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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54)화 (54/181)
  • 54화 

    나는 뒷말을 삼키고 카눌레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자 카눌레는 내가 하려던 말을 눈치챈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갈레트가 한 걸음 다가오며 끼어들었다.

    “그럼 너도 기숙사 가는 거야?”

    “…아니. 기숙사는 떨어졌어.”

    “그게 떨어지기도 해?”

    갈레트가 순수한 얼굴로 카눌레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남겼다.

    기숙사는 거리와 성적을 모두 고려해 학생을 골라 받게 되어 있었다. 같은 곳에 사는 나나 갈레트는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카눌레만 떨어진 게 다른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합격도 아슬아슬한 성적이었나 보구나.

    물론 열한 살이면 충분히 빠른 입학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긴 했다. 나는 그만하라는 의미로 갈레트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갈레트가 아차 한 듯 덧붙였다.

    “아, 아니… 그래도 저택이 완전히 빌 일은 없어서 다행이구나 싶었어.”

    에이미랑 똑같은 생각을…….

    단순한 변명 같진 않았다.

    나는 길게 위로하는 대신 팔을 들어 갈레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갈레트가 싱긋 웃으며 날 마주 안아주었다.

    여느 때와 같았다. 카눌레도 익숙한 듯 혀를 차고 연무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나는 손을 뻗어 카눌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뭐야?”

    “오빠도 한 번 안아보자. 또 언제 모일 줄 알고.”

    “…….”

    코웃음이나 치고 내 손을 뿌리칠 줄 알았는데, 카눌레는 순간 갈등하는 듯 내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장소가 장소라서인지 조금 누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갈레트가 먼저 날 놓고 뒤로 물러났다.

    “나는 됐어! 난 크레페만 안으면 되거든.”

    “뭣, 나, 나도 형 필요 없거든?”

    “거짓말. 삐쳤지?”

    갈레트가 평소보다 장난스럽게 카눌레를 놀렸다.

    카눌레가 얼굴이 빨개져서 갈레트에게 덤벼들었다.

    “크레페, 도와줘!”

    갈레트가 하하 웃으며 도망쳤다.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건 카눌레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못 살아.

    나는 피식거리며 무덤 옆에 주저앉았다. 내 앉은 키만 한 비석에 어깨를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자 어딘가에서 봄의 햇빛 냄새가 풍겨오는 듯했다.

    언제나와 같은, 좋은 날씨였다.

    【 마탑 출신 신입생 】

    내가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는 날, 에이미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말은 안 했다. 단지 한마디 중얼거린 것이 카눌레를 날뛰게 했다.

    “작은 도련님은 기숙사 못 들어가실 줄 알았는데…….”

    나는 에이미의 심정을 알고 난감하게 웃었지만, 아직 어린애인 카눌레가 그 마음을 이해하긴 힘들 것이다.

    다행히 카눌레의 마음은 금방 풀렸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그를 달래느라 기운 쓸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치, 내가 떨어졌을 리가 없잖아. 형이랑 네가 둘 다 숙사 생활을 했는데.”

    카눌레가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혼잣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오빠가 짱이라며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실상은 남자 기숙사에 결원이 생겨 운 좋게 추첨에 뽑힌 것뿐이겠지만.

    기숙사는 2인 1실로, 당연히 여자 기숙사와 남자 기숙사는 분리되어 있었다. 나는 당분간 보지 못할 마르크와 웃는 얼굴로 헤어지고 내 짐을 챙겨 기숙사 건물로 들어갔다.

    101호.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있는 방이 내게 배정된 곳이었다.

    나는 버릇처럼 문고리에 손을 댔다. 그러나 문이 저절로 딸깍 소리를 내며 열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 그래. 여긴 마탑이 아니었지.

    순간 민망해져 헛기침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네.”

    도도한 목소리와 함께 내 룸메이트가 될 사람이 문을 열어주었다. 먹처럼 까만 머리에 녹색 눈동자.

    에클레어였다.

    “악!”

    단말마 같은 비명과 함께 그녀가 문을 도로 닫았다. 나도 못지않게 놀랐지만 반응을 할 시간도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이 문 사이에 꼈다. 에클레어가 힘으로 문을 닫으려고 낑낑거렸다.

    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자, 잠깐만, 언니! 나도 여기 배정받았어. 이것 좀 열어줘!”

    “누가 언니야! 거짓말, 내가 왜 쟤랑……!”

    “언니! 아니, 에클레어! 에클레르! 공녀님!”

    까딱하면 첫날부터 쫓겨날 판이었다.

    나는 물러나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에클레어는 문에 끼인 내 가방을 밀어내고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아니, 이런다고 내가 기숙사에 못 들어갈 리가 없잖아! 나도 학생인데!

    나는 어이없는 기분 반, 다급한 기분 반으로 건물을 나갔다. 그리고 101호의 덧창문을 노크하며 달래듯 말했다.

    “언니, 나 선생님 찾아가서 열어달라고 할 수도 있거든요? 벌점 같은 거 받기 전에 그냥 좋게 넘어가면 안 될까요?”

    “크레페?”

    여자 기숙사라는 금남의 구역에서 웬 남자 목소리가?

    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날 부른 것은 분홍 머리의 소년이었다.

    이름이 분명…….

    “젤라토 오빠?”

    그도 갈레트의 동급생이라고 했으니 여기 학생이긴 하겠지만, 여자 기숙사에는 무슨 일로 왔지?

    “오빠!”

    내심 의아해하던 와중, 내 뒤의 창문이 벌컥 열리며 내 뒤통수를 강타했다.

    “끅!”

    “크레페!”

