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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53)화 (53/181)

53화 

놀라 말을 멈추자 아펠이 가만히 내 이름을 불렀다.

“크레페.”

“응?”

“이거 줄게.”

결혼반지?

자세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런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그의 품에서 나온 건 반지가 아니라 팔찌였다.

나는 스스로 한 생각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뭐, 뭔데?”

민망함을 감추려 괜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건 백금과 순금, 두 겹으로 만들어진 팔찌였다.

가운데 장식에는 균일하게 세공된 보라색 보석이, 늘어뜨려진 줄에는 파랗거나 투명한 색의 작은 보석들이 번갈아 달려 있었다.

보석에 대해 잘 모르는 내 눈에도 고가품으로 보였다.

이런 걸 왜…….

나는 아펠에게 눈으로 물었다. 그가 내 눈빛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대답했다.

“좀 있으면 생일이잖아. 생일 축하해.”

물론 내 이름을 아니 생일 정도야 쉽게 알 수 있었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못 해줬는데.

답을 들은 내가 입을 다물자, 아펠이 내 왼손에 그것을 끼우고 대신 원래 있던 팔찌를 빼냈다.

“볼 때마다 생각했어. 이것보다 예쁜 게 많을 텐데, 하고. 앞으로는 내가 준 거 해줘.”

아펠이 생긋 웃으며 빼낸 팔찌를 내게 내밀었다.

“아니, 그건…….”

그건 평범한 팔찌가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작 그 팔찌를 준 피오르도 결국 ‘아직 안 버렸냐’며 퉁명스러운 말을 하지 않았던가.

나는 피식 웃으며 아펠의 손을 눌러 내렸다.

“그건 버려도 돼. 나 앞으로는 이것만 낄게.”

“그럼 이 팔찌는 내가 가져도 돼?”

갖다 뭐 하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긴 했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펠이 흐뭇해하는 얼굴로 그것을 자신의 왼손에 끼웠다.

“고마워. 선물로 받은 셈 쳐야겠다.”

바로 선 아펠이 팔찌를 낀 왼손을 흔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팔을 잡아 멈췄다. 남에게 받은 걸 선물로 넘긴 기분이라 얼굴이 홧홧해졌다.

“나중에… 제대로 선물 줄게.”

“…응.”

아펠의 얼굴이 덩달아 발그레해졌다.

곧 내 뺨에 보드라운 것이 닿았다. 나는 상황을 곧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멀뚱히 떴다.

“나중에 봐.”

아펠이 후다닥 창틀에 섰다. 그는 얼빠진 나를 뒤로하고 사라졌다.

나는 뒤늦게 그의 입술이 닿았던 내 뺨을 손으로 감쌌다.

“에.”

* * *

괜히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아직도 뺨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봐.’

“헤헤…….”

나는 실없이 웃으며 가방을 들었다.

기약 없이 막연한 약속이었지만 막막한 기분은 없었다.

그래, 이런 낭만 하나 정도는 남겨둬도 괜찮잖아? 풋풋하다, 풋풋해!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곱씹으며 피오르가 있는 연구실에 도착했다.

“준비는 됐나?”

“네엡!”

아까 전과 달리 씩씩하게 대답하자 피오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잠깐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크흠. 갑자기 떠나게 돼서 죄송합니다.”

“됐다. 나도 처음엔 네가 3개월이나 있으면 오래 있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피오르가 책상에 펼쳐져 있던 책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 짐을 대신 들고 앞장섰다. 마주 오는 마법사들과 가볍게 목례를 하며 그가 재차 말을 걸었다.

“갈레트라는 아이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럼요. 오빠한테 잘 좀 해주세요. 저한테처럼 딱딱하게 대했다간 키슈 님한테 뺏기고 후회할걸요?”

“스승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군.”

피오르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말의 내용과 달리 그는 픽 웃고 있었다.

나는 그가 아닌 척 내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내 짐을 들어주는 건 물론이고, 지하가 아닌 지상에 내 방을 마련해 준 것, 강의와 연구로 바쁜 와중 날 위해 보충 수업을 해준 것도.

나는 그간 편지 한 통 하지 않았던 게 찔려서 괜히 더 밝은 목소리를 냈다.

“오빠가 제 방을 그대로 쓰는 거랬죠?”

“어린애는 보통 지하를 무서워하니까.”

피오르가 무뚝뚝하게 말하며 마탑을 나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마르크가 자세를 바로 했다.

“선생님.”

“음?”

이별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 나는 피오르를 향해 섰다.

“혹시 마탑 망하면 쉬제트 백작가에서 고용해 드릴게요.”

“…….”

“아얏.”

나름 진지하게 한 말이었지만 피오르는 배은망덕하게도 꿀밤으로 보답했다.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이마를 문질렀다.

“뭐야.”

“네?”

갑자기 그가 내 손을 잡고 들여다보았다. 아펠이 준 팔찌가 생각나 순간 움찔했지만 그건 내 왼팔에 고이 채워져 있었다.

피오르는 나의 오른쪽 손목을 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도 문양이 안 지워졌군. 보통은 몇 달 안에 사라지는데.”

“그래요?”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쩐지 마탑에 문양이 새겨진 사람이 별로 없다 했지.

하지만 별일은 아닌 듯 피오르는 금세 내 팔을 놓아주었다.

“뭐, 아무튼. 너야말로 마음이 바뀌면 마탑에 들어와라. 너라면 환영이니까.”

