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48)화 (48/181)
  • 48화 

    왼쪽 손목에는 피오르가 줬던 팔찌, 오른쪽 손목에는 비밀 서약서에 서명하고 생긴 문신이 남아 있었다.

    겨울이라 긴소매 옷을 입고 있어서 지금까지 못 봤던 모양이었다.

    갈레트가 내 손을 붙들고 손등과 손목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내 품에 안겨 있던 브라우니가 갈레트의 머리 꼭대기에 매달렸다.

    “윽.”

    브라우니의 무게 때문에 갈레트의 목이 쑥 들어갔다.

    갈레트가 내 손을 놓고 브라우니를 머리에서 내려 품에 안았다.

    나는 헤헤 웃으며 브라우니의 머리를 잠깐 쓰다듬었다. 브라우니 덕분에 갈레트의 오지랖에서 벗어난 거니까.

    “아무튼 난 이 검으로 연습이나 더 해야겠다. 다들 알아서 할 일 하세요.”

    카눌레가 산만해진 상황을 정리하며 손을 내저었다. 모여 있던 기사들이 그제야 뿔뿔이 흩어졌다.

    나도 카눌레가 열심히 하겠다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살짝 뒤로 물러났다.

    키슈가 말했다.

    “그럼 인사도 했으니 저희는 머물 곳을 정리하고 있을게요. 브라우니는 여기 놓고 갈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싱긋 웃고 파타슈와 함께 돌아갔다.

    소란이 가신 후 나는 갈레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브라우니를 품에 안은 갈레트가 웃음기 남은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

    “아냐, 오빠도 브라우니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헤헤.”

    갈레트가 생글거리며 브라우니의 앞발을 만지작거렸다.

    평화로워서 좋구만.

    계절이 바뀐 것만 빼면 반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않고 한때 내 지정석이었던 벤치로 다가갔다.

    아, 눈 녹은 물 때문에 못 앉겠구나.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카눌레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오빠, 잠깐만.”

    “응?”

    타격 연습용 허수아비 앞에 서서 검날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던 카눌레가 고개를 들었다.

    “마법진, 내가 한번 봐줄까? 그래도 배운 게 있으니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뭐…….”

    카눌레도 딱히 아니란 말은 않고 내게 검 손잡이 쪽을 내밀었다.

    물미에 음각된 마법진은 작고 섬세했기에 나는 가까이 다가가 검을 건네받았다.

    그런데 내가 손잡이를 쥐자마자 검날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끼야아… 악?”

    챙.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 손에서 벗어난 검이 바닥을 뒹굴었다.

    내가 놀라서 손잡이를 놓친 줄 알았는데 카눌레가 짧은 순간에 검을 쳐서 멀리 보내버린 모양이었다.

    “크레페! 괜찮아?”

    갈레트가 뒤늦게 놀라 다가왔다. 나는 아직도 얼떨떨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뭐, 뭐였지?”

    빠른 판단을 했던 카눌레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마르크가 바닥에 내팽개쳐진 검을 들고 다가왔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못 봤는데…….”

    “…….”

    나는 대답 대신 다시 검에 손을 뻗었다. 갈레트가 하지 말라는 듯 내 어깨를 잡았지만 나는 무시했다.

    검 손잡이를 쥐자 다시 검날이 화염에 휩싸였다. 영화의 특수 효과처럼 화려한 모습이었다.

    근데 진짜 하나도 안 뜨겁네?

    “마, 마법인가 봐.”

    나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말했다.

    카눌레가 얼떨하게 내 손에서 검을 가져갔다. 불이 폭삭 꺼졌다.

    “뭐야, 왜 너한테만 불이 나?”

    “뜨겁지도 않네요?”

    마르크가 거들었다.

    나는 다시 검을 건네받고 손잡이에 새겨진 마법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옷에 불이 옮겨붙긴커녕 불 바로 위까지 손을 갖다 대도 아무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무서울 것도 없었다.

    이건 발광진이랑 원소 변환진, 여기 조금 부서진 건 마나 증폭진 같은데… 나머지 부분은 뭐지?

    “진짜 안 뜨겁네?”

    갈레트도 이게 위험하지 않은 걸 인지한 듯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 옆을 기웃거렸다.

    나는 마법진을 자세히 보기 위해 검의 방향을 바꿔 잡았다. 그 과정에서 검날이 갈레트 품에 안긴 브라우니의 근처를 스쳤다.

    “뺙?!”

    닿은 것도 아니었는데 브라우니는 생전 처음 듣는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팔다리를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갈레트가 깜짝 놀라 손을 놓았다. 브라우니가 위로 5미터쯤 솟아 도망쳤다.

    “삐! 삐유! 쀼!”

    브라우니가 공중에서 열심히 발길질을 하며 항의했다.

    갈레트가 날 쳐다보았다.

    “뭐래?”

    “내가 어떻게 알아…….”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카눌레가 끼어들어 내 손에 있던 검을 도로 빼앗아갔다.

    “아빠한테 물어보자.”

    “아, 이거 혹시.”

    마르크가 끼어들었다. 우리 셋이 동시에 마르크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시선이 몰리자 그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었다.

    “저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만, 아마…….”

    “마나 차단용 검인가 보군요.”

    카눌레의 검술 선생님인 기사단장이 마르크의 말을 가로챘다.

    “몬스터 중에 마법을 쓰는 놈도 있거든요. 검으로 그걸 막을 수 있게 작업한 거죠.”

    “삐유!”

    브라우니가 공중에서 사납게 울며 뒷발차기를 했다.

