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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50)화 (50/181)
  • 50화 

    나는 혼자 고개를 젓고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곧바로 방을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어차피 잠들어 봤자 금방 일어나야 할 텐데, 차라리 난방 빵빵한 본관이나 강의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두툼한 회색 케이프와 겨울용 속바지, 양모를 넣어 짠 베이지색 치마와 양가죽으로 만든 쇼트 부츠까지 단단히 차려입고 방을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평소보다 싸늘했다.

    눈이 와서 그렇겠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본관과 이어지는 복도로 나가려던 찰나였다.

    “내가 그걸 어떻게 말해야…….”

    건물 밖에서 키슈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 그녀에게서 들을 수 없던 낮은 톤의 말투였기에, 나는 호기심이 동해 복도 대신 숙사 건물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리고 내가 창문 밖에서 목격했던 것이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몽블랑 몬테 비안코.

    겨울과 잘 어울리는 차가운 외모,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그 남자였다.

    “내가 신경 쓰지 못한 탓이야.”

    ‘제가 신경 쓰지 못한 탓입니다.’

    이제 거의 잊고 있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아니, 그 말은 내가 들은 적이 없었다. 읽었던 것이었다.

    어느 부분이었지?

    “하아…….”

    키슈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았다.

    건물 안에 있던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키슈가 굳은 듯 멈춰 섰다.

    “크, 크레페 님.”

    “…….”

    몽블랑이 뒤늦게 날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때 나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그의 방금 대사가 어느 부분에 나왔던 건지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나는 숨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그날은 해가 뜬 후에도 하늘이 흐렸다.

    어린 내게 그의 한마디가 들렸다.]

    “크레페 님, 안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의 목소리와 동시에, 순서가 뒤죽박죽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이 남자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날이었다.]

    꿈에서라도 본 듯한 그 말과 함께,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 * *

    엄마의 장례식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이번 공간 이동 때 정신을 잃는 대신 바닥에 먹은 것을 모두 게워냈다.

    갈레트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날 부축했고, 에이미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주변에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사실 이후의 기억은 꿈처럼 희미했다. 엄마의 시신을 보지 못한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들은 영주 대리이자 갈레트의 후견인을 누구로 해야 할지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 자리를 지키기엔 기운이 없어서 우리는 도서관에 모였다.

    “…어떻게 된 거래?”

    내가 힘없이 묻자 카눌레가 빨개진 코를 팽 풀고 대답했다.

    “엄마가 변방으로 지원을 나갔었어. 근데 갑자기 몬스터들이 들이닥쳐서 근처 마을을 공격했대. 엄마는 거기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려다가…….”

    카눌레가 말을 맺지 못하고 다시 코를 풀었다. 코를 푸는 척하며 눈물을 닦으려는 게 빤히 보여서 나는 피식 웃었다.

    “아빠는? 오셨어?”

    “못 왔어.”

    갈레트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카눌레가 다시 부연 설명을 했다.

    “변방에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대. 장례식에도 그렇고, 그다음에도 할 일이 많다더라. 그래서 대신 몽블랑 후작님이 오신 거야.”

    몽블랑.

    잊고 있던 이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가 신경 쓰지 못한 탓이야.’

    몽블랑의 그 말도.

    나는 갈레트를 향해 물었다.

    “몽블랑 후작님은 뭘 하고 계셨는데?”

    “그 아저씨도 우리 엄마랑 같이 변방 지원에 나갔었어. 왜?”

    “…….”

    나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루아 요새에서 그는 분명 나를 구해줬다. 하지만 엄마를 구해준 것은 아니었다.

    만일 몽블랑이 엄마를 암살하려 한 이유가 정치적인 것이라면, 그가 나를 구한 것도 모순되는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몽블랑은 분명 큰 상처를 입었다. 내가 그 목격자이지 않은가.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생명의 은인에서 놈으로 격하되는 게 참 빠른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더한 욕설을 하고 싶은 맘을 참고 있었다.

    “잠깐 얘기를 나눠도 괜찮을까요?”

    마침 도서관 문을 열고 몽블랑이 들어왔다. 카눌레가 코를 팽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몽블랑이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에 얹고 잠깐 고개를 숙였다. 예를 취하는 걸 보니 공적인 문제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수플레 님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쉬제트 백작령의 관리자 자리가 비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몽블랑의 말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하는 말을 전부 외워서 기록해 놓을 기세로 달달 외웠다.

    각종 법률 용어 따위의 부연 설명과 수식어를 제외하고 남은 내용은 간단했다.

    “…갈레트 님이 성인이 되실 때까지 제가 후견인을, 그리고 쉬제트 백작령의 영주 대리를 맡으려고 합니다.”

    우리 셋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엄마를 잃었다는 슬픔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현실을 따져봐야 하는 상황이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갈레트가 짧게 질문했다.

    “아빠랑은 얘기하셨나요?”

    “예.”

    몽블랑은 아빠와 같은 왕당파 귀족이라고 했다. 이미 브라우니의 상담도 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인데 아빠가 반대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미 결정된 사항에 갈레트가 반대할 리도 없지.

    “좋아요, 그렇다면…….”

