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46)화 (46/181)
  • 46화 

    나는 그에게 질병의 위험이나 세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싶었다.

    나도 어릴 때 깨끗한 눈송이를 그대로 퍼먹는 상상을 해보긴 했지만, 공장 매연이나 화학 약품이나 그런 문제가…….

    아니, 잠깐. 여기엔 그런 위험이 없나?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아펠이 내 걱정을 이해한다는 듯 덧붙였다.

    “먼지 같은 건 걱정 안 해도 돼. 정화 마법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으니까.”

    “…….”

    정화 마법은, 먼지 같은 오염 물질은 물론 병균까지 없애주는 고급 마법이었다. 그걸 정화 마법 ‘정도는’이라고 하는 아펠의 말에 내심 기가 막혔다.

    아무튼, 그럼 먹어도 괜찮으려나? 아니, 그래도 문명인인데.

    머릿속에서 두 생각이 충돌하고 있었다. 황자인 아펠에게까지 그런 식습관을 권유할 순 없었다…라고 생각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한참 우물거리던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숟가락은 가져오게 해줘.”

    그게 내 마지막 타협안이었다. 아펠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무리 깨끗한 부분만, 정화 마법까지 사용해 먹는다고 해도 그게 본능적인 꺼림칙함까지 없애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망설임도 잠시뿐이었다. 한 입이 두 입 되고 두 입이 세 입 되는 건 금방이더라…….

    오래간만에 누리는 디저트 타임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숟가락질을 했는지 팔이 아플 지경이었다.

    토핑이라곤 연유와 초코시럽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 있다니. 나도 내가 이 정도로 단것에 굶주려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

    말 그대로 눈꽃빙수였지.

    나는 입안에서 살살 녹는 달달한 맛을 떠올리고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오르를 너무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아펠과 헤어져 가방을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공간 이동 포트가 있는 방의 문을 두드리자 키슈가 문을 열고 날 맞아주었다.

    “데이트는 잘했어요?”

    또 시작인가.

    나는 대답 대신 가방을 마저 끌고 들어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피오르가 한 박자 늦게 책을 덮고 일어났다.

    “유령은?”

    “내 방에 숨어 있다가 인기척 없어지면 돌아간대요.”

    “…….”

    피오르가 말없이 날 내려다보았다.

    “왜요?”

    내가 묻자 피오르가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렇게 무식한 데이트는 처음 봤다.”

    “아하하!”

    키슈가 까르르 웃었다. 내게는 이제 데이트라는 말을 부정할 기운도 없었다.

    “끄응, 됐거든요.”

    내가 연신 낑낑거리자 피오르가 내 가방을 대신 들어 마법진 위에 올려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할 틈도 없이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중얼거렸다.

    “마법으로 눈을 정화시켜 먹다니. 이걸 말도 못하게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쓸데없는 데다 재능을 낭비한다고 해야 할지…….”

    “그런 연구생이 더 많아져야 하는데. 그치?”

    키슈가 슬쩍 숟가락을 얹었다.

    “이동 준비나 해.”

    피오르가 대답 대신 턱짓을 했다.

    “네에~”

    키슈가 장난스레 맞받아치며 나를 마법진 안에 세웠다. 그리고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피오르도 손을 들고 마나를 모았다. 금세 짙은 기운이 마법진을 빛내기 시작했다.

    어라, 이 느낌은…….

    “자, 잠깐만요. 나 설마 또 기절하는 건…….”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눈앞이 까무룩 어두워졌다.

    누운 기억이 없는데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는 것은, 꼭 꿈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크레페에에!”

    몇 년은 못 만난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고 누군가가 날 껴안았다. 말할 것도 없이 갈레트였다.

    “그동안 잘 있었어? 애를 얼마나 굶겼으면 이렇게 픽픽 쓰러지고 말야. 세상에, 얼굴 홀쭉해진 거 봐!”

    갈레트가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처럼 호들갑을 떨며 내 뺨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나는 얼굴이 홀쭉해진 것 같다는 그의 말이 그냥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나한테도 눈이 있으니까.

    “갈레트, 크레페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잖아. 진정하게 놔둬.”

    엄마가 점잖게 말렸다. 내 방이 가족의 모습으로 북적거리는 모습이 너무 정겨워서 나는 뒤늦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엄마!”

    “잘 지냈니?”

    엄마가 싱긋 웃으며 날 살포시 안았다. 갈레트는 자기만 못 안게 한다며 입을 댓 발 내밀었다.

    카눌레가 슬쩍 갈레트의 옆구리를 찔렀다.

    “철 좀 들어라.”

    “넌 내 마음을 몰라.”

    “알고 싶지도 않거든?”

    여느 때처럼 만담 같은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뒷전으로 하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만 왔어요? 키슈 님은요?”

    “못 들었니? 다시 가셨어. 파타슈랑 브라우니를 데려오실 거래.”

    간만에 다 모이는 건가.

    몸 상태와는 별개로 기분이 조금 들떴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가려다가 카눌레와 눈이 마주쳤다.

    그동안에도 검술 연습을 열심히 한 듯 그는 반년 전보다 훨씬 튼튼해 보였다.

    아직 어린애인 것은 분명했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새삼스러운 감탄이 느껴졌다.

    “오빠 많이 컸구나.”

    “…네가 말하기엔 너무 건방진 소리 아니냐?”

    카눌레가 인상을 찡그리고 말했다. 나는 뒤늦게 내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크레페, 나는?”

    갈레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빤 그대로야.”

    갈레트는 내 대답을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킥킥 웃고는 밤이 깊었다며 갈레트와 카눌레를 먼저 돌려보냈다.

