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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43)화 (43/181)
  • 43화 

    “츄!”

    녀석이 난데없이 재채기를 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이구, 미안. 추울 텐데.”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 녀석을 내 침대 위에 올렸다.

    나는 창문을 닫고 수건을 가져다가 몸의 물기를 털어주었다. 녀석의 몸은 흙먼지가 묻은 것처럼 회색과 갈색으로 얼룩덜룩했지만 원래는 흰 털인 것 같았다.

    작은 얼굴과 등을 먼저 닦던 나는 강아지의 뒷다리를 보고 잠깐 손을 멈췄다.

    잠깐. 이 녀석이 투명해진 것 같았는데.

    “끄응, 아무래도 나 요즘 몸이 허한가 보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고 다시 수건을 들었다. 그때 문 너머의 복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크레페, 자나?”

    피오르의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을 돌아보았다.

    “열고 들어간다?”

    아펠의 부탁은 이 녀석을 잠깐 맡아달라는 것뿐이었지만 나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들키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크레페?”

    나는 재빨리 침대로 들어와 강아지를 끌어안고는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당겼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온 피오르의 기척이 침대 바로 옆에서 느껴지자 나는 한 박자 늦게 눈을 떴다.

    “벌써 아침이에요……? 선생님이 제 방에는 왜…….”

    “아니,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 갑자기 미안하군.”

    조그마하고 따끈따끈한 것이 내 배 옆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불 속에서 한 손으로 녀석의 머리를 꾹 누르고 시치미를 뗐다.

    “뭘요?”

    “유령이 여기 왔지?”

    “선생님도 참, 이 세상에 유령이 어디 있어요.”

    “…….”

    농담처럼 넘겨주길 바라고 한 얘기였지만, 피오르는 그 대답을 더 수상쩍게 여긴 모양이었다.

    그가 창가에 다가가 창틀에 손을 올려놓았다. 방금 전까지 열려 있었기에 아직 빗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래, 유령 말고 아펠 황자가 왔겠지.”

    누군가의 입에서 ‘아펠’이라는 이름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나는 이게 예삿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누구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숨겨주지 마라.”

    “별로…….”

    내가 끝까지 털어놓을 기색을 보이지 않자 피오르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단지 내 침대 옆에 다가와 의심스럽게 볼록한 것을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피오르가 내게 일언반구 없이 이불을 반쯤 걷었다. 하지만 부자연스럽게 볼록하던 것은 내 손이었다.

    “…….”

    나도 내 눈을 의심했다. 나는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젖은 수건이 깔려 있을 뿐 강아지가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피오르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긴 사람이 그렇게 작을 리가 없는데……. 의심해서 미안하다.”

    “아, 아니에요.”

    “수업 때 보자.”

    자세한 설명도 없이 피오르가 내 방을 나갔다.

    방이 완전히 조용해진 후, 나는 슬쩍 손을 내려 보았다. 수건 위, 하얀 강아지가 있던 곳에.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분명 만져지는 게 있었다.

    “너, 너야?”

    “킁.”

    콧바람 소리와 거의 동시에 녀석의 모습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녀석이 코를 씰룩이다가 재채기를 하고는 갑자기 내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계속됐다. 누군가 공간 이동 마법을 쓴 듯 주변 풍경이 바뀐 것이다.

    타다 남은 양초 수십 개. 압도될 정도로 높은 천장. 웅장한 고대 양식의 기둥.

    나는 마탑 지하에 있던 거대한 예배당 가운데, 제단에 올라 있었다.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흑마법으로 소환당한 마왕이 된 기분이었다. 물론 마왕은 이불을 안고 소환되진 않을 테지만.

    조심스레 이불을 걷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적막하고 어떤 인기척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와 아펠이 들어왔던 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서, 설마 갇혔…….”

    뒤늦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츄!”

    “끄악! 뭐, 뭐야! 너도 왔어?”

    이불이 꿈틀꿈틀하더니 하얀 강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채기를 한 녀석이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나와 달리 놀라는 기색도 없는 걸 보니, 혹시 날 여기로 데려온 게 이 녀석 짓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가볍게 제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발톱이 매끈한 돌에 부딪치며 타탓, 하는 소리가 났다. 공간이 워낙 넓고 조용해서 그 소리마저도 크게 느껴졌다.

    그러고서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저를 따라오라는 듯이.

    “따라오라는 거야?”

    설마하면서도 물었다. 녀석이 맞장구를 치듯 짖었다.

    나는 제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동굴 같은 지하 공간이었지만 바닥에는 굴러가는 돌멩이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매끈했다.

    또렷한 보라색 눈동자와 자다 일어난 듯 부스스한 금발이 선명하게 비쳤다.

    조심스럽게 제단에서 내려갔다.

    딱딱하고 서늘한 기운이 맨발에 직통으로 느껴졌다. 어색한 기분에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훙!”

    내가 자신을 따라오려는 기색을 보이자, 강아지가 콧바람을 내뿜고 졸래졸래 걸음을 옮겼다.

