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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52)화 (52/181)

52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공략해야 할 인물.

이렇게 말하니까 꼭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지만, 아무튼.

원작에서 그녀와 크레페는 사교계를 양분하는 미인이었다. 그러나 에클레어는 크레페의 미모와 화제성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라이벌인 크레페를 호시탐탐 견제해 왔고, 크레페가 아펠과 약혼을 발표하는 날까지 신데렐라를 괴롭히는 새언니들처럼 슬쩍슬쩍 면박을 주곤 했다.

결국엔 다른 조연과 눈이 맞아서 자연스럽게 퇴장하지만, 원작의 크레페가 아펠과 약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크레페 인생 최대의 장애물이었다.

내가 수난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야 하는 악연.

하지만 그녀가 속해 있는 바니유 공작가는 몽블랑의 후작 위보다 높단 말이지.

손익 계산을 끝낸 나는 시치미를 떼고 활짝 웃었다.

“에클레어 언니! 맞죠?”

“무슨…….”

해맑게 묻자 그녀가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은 원래 자기 좋다는 사람을 막대하기 힘든 법이다.

나는 그녀를 보며 호들갑스럽게 칭찬을 퍼부었다.

“어제 동화책에서 본 등장인물이랑 똑같이 생겨서요! 진짜 그림 같아. 너무 예쁘다!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거든?”

“그럼 에클레어라고 불러도 돼? 너도 시험 보러 온 거야? 우와, 아직 어린 것 같은데. 공부도 엄청 잘하나 보다!”

“…….”

에클레어가 기가 막히다는 듯 말을 멈췄다. 그녀의 등 뒤에서 날 쳐다보고 있는 카눌레의 표정은 무시하도록 하자.

나는 눈을 반짝이며 에클레어의 대답을 기다렸다.

에클레어는 질린 듯한 얼굴로 실소했다.

“하, 너만 하겠니. 그 갈레트의 동생이라면서.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두고 보자고.”

그러고서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려 바로 앉았다.

더 이상 얘기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나도 슬그머니 걸음을 옮겨 빈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난 아직 사교계에 정식으로 진출하기도 전인데,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지?

시험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래봤자 초등학교나 중학교 수준의 문제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할 수 있겠다.

분야는 산수, 수학, 역사, 교양, 마법학 등 상식 전반에 걸쳐 있었고, 문제 수는 300개쯤 되어 보였다.

튀지 않게 80점 정도로 입학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렇게는 힘들 것 같았다.

합격 결과는 상대 평가였으니까.

열 살로 입학한 갈레트가 왜 그렇게 유명해졌는지, 그리고 카눌레가 작년에 왜 낙방했는지, 나는 문제를 풀며 새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정해진 시험 범위 딱히 없음. 객관식, 주관식, 서술형, 논술형이 고루 분포.

만점이라는 게 없는 시험으로, 만 15세 이하의 수험생을 기준으로 톱 50명 내외에서 커트.

언젠가 입학을 준비하던 카눌레가 『어린이를 위한 산수 교실』을 읽고 있는 걸 봐서 완전 방심했다.

분명 첫 문제는 덧셈, 뺄셈이었는데 나는 어느새 마탑에서나 배웠던 마력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이거 진짜 나만 붙고 오빠는 떨어지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지.

방금 전까지는 생각도 못한 불안이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마지막 문제까지 다 풀었다.

나는 감독관에게 답안지를 제출하고 슬쩍 교실을 나갔다.

“빨리 나오셨네요?”

마차 근처에서 기대어 쉬고 있던 마르크가 날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을 기다릴까요? 아니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후쯤 된 듯했다.

문제 수가 많았으니 카눌레가 나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을 것 같아서, 나는 카눌레의 호위기사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마르크에게 대답했다.

“마탑에 먼저 들를게요.”

마법이 아닌 마차로 마탑에 방문하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마탑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마나로 이루어진 얇은 막이 있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통과했다.

마르크가 내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더니 반투명한 막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댔다.

“자, 잠깐만요!”

“네?”

삐잉― 삐잉―

듣기 싫은 날카로운 소리가 마탑에 울려 퍼졌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귀를 꽉 막았다. 마르크가 뒤늦게 손을 뗐지만 경보음은 멈추지 않았다.

곧 피오르가 달려 나왔다.

“…오랜만이구나.”

“네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피오르가 담담히 손을 들어 허공에 마법진을 띄우자 곧 경보음이 멈췄다. 마르크가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피오르는 그쪽에 시선도 안 주고 걸음을 돌렸다.

나는 마르크에게 기다리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젓고 종종걸음으로 피오르의 뒤를 따라갔다.

“네 짐 찾으러 온 거지?”

“네.”

“그래, 커스터드 자작령이 근처니 오늘 올 거라고 생각했다.”

피오르는 키슈나 몽블랑을 통해 이미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나는 사정을 설명할 부담을 덜고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얘기했다.

“갈레트 오빠 얘기도 들었어요? 키슈 님이 칭찬 많이 하시죠?”

