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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47)화 (47/181)
  • 47화 

    단순 수학 실력을 빼면 내 실력은 갈레트의 반이나 될까? 지금이라면 열등감으로 비뚤어진 카눌레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가족이 날 아껴주지 않았다면 나라도 엇나갔겠네.

    “쥐방울 이기려고 열심히 했지.”

    갈레트가 날 의자에 앉혀주며 덧붙였다. 그가 말하는 쥐방울이 누군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파타슈는 갈레트를 ‘작은 쪽’, 갈레트는 파타슈를 ‘쥐방울’이라고 부르는 건가.

    나는 분명 파타슈가 우리 가족과 친하게 지내길 바랐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리고, 크레페. 전에 했던 얘기 말인데…….”

    “응?”

    ‘전’이라고 해봤자 내가 집에 돌아온 건 거의 반년 만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갈레트가 잠시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둘러본 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엄마가 암살당할 뻔한 거.”

    내용을 들으니 왜 조심스럽게 말한 건지 알겠다. 나는 덩달아 긴장하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몽블랑 후작이 선물해 준 수첩이 원인이었다며? 내가 그 아저씨한테 편지를 써서 그 선물을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 물어봤거든.”

    갈레트가 말을 멈추고 필기하던 공책 뒷장에 간략한 지도를 그렸다.

    슈트루델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쉬제트 백작령, 아빠가 있는 북쪽의 변방, 동쪽의 바다, 남쪽의 몽블랑 후작령과 산맥까지 알차게 표현된 대륙 지도였다.

    그나저나, 아직도 몽블랑 후작을 아저씨라고 부르는구나.

    내가 잠깐 딴생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 갈레트가 지도에 슥슥 선을 긋고 설명했다.

    “수첩에 쓰인 종이는 이쪽 루트로 들어왔대. 동해 너머의 소국이 원산지인데, 들여오는 건 바니유 공작가에 있는 이동 포트를 사용했다나 봐. 커버에 쓰인 가죽은 바움쿠헨국이 원산지고, 그것들을 엮어 수첩으로 만든 건 몽블랑 후작령에서. 전달은 이쪽 루트.”

    나는 그의 브리핑을 듣다 말고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아니… 이렇게 본격적으로 알아봐 줄 줄은 몰랐는데.”

    “나도 힘들었어. 내가 어린애라고 엄마가 얘기를 거의 안 해주더라고.”

    그런데도 이만큼 정보를 수집했다고?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미래가 달라졌다고는 해도 누구보다 정보에 밝은 건 당연히 나여야 했다. 심지어 나는 신과 운명에 대해 얘기까지 나눈 사이 아니던가.

    대체 갈레트의 행동력과 정보력은 어디까지인 거야?

    역시 진짜 천재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일까. 그런 생각과 동시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내가 아니라 갈레트가 마탑에 들어갔다면, 그는 나보다 훨씬 대단한 성과를 갖고 나왔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내가 알게 된 걸 갈레트에게 다 털어놓는다면?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갈레트는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조금만 날 믿어주면 좋겠는데.”

    “믿지 않아서가 아닐 거야. 엄마가 오빠를 너무 좋아해서 그렇지.”

    나는 곧바로 부정하며 싱긋 웃었다.

    갈레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나도 내 얘기를 안 하는 게 가족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니까. 그저 어린아이인 갈레트를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뿐.

    “내가 괜히 말했나 봐.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가만히 갈레트를 토닥였다. 그는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내가 가져온 베이비 슈를 그의 입에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뺨이 다람쥐처럼 부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 삼키기도 전에 엄마가 도서관에 직접 왔다.

    “여기 있었구나. 아빠가 카눌레한테 보낸 생일 선물이 도착했는데, 같이 볼래?”

    “볼래요!”

    엄마도 양반은 못 되는 건가.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하고 갈레트의 팔을 끌어당겼다.

    [카눌레가 검을 배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선물로 카눌레의 열정에 더욱 불이 붙었으면 좋겠네요.]

    아빠가 보내온 편지의 앞뒤에는 분명 더 많은 말이 쓰여 있었지만 나는 그 문장밖에 읽지 못했다. 카눌레가 끝까지 읽지도 않고 편지를 휙 던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검? 검인가?”

    아무래도 그는 편지보다 선물에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카눌레가 내심 들뜬 듯한 목소리로 선물 상자를 끌어안았다. 엄마가 쪼르르 달려와 편지를 주워 왔다.

    “편지를 이렇게 함부로 다루면 어떡해! 이제 곧 선물보다 편지가 더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될 텐데.”

    엄마가 고도의 돌려까기 같은 발언을 하며 카눌레를 꾸짖었다.

    “그래도 아빠는 변방에 나가 있는 지휘관이잖아요. 설마 검술 얘기를 해놓고 쓸모없는 조랑말 알 같은 걸 보내진 않았겠죠.”

    “잠깐만, 쓸모없는 조랑말이라는 건 우리 브라우니 얘기야?”

    “흥.”

    내가 끼어들어 이의를 제기했지만 카눌레는 듣는 체도 않고 상자를 열었다.

    나는 다가가 그 안을 확인해 보려 했다. 그러나 내 옆에 있던 엄마와 갈레트가 슬쩍 나를 뒤로 밀어 안전거리를 유지하도록 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빠를 너무 못 믿는 거 아니야? 누가 보면 저 상자에 폭탄이라도 들어 있는 줄 알겠네.

    “뭐니?”

    엄마도 아직 안을 확인해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눌레는 대답 대신 상자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분명 검이었다.

