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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49)화 (49/181)

49화 

자존심 문제인지 그렇다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작년 갈레트의 생일에도 파타슈가 바움쿠헨국의 노예라고 오해받았던 전적이 있었으니 더욱.

나는 그를 달래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입학해요. 갈레트 오빠가 졸업하기 전에 들어가도 되고, 아니면 카눌레 오빠랑 같이 입학시험 봐도 되고. 아니면 저랑 들어가도 괜찮고요.”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던 파타슈가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그분들보다는 크레페 님이랑 같이 입학하는 게 낫겠네요.”

“어디서 수작질이야?!”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나는 문을 돌아보기도 전에 고개를 푹 숙였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갈레트가 쿵쿵거리며 들어와 내 머리를 껴안았다.

파타슈도 언짢아하는 표정으로 툭 던졌다.

“그런 거 아니에요. 크레페 님께는 벌써 남자친구도 있구.”

에?

툭 던졌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폭탄 발언 같은 말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파타슈를 쳐다보았다. 파타슈는 그제야 자신이 실언한 것을 깨닫고 입을 합, 다물었다.

아니, 그럼 더 진짜 같잖아!

“뭐, 무, 무슨 소리야? 응? 크레페?”

갈레트가 기계처럼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아뉘, 구게…….”

나는 그의 손아귀에 양 뺨이 짓눌려져 있었기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갈레트가 당황해서 힘 조절을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파타슈가 갈레트를 만류하며 끼어들었다.

“키슈 님한테서 들었어요. 마탑에 다른 어린애가 있다고…….”

“어떤 놈이야!”

“아니, 아…….”

아펠이랑은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내가 그 이름을 채 꺼내기도 전에 말문이 막혔다. 목이 메어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문득 보니 내 손목의 문양이 빛나고 있었다.

이게 그 서약의 효과인가?

지금까지는 마탑 얘기를 꺼낼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런 식으로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갈레트도 내 손목을 보고 놀란 듯 잠시 힘이 풀렸다.

내가 때를 놓치지 않고 내 뺨을 누르고 있던 그의 손을 떼어냈다.

“아무튼,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없었어! 파타슈 님도! 그런 거 아니에요!”

“좋아!”

응?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데?

이렇게 쉽게 믿어주는 건가 싶어 나는 갈레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추측은 정답이 아니었다.

“나도 마탑 들어갈 거야.”

갈레트가 폭주하듯 도서관을 뛰쳐나갔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말려주겠지?

카눌레의 생일 파티가 끝난 지금까지 내가 저택에 머물러 있었던 건,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한 피오르의 일정이 조금 미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피오르가 도착하자마자 나는 다시 마탑으로 향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정확히는, 기절할 각오를 하는 거지.

“짐은 다 챙기셨습니까?”

피오르가 물었다. 갑자기 존댓말을 쓰는 게 그 속이 빤히 보였다.

나는 그 속내를 숨기지 않고 피오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피오르는 끝까지 뻔뻔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네에.”

그래, 내가 졌다.

혼자 도서관에서 푸딩을 퍼먹고 있던 나는 남은 푸딩을 한 방에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면 다시 디저트랑은 안녕일 테니까.

믿을 건 아펠뿐인가.

최대한 천천히 푸딩을 씹으며 피오르가 이끄는 대로 따라 나갔다. 하지만 푸딩이 워낙 부드러워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도 금방이었다. 으으, 아쉬워라.

가족들과 키슈, 파타슈는 이미 앞마당에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듯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떠나는 날이라서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그것 때문이라면 카눌레까지 저렇게 삐쳐 있을 리가.

“오빠, 무슨 일 있어?”

“엄마가 검 가져갔어.”

“네가 진검을 쓰긴 아직 일러.”

하하…….

나는 어설프게 웃고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오빠는?”

“마탑 가기 전에 졸업부터 하래.”

뭐, 맞는 말이네.

나는 엄마랑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번엔 파타슈 앞에 섰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 전에 그 뒤에 서 있던 키슈가 파타슈의 어깨를 꾹 눌렀다.

“비밀이랬지?”

“네에…….”

으음, 여기도 넘어가자.

파타슈도 자신이 예상보다 큰 실수를 했나 보다 싶어 조금 기가 죽어 있었다.

사실 제일 큰 잘못을 한 건 어린아이에게 그런 얘기를 꺼낸 키슈겠지만!

“크흠.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피오르가 점잖게 말했다. 그때 엄마가 내게 손짓했다.

“크레페?”

“네?”

엄마가 내 앞에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그녀가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지면 그다음은 내가 책임질게. 우리 딸, 엄마 믿지?”

“그럼요!”

내가 활짝 웃으며 대답하자,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에 달아놓았던 주머니 두 개를 내게 건네주었다.

“일단 이거.”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것을 열어보았다. 하나에는 고소하고 달콤한 바닐라 버터 향의 쿠키가, 다른 하나에는 사탕이 들어 있었다.

“헉!”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어 보여서.”

엄마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엄마의 목에 매달렸다.

“사랑해요! 꼭 이거 때문에 하는 얘긴 아니에요!”

“맞다는 뜻이에요.”