그러고서 피오르가 내 짐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걸 받아들고 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몸조심하고.”

피오르가 무심하게 답하며 표정을 감추려는 듯 안경을 고쳐 썼다.

나는 학교로 돌아가 카눌레를 마차에 태우고 귀가했다. 그는 자신만 학교에 남겨놓고 갔다며 툴툴거렸으나, 정도가 심하지 않은 걸 보니 시험을 마치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난 후 에이미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네에.”

내 대답이 나온 다음 문이 열렸다. 방문자는 내 예상대로 에이미였다.

갈레트나 카눌레였다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왔을 테니까.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학교 기숙사에 가져갈 짐을 싸고 있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아주었다.

에이미는 널브러진 옷가지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입학시험 결과가 나와서 전해드리러 온 건데… 벌써 짐을 챙기고 계신 걸 보니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하셨나 보네요.”

“헤헤…….”

머쓱하게 웃었다. 문제가 어려워서 백 점 만점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역시 상대 평가에서 꼬꼬마들에게 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에이미가 피식 웃고 내게 얇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합격했다는 글이 적힌 입학 통지서였다.

“축하해요, 아가씨.”

“고마워요!”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환히 웃었다.

에이미가 손을 털고 밝게 말했다.

“그럼 짐 싸는 것 좀 도와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이제 거의 다 했고, 지난번에 마탑에서 가져온 가방 그대로 들고 갈 거라서. 에이미도 바쁘잖아요.”

내 말마따나 그녀는 백작령의 운영 실무를 거의 혼자 책임지고 있었다. 아마 세금 등의 중요한 일들은 몽블랑에게 넘어가고 있겠지만, 전과 비교해 에이미의 업무가 훨씬 많아졌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대신 나는 그녀에게 슬쩍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것보다 오빠는요? 오빠도 합격했대요?”

솔직히 말하자면 내 결과보다 카눌레의 결과가 더 궁금했다.

“기숙사는 떨어지셨대요.”

에이미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입학은 했는데 기숙사는 못 들어갔다는 건가?

합격했다는 소리는 분명 좋은 소식이었지만 에이미의 표정과 저 말이 매치가 안 돼서 순간 혼란스러웠다.

에이미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택이 텅 빌 뻔했는데 다행이죠? 이왕이면 학교도 떨어지셨으면 좋았을 텐데.”

“…….”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에이미가 이런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알리러 갈레트의 방으로 향했다.

파타슈와 키슈가 저택을 나간 후부터 짐을 챙기기 시작한 그는 내가 들어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합격했대?”

아직 한마디도 안 꺼냈는데 갈레트가 먼저 물었다. 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갈레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삐친 것 같기도 하고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그가 다시 물었다.

“카눌레는? 떨어졌다지?”

“아, 아니, 붙었다던데…….”

“쳇.”

카눌레한테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의 방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바닥에 옷가지가 널려 있어서 발을 내딛기가 조금 난감했다.

갈레트가 손을 젓고 바깥을 가리켰다.

“아냐, 산책이나 하자.”

사실 갈레트는 진작 마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키슈에게 내 입학시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 일정을 미룰 수 있겠느냐고 부탁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제 곧 이 저택은 한산해질 것이었다. 나는 기숙사, 갈레트는 마탑에 가고 나면 카눌레 혼자 남을 테니까.

카눌레가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매일 볼 테니 별일 없겠지?

정원에서 온 듯한 연보라색 등꽃 잎이 바람결에 휘날리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온 나와 갈레트는 어디로 갈지 얘기하지도 않고 자연스레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제1기사단의 연무장 뒤쪽, 샛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작은 공터.

엄마의 가묘가 있는 곳이었다.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엄마의 유해는 끝내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가묘라고 해봤자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세워진 낮은 둔덕과 다를 바 없었다.

“오빠?”

나뭇잎 사이로 검은 머리칼이 휘날리는 것이 보여서 문득 입을 열었다.

묘비 앞에 서 있던 카눌레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카눌레가 쯧, 혀를 찼다.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 듯 갈레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출할 준비는 끝났나 보지?”

“가출이라니.”

카눌레는 대답 대신 코웃음을 치고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어깨에 올렸다.

여기는 제2기사단의 연무장과 가까웠다. 아무래도 훈련 중에 잠시 쉬러 나온 모양이었다.

“어, 그 검…….”

내가 한 박자 늦게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엄마가 빼앗아간, 아빠가 선물로 줬던 진검이었다.

카눌레가 내 할 말을 알아채고 먼저 얘기했다.

“아아, 이거 오늘 수리 끝났어. 엄마한테 자랑하러 왔지. 볼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공격 자세를 잡자, 갈레트가 저를 향한 검 끝에 움찔하고 슬쩍 옆 걸음을 쳤다.

곧 검날에서 화염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와아, 멋있다! 오빠랑 잘 어울려!”

내가 호들갑을 섞어 감탄하자 카눌레가 훗, 웃으며 검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에 넣었다.

“뭐, 이제 말릴 사람도 없으니까.”

그러고서 그가 다시 가묘를 향해 몸을 돌리고 섰다. 분위기가 더 가라앉기 전에 갈레트가 화제를 돌렸다.

“둘 다 커스터드 합격한 거 축하해. 들었지?”

카눌레는 잠깐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다행이네, 떨어질 줄 알았는데. 쟤가.”

“나도.”

오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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