    그리고 탁자 앞에 있던 의자를 가져다가 내 침대 옆에 놓고 앉았다.

    “어땠어? 지내기는 괜찮아?”

    “네, 단걸 못 먹는 건 좀 힘들지만요.”

    엄마가 피식 웃었다.

    “그래, 갈레트에게 편지 쓴 것도 다 디저트 얘기밖에 없었다며?”

    “그걸 또 일렀대요?”

    “맨날 징징거려. 파타슈한테 네 소식 좀 알아봐 달라고 덤비질 않나.”

    안 봐도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나는 그 광경을 상상하며 킥킥거렸다. 파타슈한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웃긴 건 웃긴 거니까.

    “다른 문제는 없고?”

    “걱정 마세요. 잘 지내고 있으니… 윽.”

    밝게 대답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끼고 내가 신음을 내뱉었다.

    놀라 일어난 엄마가 내 등에 손을 올렸다.

    “왜 그래?”

    나는 몸을 웅크리고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배, 배탈 났나 봐요.”

    “뭐?”

    “눈을 너무 많이 퍼먹었나 봐…….”

    마법을 써서 눈을 깨끗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찬 걸 먹어서 배탈이 나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배를 잡고 끙끙거리자 잠시 말을 잃고 있던 엄마가 내 등을 쓸어주었다.

    “크레페, 아무리 단걸 먹고 싶어도 눈을 퍼먹으면 안 돼.”

    “그게 아니라… 끄응.”

    “그렇게 힘들면 말을 하지. 쿠키라도 보내줬을 텐데, 어휴.”

    엄마가 속상해하는 투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부정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건 아니지만, 그래주면 고맙겠네요.

    * * *

    “에이미! 진짜 보고 싶었어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에이미가 재빠르게 베이비 슈를 집어 내 입안에 쏙 넣어주었다.

    그녀를 껴안으려 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 멈춰서 열심히 입술을 오물거렸다.

    부드럽고 얇은 슈가 갈라지며 진한 커스터드가 혀에 닿았다. 그 감촉만으로도 점도가 얼마나 농밀한지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두 손으로 내 양쪽 뺨을 감쌌다.

    세상에, 이게 얼마만의……!

    어찌나 감격스러운지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크루아상의 페스트리처럼 얇고 담백한 반죽이 진득한 커스터드와 섞였다. 나는 입안에서 그 맛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최대한 천천히 씹었다.

    꿀꺽 삼키고 나서 눈을 뜨자 에이미가 흐뭇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오셨어요?”

    “에이미 솜씨는 변한 게 없네요.”

    “아가씨 덕분에 만드는 보람이 있다니까요.”

    에이미가 손을 털며 웃었다.

    그녀의 손에 묻어 있던 슈가 파우더가 부엌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옆에 서서 입을 벌렸다.

    “뭐 하세요?”

    “아, 아니… 설탕 가루 날리는 게 아까워서요.”

    내가 대답하자 에이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에이미는 그 표정 그대로 내게 타이르듯 말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눈은 퍼먹으면 안 돼요.”

    “…엄마가 벌써 말했나요?”

    에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무튼 이번에 카눌레 도련님 생일은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아가씨도 있으니 최대한 힘써보려고 하거든요.”

    “와아아!”

    나는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에이미가 뿌듯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작은 그릇에 베이비 슈를 몇 개 더 담아주었다.

    “자요, 이거 가져가요. 티타임 때는 다른 디저트를 준비할게요.”

    에이미가 처음 그릇을 내게 건네주었을 때, 베이비 슈는 고봉밥처럼 높이 쌓여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부엌이 있는 식당 건물을 다 나오기도 전에 슈의 개수가 반으로 줄었으니까.

    나는 슈크림 두 개를 한 번에 입에 넣고 조심히 건물을 나왔다.

    나머지는 아껴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저택과 도서관, 오른쪽으로 가면 정원, 왼쪽으로 가면 마구간과 기사 연무장이었다.

    겨우 몇 개월 나가 있었다고 집에서 용건 없이 빈둥거리는 게 어색해졌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도서관에 가기로 결심했다. 거기에서 책이라도 읽으며 슈를 마저 해치울 생각이었다.

    아마 갈레트 오빠도 거기 있겠지? 오빠랑 같이 먹으면 되겠다.

    어제 한바탕 눈이 내렸던 것과 달리 오늘은 그리 춥지 않았다.

    나는 느긋하게 슈를 집어 먹으며 걸음을 옮겼다.

    바닥은 쌓였던 눈이 녹아 질척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철벅거리는 걸음이 그리 좋은 느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발걸음도 재밌어졌다.

    그래, 내 나이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어.

    나는 헤헤 웃으며 눈 녹은 웅덩이에서 발을 마구 굴렀다. 혼자만 너무 즐기는 것 같아 아펠에게 조금 미안했다.

    도서관에 도착하자 갈레트가 이미 자리를 잡고 공부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옆에 슬쩍 다가가 슈를 내밀었다. 갈레트가 그제야 내 존재를 눈치챘다.

    “추운데 여기까지 나왔어?”

    갈레트가 내 케이프를 꽉 여며주었다.

    하지만 도서관은 사방이 막힌 데다 보온 파이프까지 작동되고 있었기에 춥기는커녕 오히려 조금 더울 지경이었다.

    밖에 있다가 막 들어와서 그런 거겠지만.

    나는 책상에 그릇을 올려놓고 까치발을 들어 갈레트가 읽고 있던 책을 보았다.

    “이게 뭐야?”

    “올해 학술지.”

    …괜히 물어봤나.

    정작 마탑에 들어간 건 난데 성장 속도가 너무 차이 나서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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