    예상치 못한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젤라토가 다급히 다가와 내 뒤통수를 살펴보았다. 혹이 난 듯 약간 얼얼하긴 했지만 피가 나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에클레어, 갑자기 창문을 열면 어떡해!”

    젤라토가 날 대신해 에클레어를 혼내주었다.

    “미, 미안.”

    에클레어의 순순한 말투에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나는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들었다. 젤라토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토닥여주는 동안 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아는 사이예요?”

    “동생이야.”

    젤라토가 짧게 대답했다.

    그때 에클레어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창틀을 훌쩍 넘어 나왔다.

    “오빠는 얘를 어떻게 알아?”

    “갈레트 생일 파티에서 봤어. 둘이 룸메이트가 된 거야?”

    젤라토가 곧바로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했다.

    에클레어의 몸이 눈에 띌 만큼 움찔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왜 나랑 같은 방을 쓰냐면서 방방 뛰던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으응…….”

    에클레어가 우물거리자 젤라토가 똑바로 서서 그녀를 나무랐다.

    “그보다 에클레어, 크레페에게 제대로 사과해.”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나이 차 때문인지, 젤라토는 오빠라기보다 그녀의 보호자 같았다.

    나는 그와 에클레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쪽은 순한 인상에 분홍색 머리와 눈, 한쪽은 매서운 인상에 검은 머리와 녹색 눈. 아무리 봐도 닮은 곳이라곤 없었다.

    에클레어는 싫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썹을 움찔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물러나 젤라토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에클레어가 주먹을 그러쥐고 입을 열었다.

    “크, 크레페… 미안해… 잘 지내보자…….”

    에클레어의 주먹은 목소리만큼 떨리고 있었다.

    전혀 진심으로 안 들리는데.

    하지만 젤라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생긋 웃고 내 짐 가방을 들어주었다.

    “잘했어. 이건 내가 들어줄게.”

    그러고서 그가 기숙사 건물로 앞장섰다.

    나는 그를 따라가는 대신 허리를 구부리고 에클레어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쏘아보았다.

    “오빠를 끌어들이다니 반칙이야!”

    그러고는 발을 쿵쿵 구르며 건물로 들어갔다.

    나는 먼발치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금 늦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무슨 일 있으면 둘 다 언제든 찾아와!”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젤라토는 짐만 옮겨다 주고 손을 털었다. 동생이 처음 기숙사에 오는 날이라 얼굴만 보러 들른 거라고 했다.

    “네, 안녕히 가세요.”

    나는 방긋 웃으며 인사하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에클레어는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지만, 이제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언니는 짐 정리 벌써 끝났어? 나만 하면 되겠구나.”

    “…….”

    “저쪽 침대랑 책상 쓰는 거지? 그럼 난 이쪽 쓴다?”

    “…….”

    “저 새장에 있는 비둘기는 뭐야? 애완용?”

    “비둘기 아니거든! 매야, 매!”

    시종일관 부루퉁해 있던 에클레어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흰색과 연갈색이 섞인 화려한 깃을 가진 새가 놀란 듯 날개를 몇 번 퍼덕거렸다.

    “아무튼 너, 내 쪽으로 넘어오면 가만 안 둬. 코 골지도 말고, 혼잣말도 하지 말고, 숨소리도 내지 마!”

    그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잖아.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굳이 항의하느라 신경전을 벌이고 싶진 않았다. 대신 뒤통수를 감싸고 신음하며 말했다.

    “으윽, 아까 다친 데가 너무 아프다. 젤라토 오빠한테 가해자랑 한 방 못 쓰겠다고 할까 봐.”

    “그건……!”

    에클레어가 곧바로 받아치려다가 내 미소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느긋하게 말했다.

    “언니, 잘 지내보자.”

    애기야, 약점을 그렇게 쉽게 드러내면 안 된단다.

    …라고 호방한 생각을 한 지 3일째. 나는 에클레어에게 그런 태도를 취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

    에클레어가 나보다 언니라고 해봤자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의 나이였다. 갈레트나 카눌레를 달래며 살아온 내게 에클레어를 다루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에클레어를 이겨먹는 게 아니라 내 편으로 만드는 거란 말이지.

    솔직히 털어놓자면, 그건 그리 잘 되어가고 있지 않았다. 에클레어가 나랑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숙사에 들어온 지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에클…….”

    달칵.

    에클레어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새장에서 매를 꺼내 외출했다. 이래서야 룸메이트의 의미도 없는 것 아닐까.

    나는 멋쩍게 손을 내리고 아직 덜 푼 짐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에휴, 할 일도 많은데.”

    그러고 보면 전생에도 나는 친구가 없었다. 지금까진 싹싹한 어린애로 위장해 예쁨받고 컸는데, 에클레어한텐 그게 먹히질 않으니, 원.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잠깐 산책이나 하다 오기로 결심했다. 딱히 짐 정리가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아주 조금은 그런 맘도 있었지만.

    본관을 기준으로 북동쪽에 있는 건물이 여자 기숙사, 북서쪽에 있는 건물이 남자 기숙사였다. 그 사이에는 제3연무장과 별관이 있었다.

    나는 카눌레가 있는 남자 기숙사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삼 일이 지나도록 코빼기도 안 비추는 카눌레가 괘씸했기 때문이었다.

    걱정되는 사람이 먼저 움직이는 수밖에.

    카눌레의 까칠함에 대해선 이미 반쯤 포기 상태였다. 나는 무작정 기숙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처까지 가면 카눌레를 소리쳐 부르는 게 나을까? 아니면 젤라토나 덩치를 찾아서 카눌레의 방을 물어봐야 하나?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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