸을 뿐인데 그걸 듣고 있었다니.
민망한 기분 반, 놀림당한 기분 반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소원이 생긴 건가 했더니만.”
디몬이 얄밉게 말했다.
“놀리지 마요. 어차피 안 된다고 할 거면 부르질 말던가.”
“좋아, 앞으론 안 부를게.”
“…….”
엄마 얼굴만 아니었어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
신성 모독과 패드립 사이 어딘가에 있는 생각이 한순간 뇌리를 스쳤다.
흥미롭게 내 반응을 관찰하던 디몬이 피식 웃었다.
“그래, 조금 더 기다리지 뭐. 나도 앞으로의 일에 기대가 크거든.”
“네?”
그건 어쩐지 불길한 말이었다. 디몬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이제 눈뜰 시간이야.”
최면에서 깨어나듯 잠에서 깼다. 꿈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생생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긴 하지만.
바로 앞에는 에클레어의 얼굴이 보였다. 나처럼 그녀도 울다 지쳐 그대로 잠든 것 같았다. 매섭고 표독스러웠던 눈이 퉁퉁 부어 있는 게 조금 우스웠다.
물론 내가 그녀를 비웃을 처지는 아니겠지.
나는 뻑뻑하게 부어오른 눈을 여러 번 깜빡이고 에클레어를 흔들어 깨웠다.
“언니, 일어나아.”
“누가 언니야…….”
비몽사몽 중에도 태클을 걸며 에클레어가 눈을 떴다. 팅팅 부은 눈이 한결 더 가관이었다.
에클레어가 멍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너 눈 개못생겼어.”
누가 할 말을.
화가 나기보다 기가 막혔다.
나는 픽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짓고 아직 널려 있는 옷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아, 어제 짐 정리 다 못 하고 잤구나.
…근데 뭔가 잊은 것 같은 기분이.
“하암.”
에클레어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본래 이때쯤이면 기숙사 주변을 돌아다니는 학생이 많아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 적막에 위화감이 들었다.
우리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문득 몇 초간 시선을 교환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크게 떴다.
“수업!”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