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44)화 (44/181)
  • 44화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툭 쳤다.

    “봤지? 운명은 바뀔 수 있어. 나는 그걸 수정된 미래라고 부르지.”

    “수정된 미래요?”

    문자가 다시 날갯짓하며 그녀의 대사를 그대로 받아 적었다. 그 밑에는 내 대사도 있었다.

    문자는 생물 같았고 종이는 공간 같았다. 책 안에 또 다른 세계가 있는 듯 신비한 광경이었다. 나는 그 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자, 여기까지. 스포일러당하면 재미없잖아.”

    그녀가 손바닥을 폈다. 책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 무한의 서고 어딘가에 그 책이 아직 있을 것임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물론 억지로 운명을 바꾸는 것도 쉽진 않아. 운명한테는 자신을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거든. 그걸 인간은 ‘운명적 이끌림’이라고 말하더라고. 네가 아펠에게 호감을 가진 것처럼 말이야.”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말본새가 다소 껄끄러웠다. 아무리 상대가 신이라고는 해도 숨기고 싶던 비밀이 모조리 털렸다는 게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물론 대놓고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지만.

    디몬은 내 표정이 안 보인다는 듯 태연히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나는 직접 사람들의 운명을 고쳐 쓸 수도 있지.”

    “사람들의 인생을 갖고 놀 수 있다고요?”

    “그렇지.”

    가시 돋친 말에도 그녀는 단박에 긍정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바꿔 쓰는 일은 거의 없어. 봐, 책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하나하나를 다 보고 있겠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면 다 너희들이 직접 쓴 미래라고 보면 돼.”

    하긴 그 덕분에 내가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정해진 운명을 바꾸고 엄마를 지켜낼 수 있었던 건가.

    나는 체념 반 안도 반의 한숨을 내쉬었다.

    디몬은 그런 내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다가 한마디 꺼냈다.

    “반대로 말하자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은 내가 직접 고쳐 쓴 일이라는 뜻이지.”

    “그래서, 저한테 이걸 왜 알려주시는 거예요?”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알고 싶지 않았다. 말 그대로 쓸데없는 정보였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호의 아닌 호의에 고맙기는커녕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웃었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일. 짐작 가는 거 없어?”

    그 질문을 들은 순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너한테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다고 했지?”

    “설마…….”

    나도 모르게 혼잣말했다.

    “맞아. 내가 널 이 세계로 불렀어.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 어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예측한 듯, 그녀가 답했다.

    “방관은 지루하고 통제는 무의미해. 나는 심심했지. 어지간한 사건으로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거든. 그래서 장난을 치기로 한 거야. 정해진 운명을 뒤흔들 수 있는 변수를 몇 가지 심어두는 거지. 이 서고와 예지몽과 너. 같은 것들.”

    그녀의 말은 마치 독백극처럼 이어졌다.

    이 상황에 넋이 나가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그 말인즉, 나는 그냥 어쩌다 재수 없게 선발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재미있는 소설’을 써줄 사람으로 말이다.

    지금 이 사달이 전부 신이라는 작자의 농간으로 생긴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 내 인생에 제목을 붙인다면 『이런 개떡 같은 신이 있나』 정도 될까.

    “왜, 책 빙의물 너도 재밌게 봤었잖아. 다음엔 회귀물을 써볼까? 어떻게 생각해? 대한민국에서 살던 너로 돌아가 볼래?”

    “지금 장난해요?”

    “원래 인생이라는 건 신이 재미로 쓴 소설이란다.”

    디몬은 순수하게 재미있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예쁘면 단가! 사람 인생을 그렇게 장난감처럼……!”

    “아, 이건 내 진짜 모습이 아니야. 나는 네가 제일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보이거든. 제일 보고 싶었던 게 가족도 아펠도 아니고 원래의 크레페였다니. 얼굴을 꽤나 밝히는구나.”

    “신경 꺼요!”

    발끈한 나머지 신을 상대로 짜증을 내버렸다.

    “너무 화내지 마. 미안한 짓을 했으니 대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게.”

    에?

    나는 방금까지 화내던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램프의 요정 같은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신이 직접 소원을 들어준다고 제안하다니.

    설마 귀로만 듣고 ‘자, 들어줬지?’ 하는 허무한 결론은 아니겠지?

    “왜 그렇게까지 해주는 건데요?”

    나는 의심스러워하는 눈으로 디몬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변수를 늘리기 위해서지.”

    그녀가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

    신의 자비가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했다면 절대 안 믿었을 거다. 하지만 변수를, 자신의 흥미를 위해서라는 대답은 오히려 신뢰가 갔다.

    게다가 운명을 바꾸는 건 내가 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바람과 상관없이 내가 신의 책 빙의 실험에 휘말렸다는 건 여전히 탐탁잖았으나,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의 가치가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그녀의 표정은 태연했기에 그 이상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도 힘들었다. 소득이 있다면 그녀를 바라보는 시간 동안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은 것뿐이라고 해야 할까.