    “잠깐만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내가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후작님께서 두 영지를 모두 관리하시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쉽진 않겠지만 다른 방안이 없으니까요.”

    몽블랑이 담담히 대답했다. 내가 질문을 이었다.

    “여기에서 재판이 있는 날엔 후작령을 비우시려고요?”

    “여기 이동용 포트와 리시버를 설치해서…….”

    “공간 이동이 혼자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마법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반이 산지인 후작령과 이곳 백작령은 기후 조건도 다른데, 농업에 대한 민원이 생기면 처리하실 수 있겠어요?”

    “…….”

    몽블랑이 입을 다물었다. 차가운 외모와 대조됐던 부드러운 말투가 사라지자 ‘그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 정도’라던 원작의 묘사가 이해가 됐다.

    “대안이 있으십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영지 관리는 에이미에게 맡겨주세요. 그분은 오랜 시간 동안 엄마를 보좌하셨어요. 웬만한 민원은 다 해결해 주실 거예요.”

    “하지만 재판은 보좌관이 맡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후작님께서 권한을 위임해 주시면 되죠.”

    막힘없이 말했다.

    “후작님께서 갈레트 오빠의 후견인이 되는 데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후작님이 아빠를 대신해 영주 대리를 하시고, 대신 실무를 에이미에게 위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후작령의 업무도 많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 당신이 이 저택에 올 이유도 없어질 거 아냐.

    사실 내 목적은 거기 있었다.

    나는 몽블랑이 영지 관리를 이유로 이 저택에 들락거리는 걸 원치 않았다. 여기엔 아직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 둘이나 남아 있었으니까.

    내 열 살 생일에 암살당하는 갈레트와, 갈레트의 죽음 후 몽블랑을 후견인으로 두게 되는 카눌레.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다행히 몽블랑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우리 영지를 탐내는 거였다면 이걸로도 충분히 이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엔 갈레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오빠.”

    “응.”

    “오빠는 마탑에 들어가.”

    “응?”

    나름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던 갈레트가 제 귀를 의심하듯 되물었다.

    하지만 그가 들은 말은 분명 내 진심이었다.

    【 봄, 새로운 출발 】

    “자, 잠깐만, 크레페. 마탑이 들어가겠다고 해서 맘대로 들어갈 수 있는 데는 아니잖아.”

    갈레트가 당황한 표정으로 뒤늦은 말을 쏟아냈다.

    아빠에게 말도 없이 학교를 쉬고 마탑에 들어가게 생겼으니 불안할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번복하지 않았다.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내가 설득할 거야. 오빠는 날 믿어줘.”

    “…….”

    갈레트가 머뭇거렸다.

    물론 나도 빈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아빠를 설득할 자신은 있었다.

    어차피 그가 변방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여기는 우리 판이다. 그리고 아마 아빠도 이 결정에 쌍수 들고 반대하진 않겠지.

    그에게는 이미 나나 카눌레를 마탑으로 보내려 했던 전적이 있으니까.

    “오빠 정도면 마탑분들도 반대하지 않으실걸.”

    나는 싱긋 웃으며 몽블랑을 쳐다보았다.

    “그렇죠?”

    “…….”

    방금 엄마의 장례를 끝마치고 온 사람답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몽블랑은 찔리는 곳이 있는 사람처럼 잠깐 멈칫했다. 그러고서 그는 아니라는 대답은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갈레트 님의 이야기는 저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갈레트 님 정도면 피오르나 키슈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갈레트가 나와 몽블랑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마법 배워올게.”

    “오빤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갈레트를 향해 다짐처럼 말했다. 갈레트가 대답 대신 나를 꼭 껴안았다. 나는 말없이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사실은 마법 못 배워도 돼.

    그 말은 꾹 삼켰다. 물론 오빠가 마법을 배워서 제 몸을 지킬 수 있게 되면 좋겠지만, 그것보다 급한 것은 그를 몽블랑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안전한 곳에 보내는 것이었다.

    적어도 암살자나 몬스터가 마탑에 나타나진 않을 테니까.

    * * *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생각난 것은 하나였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건가?

    루아 요새에서 큰 고비를 넘기며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건만, 내가 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엄마가 원래 죽게 되어 있는 시간을 몇 개월 미뤘을 뿐이었다.

    심지어 이건 내가 여덟 살 생일을 맞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레페는 일곱 살에 엄마를 잃었다’는 원작의 내용 그대로였다. 운명을 바꾸는 건 실패였다.

    그렇다면 원작에서 범인이었던 몽블랑이 이번에도 범인이지 않을까?

    내 행동의 의도는 그 의심에서 시작됐다.

    벌컥.

    노크도 없이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책상에 펴놓았던 『내 인생 공략집』을 덮었다.

    “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낙서질이냐?”

    들어온 것은 카눌레였다. 카눌레가 탐탁지 않은 듯 혀를 찼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것을 서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나가면 돼?”

    “너 진짜 후회 안 해?”

    카눌레가 짧게 물었다.

    내가 멈춰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눌레가 입술을 비죽거리더니 멋쩍게 시선을 피했다.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보통은 학교를 졸업하고 마탑에 들어가잖아. 근데 넌 마탑을 제 발로 걸어 나와서 들어간다는 게 학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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