    평소에는 워낙 얌전해 인형이나 강아지 정도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브라우니도 분명 마나를 이용해 하늘을 나는 전설의 동물이었다. 마나 차단용 검에 과민 반응 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래, 저것도 몬스터였지.”

    “삐익!”

    카눌레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브라우니가 코를 푸륵거렸다.

    내가 공중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브라우니가 내 품에 내려왔다.

    “아빠한테도 생각이란 게 있었구나.”

    갈레트가 흥미롭다는 듯 혼잣말했다.

    “불이 깜빡깜빡하는 걸 보니 마법진이랑 날만 조금 손보면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기사단장에게 말이 끊겼던 마르크가 끼어들었다. 그 말에 카눌레의 안색이 환해졌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브라우니를 쓰다듬으며 단장에게 슬쩍 물었다.

    “위험한 건 아니죠?”

    “네. 불은 마나 차단이 작동한다는 표시로 쓰이니까요.”

    뭐, 그렇다면야.

    마법진 문제는 키슈와 피오르의 도움을 받으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머리를 굴리며 나름대로 견적을 내보고 있는데, 단장이 내게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작은 도련님을 그렇게 아이 취급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나는 입을 다물고 카눌레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카눌레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단장님이 그런 말 해서 들켰잖아요!”

    “네? 아, 아니…….”

    갈레트가 책망하자 단장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졸지에 확인 사살당한 카눌레가 으르렁거렸다.

    “내가 꼬맹이로 보여?”

    엄마야!

    나는 물웅덩이를 철벅거리며 저택으로 도망쳤다.

    갈레트가 단장의 옷자락을 붙들고 뭐라 쫑알거리는 사이, 카눌레가 날 잡아먹을 듯이 쫓아왔다.

    “크레페, 너 내가 우습냐?!”

    “응! 미안!”

    “야!”

    “삐유우우우!”

    브라우니의 울음소리와 함께 고소한 빵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 갑작스러운 이별 】

    겨울엔 역시 핫초코가 진리지.

    “크으…….”

    나는 비 오는 날 막걸리를 마시는 주당 같은 탄성을 내뱉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도서관 문틈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 손에는 아직 따끈한 머그잔, 마시멜로를 아낌없이 올린 핫초코와 그 위로 살살 올라오는 온기.

    이대로 시간이 멈춰줬으면.

    나는 잘 쪄진 찹쌀떡처럼 도서관 의자에 눌어붙었다.

    “파티 때 그렇게 먹고도 안 질려요?”

    나 혼자뿐이던 도서관에 파타슈가 입장했다. 브라우니도 없이 그와 단둘이 있기는 오랜만이었다.

    “에이, 며칠이나 지났잖아요.”

    “…그저께였자나요.”

    이틀은 며칠 아닌가, 뭐.

    말로는 꺼내지 않고 코를 씰룩거렸다.

    그 말대로 이틀 전, 카눌레의 생일 파티 때는 그야말로 위장에서 설탕 파티가 벌어졌었다. 내가 있으니 특별히 힘을 써보겠다던 에이미의 말은 디저트로 표현됐기 때문이다.

    머랭 쿠키에 마카롱, 오믈렛, 초콜릿 퐁뒤, 설탕을 소담히 쌓은 밀크티, 꿀을 탄 우유, 크림치즈와 생크림을 아낌없이 넣어 만든 티라미수.

    윽, 상상만 했는데도 침이…….

    “흐음.”

    파타슈가 슬쩍 다가와 내 앞에 있는 책을 기웃거리더니 자신도 책을 챙겨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곧 다시 의자에서 내려가 나랑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내 몸에서 이상한 냄새라도 나나……?

    나는 그의 태도에 내 소매를 킁킁거렸다. 그러자 파타슈가 작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핫초코 냄새 때문에요.”

    …진짜 안 좋아하는구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식성이었지만 취향은 존중해 주기로 하자.

    “공부하러 오셨어요?”

    “아뇨. 오빠분들 피해서 왔써요.”

    내가 웬만한 일에 질책하지 않는 걸 눈치챈 듯 이제 그의 어투는 조금 직설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니면 오빠들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이유를 모를 것도 없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대화를 이었다.

    “그래도 책은 좋아하시죠?”

    “싫어하는데요.”

    “…대마법사가 되실 거라면서요.”

    “그래도 공부는 시러요.”

    대쪽 같은 대답에 오히려 내가 말을 잃었다. 하지만 파타슈도 딱히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뽑아온 책을 펼치지는 않고 한참 만지작거리더니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저는…….”

    “네?”

    “전 공부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마법을 배우고 싶거든요.”

    “네에.”

    아까 한 말에 이어지는 대화인가?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파타슈는 내 반응에 조금 용기를 얻은 듯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저도 학교보다 마탑에 먼저 들어가고 싶어요. 근데 키슈 님이 계속 반대하고 있써서…….”

    그렇구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타슈가 제 편을 찾았다는 듯 내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키슈 님한테 같이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학교 안 가도 된다구요.”

    “…….”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언뜻 공부하기 싫은 아이가 땡깡을 부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나는 그 외에도 다른 가능성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키슈가 파타슈를 입학시키려는 곳은 커스터드 귀족 학교였으니까.

    나는 파타슈가 내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도록 최대한 에둘러 말했다.

    “저는 마법 공식을 혼자 공부하고 마탑에 들어간 거라서… 공식을 아예 모르면 학교를 먼저 가는 게 맞을 거예요.”

    “…….”

    파타슈가 풀이 죽었다. 축 늘어진 어깨를 보니 그냥 우쭈쭈해 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지만, 너무 무책임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귀족 학교에 입학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죠?”

    파타슈의 어깨가 움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