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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51)화 (51/181)
  • 51화 

    카눌레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내 행동이 이해될 리 없었다.

    나는 피식 웃고 일부러 말을 돌렸다.

    “설마 입학시험에 나만 붙고 오빠는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거야?”

    “하, 콱 문제 잘못 읽어버려라.”

    카눌레가 공갈을 치고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공책을 넣은 서랍을 돌아보다가 이내 문을 닫았다.

    눈 쌓인 흔적은 오간 데 없고 밖은 이미 완연한 봄이었다. 황금색이었던 잔디에는 반쯤 푸른빛이 올라왔고 바람은 어딘가에서 날아온 꽃잎을 몇 점 업고 있었다.

    엄마의 장례식 이후 나는 꽤나 바쁘게 지냈다.

    마탑에 갈레트를 들여보내기 위해 주변 어른들을 설득하고, 내가 다음에 해야 할 일을 모색하느라.

    그리고 나는 학교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몽블랑은 후작이었다. 게다가 이제 그는 갈레트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내가 무슨 수로 그를 막겠는가.

    일단 학교에서 연줄을 만들고, 마법 도구를 개발하든 판매하든 그 실적으로 공을 세운 후 작위를 받아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몽블랑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내가 노리는 건 그것이었다. 다행히 내 인생 공략집에는 앞으로 유력한 귀족 가문이 되는 게 누구인지 같은 것도 적혀 있으니까.

    흥, 이렇게 된 이상 권력으로 찍어 눌러주마!

    “지금 가는 거야?”

    “응.”

    저택 앞에 마차가 줄지어 선 것을 본 듯 갈레트가 나와 있었다. 그의 옆에는 파타슈도 함께였다. 키슈는 브라우니를 연구하느라 못 나온 것 같았다.

    그냥 입학시험을 보러 다녀오는 것뿐인데 배웅까지 나와주다니.

    나는 친구를 만들려는 것도, 학문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빽 만들러 가는 길에 그들의 순수한 얼굴을 보니 양심에 쪼금 생채기가 난 기분이 들었다.

    내 맘도 모르고 그들이 해맑게 덧붙였다.

    “시험 잘 보고 와! 어느 쥐방울이랑은 지능 수준이 다르니 당연히 합격하겠지만!”

    “조심히 다녀오세요. 사람을 쥐방울이라고 부르는 막돼먹은 귀족도 들어가는 곳이니 합격 걱정은 안 할게요.”

    “…….”

    나는 그들의 말을 못 들은 척 마르크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퍼레이드를 하듯 창문 밖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둘도 싸우지 말고 있어요! 다녀올게!”

    “잘 다녀오세요.”

    “물론이지!”

    대답은 잘하네.

    태클을 걸 의욕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언제 그런 대답을 했었냐는 듯 다시 말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둘 다 주먹질에는 자신이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입학을 준비하는 파타슈와 마탑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갈레트. 각자 장점이 있으니 잘 어울리는 콤비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아쉽긴 했지만 뜯어말리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온 것 같았다.

    나는 반쯤 해탈한 기분으로 그들이 다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카눌레가 그들의 뒤통수를 한 대씩 쥐어박고 마차에 탔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 * *

    커스터드 귀족 학교.

    이곳은 커스터드 자작령에 위치한, 슈트루델 제국 내에서 마법 관련 과목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사립 학교였다.

    또한 불세출의 위인 대다수가 이 학교의 졸업생이었기에 학교의 명성도 어마어마해서, 높은 입학금과 경쟁률, 수업료에도 불구하고 매년 지원자가 들끓는다고 했다.

    역시나 올해도 건물 입구부터 인파가 가득했다. 까딱하면 일행을 잃어버릴까 봐서 나는 양손에 카눌레와 마르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 시대에는 미아 방송도 못 할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세렝기 자작님, 카이트 남작님, 영애님들께서 아버지를 찾고 계십니다. 제2별관으로 와주세요.」

    확성 마법인가? 역시 잘나가는 학교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그러고 보니 키슈도 비슷한 마법을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조금 안심하고 그들을 꽉 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카눌레가 쯧, 혀를 차고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가, 같이 가!”

    갈레트 때문에 축제 구경을 온 적이 있었으니 나도 여기 처음 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뭔가에 걸려 넘어졌을 때, 이 자리에 계단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기억해 냈다.

    넘어진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다행히 내가 볼썽사납게 구르는 일은 없었다.

    “읏차.”

    누군가가 날 잡아주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콩 박고 고개를 들었다. 카눌레와 같은 빨간색 눈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언니분을 따라오셨나요? 이곳과 안 어울리게 귀여우신데.”

    뭐지, 이 바람둥이 같은 대사는?

    감사 인사를 하려던 입술이 오므려졌다.

    오빠뻘의 남자아이는 나이에 안 어울리는 느끼한 미소를 짓더니 내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이디를 보니 언니분도 아름다우실 것 같네요.”

    아름다운 오빠만 둘 있는데요.

    “다이어트만 조금 하시면… 크흠. 나중에 꼭 이 학교에 들어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후배님.”

    그는 생긋, 하는 효과음이 들릴 것 같은 미소를 짓고 멀어졌다.

    나는 기가 막혀 화내는 것도 잊고 인파에 섞이는 그의 크림색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저놈.

    “악!”

    기막혀할 여유도 없이 누군가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짧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자 어느새 다가온 마르크가 날 붙잡아주었다.

    “갑자기 뛰어가시면 제가 따라온 이유가 없잖습니까!”

    마르크도 기사이니만큼 체구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보니 단연 멀대 같았다.