“뭐, 그 녀석은 무슨 얘길 하든 호들갑을 떠는 편이니까.”

그가 무심히 대답하며 숙사 건물의 계단 앞에 멈췄다.

“네 오빠가 그 방에 들어갈 거라 짐은 다 챙겨놨는데, 내가 가져다줄까?”

“아뇨, 직접 가져올게요. 그래도 마지막인데.”

“…그래. 올라가자.”

“넵.”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4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아펠한테도 한마디 못하고 떠나게 생겼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방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자 내 방 한가운데에 아펠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나는 멀뚱히 눈을 껌뻑거렸다.

“안 들어가나?”

“예? 아, 아니!”

피오르의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문을 닫았다. 당황한 내 모습에 피오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오히려 나였다.

아펠을 못 봤나? 아펠은 왜 안 숨었지? 혹시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크레페?”

피오르가 의아한 듯 날 불렀다.

“아, 죄송합니다.”

나는 뒤늦게 사과하고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이 정도 했으면 아펠이 알아서 숨었겠지.

하지만 문이 열렸는데도 아펠은 그대로 방 한가운데에 있었다.

“네 짐은 저기 있어. 못 챙긴 게 있는지 확인해 볼 테냐?”

“네, 네에.”

피오르는 여전히 아펠이 눈에 안 보이는 듯 행동했다. 그는 당황한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피오르를 계단 쪽으로 밀며 말했다.

“그럼 마지막이니 잠깐 감상에 젖어 있을게요!”

“그, 그래. 준비가 끝나면 연구동으로 와라. 배웅은 해줄 테니까.”

피오르가 얼떨하게 대꾸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여전히 아펠은 아무렇지 않은 듯 서 있었다.

나는 귀신에게 홀린 듯한 기분으로 아펠에게 다가갔다.

그는 조각상처럼 꿈쩍도 않고 있었고, 존재감은 묘하게 옅었으며 발치에는 반투명한 마법진이 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근처를 기웃거리던 와중 아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설마, 내가 보여?”

그건 내가 아펠에게 들은 말 중 제일 유령 같은 대사였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펠이 손을 휘저었다. 발치에 있던 마법진이 사라지며 그의 존재감이 다시 드러났다.

다행이다. 내가 미친 게 아니었구나.

“뭐 한 거야?”

“날 안 보이게 하는 마법진. 내가 개발한 건데…….”

아펠이 멋쩍은 듯 대답하다가 나를 마주 보았다.

그가 부드럽게 웃자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가 눈꺼풀에 반쯤 가렸다.

“정말, 넌 못 당하겠다.”

“…….”

나는 반신반의하며 시선을 내렸다. 설명을 듣고 나서도 놀랍긴 매한가지였다. 나는 마법진이 떠 있던 그의 주변을 맴돌며 괜히 손을 휘적거려 보았다.

세상에, 마법진을 개발했다니.

내 눈에는 보이는 것을 보니 아직 개선의 여지는 있는 것 같았지만, 피오르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성과였다.

갈레트도 그렇고 파타슈도 그렇고, 이제는 아펠까지. 주변에 왜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많은 거야?

뜬금없이 카눌레를 향한 내적 친밀도가 쌓이는 순간이었다.

“아니, 근데 아펠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내가 오늘 올 줄 어떻게 알고.”

“저번에 왔다가 우연히 들었어. 이제 밤이 아니라도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확실히 투명 마법이라면 대낮에도 사람들 시선을 피하는 게 충분히 가능할 만했다.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펠이 조금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면서 네 어머니 소식도 들었고.”

그 말을 듣자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아펠이 위로하듯 부드럽게 내 손을 붙잡았다.

“힘이 못 돼서 미안해.”

“아… 아냐.”

나는 조금 당황해 말을 더듬으며 그의 손아귀에서 내 손을 빼내고,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

“근데 너 정말 대단하다. 이제 내가 더 가르쳐줄 것도 없겠는데? 이 정도면 마탑 들어올 수 있는 거 아냐? 말해 봤어?”

최대한 가벼운 투로 물었다.

마탑을 폐쇄시킬 거라느니,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나는 그 말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아펠이 마탑을 폐쇄한 이유는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이 힘을 가지는 걸 원치 않아서’라고 했다. 그런데 설마 본인이 마탑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곳을 폐쇄할 리가.

“아직. 그 전에 해야 할 게 생겼거든.”

“해야 할 거?”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아펠은 설명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그것보다 크레페.”

“응.”

어쩐지 아펠의 시선이 아련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여기 사람들…….”

아펠이 귀를 빨갛게 물들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알면서 모르는 척한 거라고 얘기해 주지 그랬어.”

그것도 들었구나.

나는 그저 겸연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탑 나가기 전에 너랑 인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아펠이 물었다.

“오늘 바로 가는 거야?”

“그래야지.”

나는 픽 웃으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갈레트가 마탑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만이라도 여기 있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입학을 일 년씩이나 늦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 마탑 폐쇄할 거면 나중에 해줘. 적어도 우리 오빠가 졸업할 때까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펠이 내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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