    검이긴 한데…….

    “고물이야?”

    갈레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그 질문이 비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카눌레가 손에 든 검의 날이 다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이 많은 접시도 저만큼 이가 나가 있진 않을 것 같았다.

    엄마가 아빠의 편지를 펼치고 한 문장을 소리 내서 읽었다.

    “폐기하기 아까워서 보냅니다.”

    “…….”

    나는 묵묵히 카눌레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카눌레는 기대가 큰 만큼 충격도 컸던 건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거 손질해서 다시 새 검으로 만들 수 있죠?”

    “쓰려구?”

    “굳이?”

    “진심이니?”

    나와 갈레트, 엄마가 순서대로 물었다.

    나는 카눌레가 언제부터 아빠의 선물을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건지 의아했으나, 카눌레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 봐!”

    카눌레 바로 옆에 있던 내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검 손잡이 끝부분, 거기 끼워진 물미에 작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진심이야?”

    “아빠가 쓰던 검인데, 설마 안 좋은 걸 보냈겠어?”

    카눌레가 너무 해맑아서, 우리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보낼 거면 새 검을 보내지 왜 버릴 걸 보냈다니, 상자값 아깝게.”

    엄마는 끝까지 아빠의 선물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었지만, 정작 그걸 받은 카눌레의 반응을 보면 아빠의 호의는 간만에 성공적으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카눌레는 새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애처럼 그 고철을 들고 기사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나와 갈레트도 카눌레의 뒤를 따랐다.

    “크레페 아가씨!”

    연무장의 누군가가 날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마르크 아저씨!”

    “아저찌라고 안 하니 어색하네요.”

    누가 들어도 놀리는 말이었지만 나는 웃음으로 넘겼다.

    마르크와 나눈 마지막 대화는 그가 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는 편지도 나눈 적이 없어 내심 마음이 짠하던 찰나였다.

    “오랜만에 보니 더 반갑군요. 마법은 배웠습니까?”

    “으음…….”

    나는 곤란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대충 말을 흐렸다. 마르크가 눈치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작은 도련님은 웬 쓰레기를 들고 계시네요?”

    그건 카눌레가 원하던 화제이기도 했다.

    카눌레는 쓰레기라는 말에 주눅이 들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펴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빠가 보내주신 거예요. 내 생일 선물이래요.”

    “백작님이요?”

    “쉬제트 백작님이?”

    “백작님이 보내주신 거라고 그랬어?”

    “검을?”

    갑자기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카눌레를 중심으로 모였다. 나는 저절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자세히 좀 말씀해 보십쇼! 누가 쓰던 검이랍니까?”

    그리고 쓰레기 운운하던 마르크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눈을 빛내며 카눌레에게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오랜만이라면서요. 반갑다면서요.

    반년여 만에 돌아왔다는 감격은 몇 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아빠에게 완전히 묻혀버렸다.

    아빠에게 파티의 주인공 자리를 빼앗긴 다섯 살 생일에도 이렇게 허무한 기분은 아니었는데…….

    아빠에게 지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저깟 쓰레기 같은 검한테까지 져야 한다니?

    “크레페, 그쪽에 신경 쓰지 말고 이리 와.”

    갈레트가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손짓했다. 나는 터덜터덜 그의 곁에 다가갔다.

    “마탑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

    “그러게. 빨리 나오려고 했는데.”

    나도 반년 동안 아무 성과 없이 시간만 축낼 줄은 몰랐다.

    나름의 의의를 찾자면 미래의 최강자인 아펠 황자와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뿐일까?

    좋은 관계라…….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게 느껴져서 나는 갈레트에게 그 표정을 들키기라도 할까 목을 움츠리고 케이프 안에 턱을 숨겼다.

    “크레페?”

    “으, 응? 크흠. 왜?”

    “혹시 쥐방울 때문에 거기 있으려고 하는 건 아니지?”

    내가 못 살아.

    갈레트의 논리적인 추측은 그 대상이 내가 되면 언제나 조금씩 빗나갔다.

    나는 이러다 큰일 나겠네 싶어 빠르게 도리질을 쳤다.

    “파타슈 님은 거의 만나지도 못했어!”

    “그 녀석이 뭐?”

    새로 받은 선물을 자랑하고 있던 카눌레가 파타슈의 이름을 주워듣고 이쪽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 자신 있어. 그 쪼그만 게 바람을 일으키든 태풍을 일으키든, 내가 이 검으로 그냥……!”

    “그냥 머요?”

    혀 짧은 목소리가 꼬투리를 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키슈가 어색하게 웃으며 파타슈를 다독이고 있었다.

    졸지에 뒷말을 하다 걸린 상황이 된 카눌레가 쯧, 혀를 차고 검을 내렸다.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 주의를 돌렸다.

    “오셨어요?”

    “삐!”

    브라우니가 웃는 것 같은 얼굴로 내게 날아왔다.

    망아지인데도 표정이 읽힐 정도라니, 브라우니의 감정 표현력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고 싶었어, 브라우니!”

    브라우니의 체온은 찬 겨울 공기를 따끈하게 덥혀줄 만큼 따스했다.

    나는 브라우니를 껴안고 등에 뺨을 문대 인사를 대신했는데, 팔로 느껴지는 무게가 지난번과는 확실히 차이가 났다.

    “너 많이 컸나 보구나?”

    “삐유?”

    브라우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내 옆에 있던 갈레트가 내 손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게 뭐야? 언제부터 차고 있었어? 어라, 저쪽 손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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