카눌레가 엄마에게 얄밉게 속삭였다.

“아껴 먹을게요.”

헤헤거리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연신 헤실거리자 엄마도 흐뭇하게 웃었다.

그녀가 빵빵해진 내 뺨을 꾹 누르고 일어섰다.

나는 그것이 작별의 신호임을 알아채고 통통걸음으로 피오르 옆에 섰다.

“감기 조심해!”

“네! 엄마두요!”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브라우니가 제게 하는 인사라고 생각한 듯 파타슈의 품 안에서 열심히 콧소리를 냈다.

곧 내 주변을 둘러싼 마나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열심히 팔을 휘저었다.

“금방 올게요오오!”

* * *

“이게 그 에이미라는 사람이 해준 쿠키야?”

“응! 맛있지?”

“응, 완전.”

아펠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내 보물 같은 쿠키를 내어준 보람이 있었다.

아, 이게 에이미가 날 볼 때 느끼는 감정이구나!

앞으로는 더, 더 많이 표현해 줘야겠다.

의도치 않은 역지사지의 교훈을 얻은 내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는 안 먹어?”

“많이 먹었지. 아, 사탕도 먹어볼래? 어디다 뒀더라…….”

아무래도 사탕보다는 쿠키가 보존 기간이 짧을 것 같아서 먼저 먹고 있었다.

그래도 아펠에게는 이것저것 퍼주고 싶은 할머니가 된 기분으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아니야. 괜찮아. 아껴 먹어야지.”

아펠이 손을 내저었다. 그 말도 맞는 것 같긴 했지만, 나는 의자에 앉아서 책상 서랍을 뒤적거려 보았다.

“으음, 어차피 금방 돌아갈 것 같아서.”

“뭐?”

아펠이 놀라 내 팔을 붙잡았다. 나도 그를 마주 보았다.

그의 격정적인 반응이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 마법에 재능 없잖아. 아직도 마법진 계산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데.”

“마탑을 아예 나가려는 거야? 언제?”

“아마 1년 채우면 바로……?”

아직 생각만 했을 뿐 실제로 누구에게 말한 적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조금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내가 들어올 때까지는 있을 거지?”

아펠이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으로 물었다. 차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나는 에둘러 표현했다.

“최대한 빨리 들어와 봐…….”

“…….”

아펠이 시무룩하게 내 팔을 놓아주었다.

나는 그가 붙잡고 있던 왼쪽 손을 가만히 쥐었다 펴보았다.

딱 1년만.

이제 반년도 안 남은 그 기간은 내가 혼자 다짐한 약속 기한이었다. 원래는 열 살 전까지 마법을 배우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내겐 재능이 없는 것 같았으니까.

어차피 마법을 쓸 수 없을 바에야 곁에서 엄마와 갈레트를 지키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마법진 공부는 독학으로 하고.

“대신…….”

나는 내 팔목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피오르가 줬던 은색 팔찌가 아직 채워져 있었다. 아펠이 날 쳐다보았다.

“대신 나중에 내가 팔찌 만들어줄게, 네 눈이랑 똑같은 파란색으로.”

나도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지난 반년이 허송세월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마법을 쓰지 못해도 마법 도구를 만들 수는 있었고, 무엇보다 아펠을 만났지 않은가.

“나중에 마탑 놀러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아펠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가 그 침묵이 의아해질 때쯤 아펠이 말했다.

“아니야.”

“응?”

“마탑, 내가 폐쇄시킬 거니까 오지 마.”

“에?”

나도 모르게 얼빠진 탄성을 내뱉었다.

분명 원작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긴 했다. 하지만 원작의 아펠과 지금의 아펠은 너무 성격이 다르지 않아? 엄마 때처럼 미래가 완전히 달라진 것 아니었어?

혹시 내가 애를 잘못 키운 걸까?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아펠이 내 손을 붙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마주 보았다.

“대신 내가 만나러 갈게. 기다려줘, 크레페.”

순간 주변이 숨 막힐 듯 고요하게 느껴졌다. 곤충 소리도 없는 겨울밤이라 그런 게 아니었다. 아펠에게 압도됐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어두운 눈빛에, 보석처럼 투명한 눈동자에, 별빛 같은 마법등이 반사된 그의 은회색 머리칼에 나는 딱 잘라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뭐, 뭐… 당장 나가는 것도 아니고, 몇 개월이나 나중 일인데.”

“그렇네.”

아펠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웃고는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몇 개월이나 나중 일인데’라는 내 말은, 최악의 방향으로 빗나가 버렸다.

* * *

카눌레의 열 번째 생일이 끝난 지 겨우 몇 주 정도 지났을 때였다. 한겨울의 추위 때문에 나는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으, 추워서 못 자겠네!

하나뿐인 창문으로 외풍이 들어 까딱 잘못하면 동사할 것 같은 온도였다. 내가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걸 알면 엄마가 얼마나 가슴 아파하겠는가.

“에잇!”

나는 아침잠을 포기하고 이불을 걷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분명 아침이었지만 구름이 많이 껴서 햇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간간이 싸라기눈이 부슬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머리색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 사람이 갑자기 여길 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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