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45)화 (45/181)
  • 45화 

    * * *

    역시 어린애는 잘 자야 한다.

    내 감상은 그랬다. 겨우 하루 잠을 설쳤을 뿐인데 낮잠을 잔 후의 밤까지도 정신이 멍했으니까.

    나는 방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잠을 청할 생각으로 새 이불을 정리했다. 수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네에…….”

    방문을 두드릴 사람이라고 해봤자 키슈나 피오르뿐이었다. 나는 힘없이 대답하며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앞에 있는 것은 아펠이었다. 눈이 저절로 동그래졌다.

    “쉿. 들어가도 되지?”

    “으, 응.”

    하품이 쏙 들어갔다. 창문이 아니라 문으로 아펠이 들어온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펠은 내 방에 들어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맡긴 건?”

    어제,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새벽에 그가 맡긴 것은 하나뿐이었다.

    나를 신전의 서고로 안내해 간 강아지.

    겨우 열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아까 떨어진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까지만 해도 꼬질꼬질한 강아지가 저 위에 앉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새벽의 일이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신과의 대담이라니.

    그때 느꼈던 허탈감은 아직 선명했다. 차라리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아펠에게도, 가족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짧게만 대답했다.

    “도망갔어.”

    “아…….”

    “미안해.”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오늘은 어떻게 온 것인지, 나는 그에게 원래 묻고 싶었던 것을 모두 잊어버렸다. 캐묻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자고 싶었다.

    “아냐, 보통 동물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아펠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도 제단이나 디몬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아펠의 말을 듣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펠을 쳐다보았다. 아펠이 조금 당황했다.

    “무슨 일 있었어?”

    그러면서 그가 소매로 내 뺨을 훔쳤다. 나는 내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흑…….”

    깨닫고 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작게 흐느꼈다.

    아펠이 날 품에 안아주었다. 나는 그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피로감과 슬픔이 뒤섞인 괴이한 감정이 올라왔다. 신에게 소원을 말했으니 이제 더 이상 내 인생이 장난감처럼 소비되진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여긴 내 자리가 아니야.

    행복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너무 달콤해서 꿈같았다. 어느 날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마음 한구석에 항상 그런 불안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좋아해야 하는데.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아펠이 가만히 나를 다독였다. 그의 태도는 마치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평온했고, 한편으로는 결연했다.

    나를 따라 울 것 같은, 잠긴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괜찮아, 크레페. 다 괜찮을 거야. 나 여기 있잖아. 너도 내 옆에 있어줘.”

    나는 아펠이 준 손수건으로 팽, 코를 풀었다. 눈이 퉁퉁 부어서 그의 모습을 선명히 볼 수가 없었다.

    민망하고도 부끄러운 순간이었지만 물어볼 건 물어봐야겠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새벽에 데려온 강아지는 뭐고, 오늘은 어떻게 문으로 들어왔냐구.”

    질문을 마치고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어찌나 목 놓아 울었는지 아직도 목소리가 조금 먹먹하게 들렸다.

    “아아.”

    아펠이 할 말을 정리하는 듯 잠깐 텀을 두고 설명을 시작했다.

    “어제 황궁에 그 강아지가 돌아다니고 있었어. 어디로 들어온 건가 싶어 따라가니까 비밀 통로가 있더라. 마탑으로 이어지는 곳. 오늘은 거기로 온 거야.”

    아펠이 싱긋 웃었다. 새벽의 초조한 모습을 떠올리면 어쩐지 많은 걸 생략한 듯한 대답이었다.

    나는 입술을 샐쭉거리며 따져 물었다.

    “무릎 다친 건 뭔데?”

    “알고 보니 그 비밀 통로가 출입 금지더라고. 잘못하다간 내가 마탑에 들어오는 거나 네가 날 숨겨준 것까지 들킬 것 같아서 기사들을 피하느라 조금 실랑이가 있었어. 지금은 괜찮아.”

    “…….”

    나는 말없이 아펠의 무릎께를 내려다보았다.

    아펠이 보란 듯 다리를 움직였다. 긴 옷이라 상처는 보이지 않았지만 애당초 피가 조금 났을 뿐, 넘어져서 생긴 생채기였으니 나도 꼬투리를 잡진 않았다.

    “너는 왜 울었어?”

    아펠이 화살을 돌렸다. 다소 직설적인 물음에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됐어. 그냥 잠을 못 자서 그런 거야.”

    “…그래, 그럼.”

    누가 들어도 둘러대는 말이었는데 아펠은 그냥 그렇게만 대답했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옆에 있어줄 거라고 했지?”

    “응.”

    나는 대답만 듣고 배시시 웃었다.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딱히 돌아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크레페의 삶이 꿈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여기 있으니까, 내 옆에 있으니까, 그거면 됐다.

    그래, 풋사랑이면 어떻고 운명이면, 또 운명이 아니면 어떤가.

    “고마워.”

    내 짧은 말을 듣고 아펠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손을 들어 내 눈가를 문질렀다. 눈물 자국이 남아 있던 것 같았다.

    아펠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울지 마. 약속 꼭 지킬게, 크레페.”

    조금은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난 그가 말한 내 이름을 되새겼다.

    크레페.