    “괘, 괜찮아요. 어차피 시험장에 아저씨랑 같이 들어갈 수도 없고. 금방 마치고 나올게요.”

    그렇게 말하자 마르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그와 함께 계단을 마저 올라온 나는 마침내 혼자 본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건물 안은 나름 한산했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고에 표기된 응시 요건 중에는 만 15세 이하라는 나이 제한이 있었지만, 졸업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커스터드 귀족 학교의 특성상 대부분은 열셋 내외의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어린 나이와 관련 없이 모두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나까지 긴장되게시리…….

    괜히 쫄려서 발소리를 죽이고 근처의 교실을 돌아다녀 보았다. 카눌레가 멀리 가진 않았을 것 같아서.

    그런데 그 와중 불청객이 내게 말을 걸었다.

    “쥐방울?”

    “앗, 덩치!”

    “크바스야, 멍청아.”

    갈레트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던 그 동급생이었다. 내가 마탑에 들어가기 전에도 봤기에 기억이 났다.

    그는 학교 건물이 제집인 것처럼 편한 옷차림을 하고 한 손에는 목검을 들고 있었다.

    사랑의 몽둥이를 가지고 다니는 시험 감독인 것도 같았지만, 설마 학생에게 그런 일을 시킬 리는 없고…….

    나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학교 짤렸어요? 재입학하러 온 거죠?”

    “쥐방울이 못 하는 말이 없네.”

    “아얏.”

    그가 목검으로 내 정수리를 콩 두드렸다.

    아님 말지 왜 폭력이야.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머리를 꾹 눌렀다. 크바스가 못 본 척하고 대답했다.

    “난 방학 때도 기숙사에서 지내거든. 여기 온 건…….”

    그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며 살벌하게 웃었다.

    “우리 후배님들 기 좀 죽일까, 하고. 머지않은 미래에 나한테 기어오르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고서 그가 다시 날 내려다보며 히죽거렸다.

    “기선 제압이라고나 할까.”

    우와아.

    “진짜 개못됐다.”

    이크, 소리 내서 말해 버렸네.

    크바스가 울컥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정수리를 보호했다. 그러나 크바스는 코웃음만 치고 넘겼다.

    “쳇. 뭐, 됐다. 이왕이면 시험 망해라. 저명한 커스터드 귀족 학교가 유아원 되는 꼴은 보기 싫으니까. 그런 선례는 갈레트 하나로 충분해.”

    그러고 크바스가 휙 돌아섰다. 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혓바닥을 내밀었다.

    흥! 항상 붙어 다니던 분홍 머리는 어디 간 거야? 저 밉상 관리 안 하고.

    한바탕 사건 아닌 사건을 겪고 나니 어쩐지 주변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내가 재학생이랑 친해 보여서 그런가?

    나는 민망해진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응시는 빈자리 아무 곳에나 앉아도 된다고 안내받긴 했지만, 이왕이면 카눌레랑 가까이 앉고 싶었다.

    아니, 나 같은 어린애를 혼자 두다니!

    그러나 선착순으로 앉은 듯한 학생들 덕에 가까운 교실은 모두 만석이었다.

    내가 1층의 마지막 교실 문을 열려던 찰나, 문 너머에서 누군가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갈레트의 동생이 왔다고? 쉬제트 백작가의?”

    “그래! 내가 분명히 들었다니깐? 어쩐지 어린애가 있다 했더니…….”

    드르륵.

    못 들은 척 문을 열었다. 비밀 얘기하듯 소곤거리던 사람들이 합, 입을 다물었다.

    …덩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오빠 때문이었구나.

    갈레트의 입학 이후로 응시 연령대도 많이 낮아졌다고 들었다.

    마탑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는 피오르가 갈레트의 소문을 들었을 정도면 열 살 입학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얼추 감이 왔다.

    카눌레가 올해 합격한다면 열한 살. 그것만 해도 분명 빠른 입학이었다. 그런데 오늘 입학시험을 보러 온 나는…….

    여덟 살.

    나는 홧홧해진 얼굴을 감추고 빠르게 빈자리를 스캔했다.

    카눌레가 왼쪽 뒤에 앉아 있었고, 반대편인 오른쪽 뒤에 빈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카눌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딴청을 피웠다.

    “…….”

    눈에 띄기 싫은 마음은 알겠지만 조금 상처다.

    “역시 맞나 봐. 금발에 보라색 눈까지 똑같잖아.”

    “그러게. 키 작은 것까지 닮았네?”

    음, 그건 그냥 내가 어려서 그런 것 같은데.

    나는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삼키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별수 없이 남아 있는 자리에 앉기로 했다.

    앉아 있는 학생들 사이를 가로질러 걷는 동안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커스터드 귀족 학교도 전 같지 않구나. 개나 소나 다 들어오려고 하고.”

    앙칼진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수군거리는 것도 아니고, 꼭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쉬제트 백작가에 돈이 남아도는 건가? 응시료 정도는 그냥 버리고 오라고 한 거 아냐?”

    시비조의 말투를 고수하던 주인공은 카눌레 또래의 소녀였다.

    그녀는 나이대뿐 아니라 머리색도 카눌레와 비슷한 흑발이었는데, 흔치 않은 녹색 눈동자를 보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바니유 공작가의 악역 영애?”

    “뭐? 누, 누가 악역이야!”

    그녀가 펄쩍 뛰었다.

    나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에클레르 오 바니유. 통칭 에클레어.

    그녀는 내가 오늘 아침까지도 읽고 있던 공략집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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