    …언니, 사랑해요.

    아,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잠깐 홀린 듯 말을 잃었던 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곧 그 제의에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슨 소원을 빌든, 디몬이 내 운명의 책인지 신탁의 서인지 하는 것을 고쳐 적기만 하면 무효가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첫 소원을 말했다.

    “그럼 앞으로는 내 운명으로 장난치지 마세요. 아니,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이라도!”

    “그래, 앞으로는.”

    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째려보았다. 디몬의 대답이 벌써 ‘장난’을 몇 번 쳤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과거를 추궁할 수도 없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두 번째 소원을 말할 차례였다.

    음, 두 번째… 두 번째 소원은…….

    “다시 한국에 돌려보내 달라고 하지 그래? 아, 첫 번째 소원이랑 모순돼서 안 되겠구나?”

    내가 말하기도 전에 디몬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조잘거렸다.

    나는 어떻게든 소원을 떠올리려고 끙끙댔지만, 그게 그렇게 갑자기 생각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저 말을 듣자 하니 ‘첫 번째 소원이랑 모순된다’며 웬만한 소원은 다 거절해 버릴 것도 같고…….

    쳇, 순서를 잘못 정했나.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내 운명을 나에게 맞춰 재설계할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렸다고 생각하자 순간 배가 아팠다.

    물론 첫 번째 소원을 물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나중에 얘기할래?”

    디몬이 선심 쓰듯 제안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았다. 한국 이야기를 듣자 묻고 싶은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혹시…….”

    “응.”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엄마 얘기 알려줄 수 있어요?”

    “수플레 슈 살레 루아?”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한국에 혼자 남아 있는 엄마요.”

    내게는 꺼내기 힘든 질문이었으나, 그녀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소원이니?”

    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와 달리 그녀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세계에서 넌 이미 없는 사람이야.”

    듣긴 했으나 의미를 바로 파악하기는 어려운 말이었다.

    “제가 죽었다는 뜻이에요?”

    “아니, 네 존재를 지웠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 된 거지. 네가 기억하는 세계는 없어. 넌 태어나지도 않았고.”

    “…….”

    “네 엄마였던 여자는 지금 네가 아닌 다른 딸을 낳았고,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단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나는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엄마의 말버릇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 때문에 불행해졌다는 얘기였다. 그녀는 술만 마시면 자신의 불행이 모두 내게서 비롯됐다는 듯 말하곤 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 때문에 산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나를 낳아준 사람이었고, 날 키워준 사람이었으며, 싫든 좋든 내가 의지할 수밖에 없던 사람이었다.

    “잘됐네요.”

    머릿속은 복잡했으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어차피 돌아갈 생각도 안 한 마당에 내 존재가 처음부터 없는 세상이 됐다니 차라리 개운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조금 웃었다.

    “세 번째 소원은?”

    “나중에 얘기할게요. 그럴 수 있다면요.”

    “편한 대로 해.”

    디몬이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나는 다시 내 방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창문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덧문을 열자 시간은 이미 아침이었고 비도 그쳐 있었다. 개운한 공기가 느껴졌다.

    문득 내 침대를 쳐다보았다. 꿈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지만 침대에는 이불이 없었다.

    * * *

    “하암…….”

    하품을 하고 내 눈을 비볐다. 열띤 강의를 하고 있던 피오르가 펜을 놓고 헛기침을 했다.

    “혹시 새벽 일 때문에 못 잤나?”

    “네? 아…….”

    피오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새벽 일’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것도 맞는 말이었기에 곧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자 피오르는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 일은 대충 해결됐어. 황궁에 보고해야 할 일이 생겨서 탑에까지 비상이 걸렸었는데, 이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선생님, 신탁의 서가 뭐예요?”

    “…황자에게서 들었나?”

    거짓말은 하기 싫어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피오르는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마탑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인생 서고에 나열되어 있다는 소예언서지. 자세한 이야기는 기밀이야.”

    그렇구나.

    대충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소득은 없었지만, 어차피 피오르가 아는 얘기보다는 내가 아는 얘기가 더 많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강의에 집중했다. 그러나 잠을 못 자서 그런지 그러기가 쉽진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자 나는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잘 잔 것 같군.”

    “에, 아, 네.”

    비몽사몽간에 눈을 뜨고 입가를 소매로 문질렀다.

    피오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날 먼저 깨운 것도, 혼내지도 않는 걸 보니 그냥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피곤해하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괜스레 민망해서 교재를 쳐다보았다. 마나를 증폭시키는 마법진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나는 슬쩍 왼손을 들고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 팔찌, 효과 있는 거 맞아요?”

    피오르가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거 아직 안 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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