    이제 그게 나다.

    【 겨울, 다시 】

    나는 짐을 챙기는 내내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탑에 들어온 지 거의 반년 만의 외출이니 들뜨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많이 들뜬 것 같군.”

    “그럼요! 집에 가는 게 얼마 만인데! 제가 성에 유폐된 것도 아니고, 그동안 갇혀서 공부만 하고 있느라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요?”

    신나서 묻지도 않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어린애를 가둬놓고 공부만 시켜서 미안하다.”

    문 앞에서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피오르가 슬쩍 말했다.

    “알면 됐어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답했다. 피오르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애가 유폐가 뭐냐. 하긴, 이해하는 속도도 그렇고 어휘력도 보통 애가 아니니까 그 나이에 여기 들어온 거지.”

    “기부금 때문이었다면서요.”

    “…….”

    피오르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너무 돌직구였나?

    “그리고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갈레트 오빠가 저보다 똑똑하거든요.”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 조기 입학했다는 그?”

    역시 오빠가 유명하긴 한가 보다.

    피오르는 잠깐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크레페의 선례가 있으니 이제 키슈 얘기에도 귀를 좀 기울여봐야 하는 건가?”

    듣자 하니 피오르가 키슈의 허풍에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체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새삼 그들의 역사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곧 생일이라던 게 갈레트냐?”

    피오르가 안경을 고치며 물었다.

    “아뇨, 이번 파티는 카눌레 오빠 생일 파티예요.”

    아니, 잠깐.

    이상한 점을 느낀 내가 옷을 개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저번에 저택에 오신 거 갈레트 오빠 생일 때였잖아요.”

    “애들한텐 관심 없다.”

    피오르가 뻔뻔하리만큼 짧게 말했다.

    그때 나와 피오르가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피오르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오늘 간다고 말 안 했나 보지?”

    “네, 아직…….”

    내가 어설프게 말을 흐렸다.

    피오르가 머리를 긁적이고 말했다.

    “위에서 기다리마.”

    그가 문을 닫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덧창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라고 말할 것도 없이, 창문을 두드린 것은 아펠이었다.

    그는 몇 개월 전에 비밀 통로를 발견했으나 그건 기숙사가 아닌 도서관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게 올 때는 아직 이 위에 있는 공간 이동 포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빨리 왔나 봐. 들킬 뻔했어.”

    너만 몰라, 바보야.

    아펠의 순수한 얼굴에 대고 차마 그렇게 말해 주진 못했다. 나는 그저 다행이라며 마주 웃어주고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고 나니 뒤늦게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얗게 된 황궁과 눈꽃 핀 숲. 소리 없이 내린 눈이 어느덧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피오르가 내 방을 두고 로얄층 어쩌고 했던 게 빈말은 아니었구나.

    “어디 가?”

    내가 가방을 챙기던 것을 본 아펠이 물었다.

    나는 뒤늦게 창문을 닫고 대답했다.

    “응. 곧 오빠 생일이라 한 번 돌아갈 거라고 했잖아. 그게 오늘이야.”

    “나 이거 가져왔는데.”

    아펠이 작은 소스 통을 들어 보여주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것을 건네받아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진한 초코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초코 시럽.

    나는 이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펠을 쳐다보았다. 아펠이 흐뭇하게 웃으며 다른 통을 흔들었다.

    “연유도 있어. 먹자, 빙수.”

    설탕과 초콜릿을 포함한 당류는 매우 고가의 품목에 속했다. 내가 마탑에 들어오고부터는 디저트를 먹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던 것이었다.

    몇 개월 만에 먹는 간식이다!

    물론 초코 시럽은 쌩으로 퍼먹어도 맛있는 음식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자인 아펠에게까지 그런 식습관을 권유할 순 없었다.

    “좋아, 잠깐만.”

    약속한 것도 있겠다,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책상에 매달려 열심히 마법진을 짜기 시작했다.

    성질의 결합 구조를 재구성하고 마나를 정화시킨 후 패턴을 정형화하는 복잡한 설명은 생략하고, 짧게 말하자면 물을 얼리는 마법진이었다.

    지난여름에는 아펠이 살얼음을 만들었으니, 이 정도면 적당히 얼릴 수 있겠지?

    “됐어. 한번 해볼래?”

    내가 이마에 붙은 앞머리를 소매로 쓸고 말했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아펠이 다가와 마법진 위에 물컵을 올려놓았다.

    곧 그의 눈빛이 가라앉은 것과 동시에 주위의 공기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컵에 금이 갔다. ‘적당히’가 아니라 물이 완전 꽁꽁 얼어버린 것이다.

    대체 마나가 얼마나 센 거야?

    “끄응, 이러면 계산을 다시 해야겠는데.”

    “꼭 얼음을 갈아서 만들어야 해? 가는 건 어떻게 갈 건데?”

    아펠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문제네.”

    나는 뒤늦게 문제점을 떠올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펠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내 팔을 잡고 창가로 이끌었다.

    “그냥 저거 먹으면 안 돼?”

    아펠이 바닥을 가리켰다.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잠깐 생각해야 했다.

    “설마, 눈을 퍼먹자구?”

    “응.”

    아펠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어린아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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