    나는 씰룩이는 녀석의 엉덩이를 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강아지가 닫혀 있는 문을 홀로그램처럼 뚫고 들어간 것이다.

    손잡이도 없는, 견고하고 거대한 문으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 없는 광경이었지만 어차피 달리 나갈 만한 곳도 안 보였다.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그 문 앞에 서서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손뿐 아니라 몸 전체가 빨려드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환한 빛이 나를 감쌌다.

    “윽.”

    눈이 부셔서 작게 신음했다.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뜨자 나는 어느새 온통 흰 공간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곳은 바닥과 벽과 천장이 모두 흰색이었고, 거대한 책장이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책장도 흰색이라 어디까지가 바닥이고 천장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마법등을 많이 달아서 환해진 것과는 달랐다.

    일반적인 장소라면 내 그림자 정도는 보였을 테니까.

    바닥을 내려다보자 나는 마치 공중에 뜬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물론이고 책장에도 그림자 따위는 없었다. 꼭 꿈속이나 다른 차원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생 서고. 아니면 신탁의 서. 들어봤니?”

    “누, 누구세요?”

    나는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책장밖에 없었다. 모든 곳이 복사, 붙여 넣기를 반복한 것처럼 똑같은 공간이었다. 당연히 인기척도 없었다.

    “앞으로 와.”

    낯선 여자의 목소리는 위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 뒤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꿈에서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기도 했고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목소리가 말하는 앞이라는 게 어딘지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귀신에게 홀린 것 같은 기분으로 걸음을 뗐다. 책장 수 개를 지나자 눈에 익은 강아지가 반가운 듯 꼬리를 치고 있었다.

    내가 가까워지자 녀석은 책장을 끼고 돌았다. 녀석을 따라 코너를 돌자 작은 티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여자도.

    나는 그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스무 살 정도로 보였는데, 내가 그간 봤던 어떤 연예인이나, 심지어는 그림과 조각, 그 어떤 예술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녀의 머리는 은으로 만든 체에 햇살을 내린 듯 화려한 금빛이었고, 풍성한 머리칼은 작은 움직임에도 물결쳤다.

    피부는 혈색이 도는 진줏빛에 눈은 최고의 장인이 가공한 자수정처럼 광택이 나는 투명한 보라색이었다.

    눈매는 사납지도 순하지도 않았고, 콧대는 가늘면서 반듯했다.

    미의 신이라는 호들갑스러운 별명이 이렇게 잘 어울릴 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경국지색. 절세미인.

    그 어떤 칭호도 그 미모를 다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그 묘사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크레페……?”

    아니, 그건 내 이름이잖아.

    문득 입 밖으로 튀어 나간 이름이었다.

    나는 뒤늦게 부끄러워져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보이는구나.”

    그녀가 살짝 웃었다. 그러잖아도 인간 같지 않았던 미모가 더욱 빛나는 듯 보였다.

    나는 황새를 앞에 둔 개구리처럼 기가 눌렸다.

    “누구세요?”

    “디몬.”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딱 한 번 들어본 이름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마법사들이 모시는, 마탑의 신.

    “신이세요?”

    신에게 할 수 있는 최고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묻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녀가 발치까지 온 강아지를 들어 품에 안고서 말했다.

    “너한텐 디몬보다 익숙한 이름이 있겠지. 디저트몬스터라고.”

    “네? 뭣, 아니, 잠깐만요, 저기…….”

    순간 머리가 터질 것처럼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혼자 온갖 생쇼를 하다가 겨우겨우 한마디 꺼냈다.

    “작가님이세요?”

    그녀는 그렇다거나 아니라고 하는 대신 싱긋 웃었다.

    “앉아서 얘기할까?”

    나는 쭈뼛거리며 그녀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충격을 받거나 상황을 따져 묻거나 하는 행동 이전에, 당장 그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부터가 고민이었다.

    신님? 디몬 님?

    “디몬 님으로 충분해.”

    그녀는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대답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강아지가 그녀의 무릎에서 내려가 광활한 서재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나는 녀석의 토실한 궁뎅이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 책이 한 권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손님을 부른 사람답지 않게 갑자기 그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대체 날 왜 부른 거야?

    “너한테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

    이번에도 내 생각을 읽은 듯한 답변이었다.

    “읽은 거지, 여기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녀의 손에 들린 책 제목을 살폈다.

    “포동포동한 여주는 인기가 없나요?”

    “인기 있는 것 같은데?”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책을 내려놓았다. 펼쳐져 있는 구절에는 내 생각과 행동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이, 이게 뭐예요?”

    “소예언서. 아니면 신탁의 서. 네 과거와 미래의 기록. 운명.”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그녀의 말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되물었다.

    “내 미래가 적힌 책이라고요?”

    “역시 똑똑하네.”

    그녀가 싱긋 웃고 책의 구절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그녀가 앞으로 할 말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운명이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운명이 완전히 고정된 건 아니야.”

    그녀의 말이 끝나자 책 안의 문자가 나비처럼 날갯짓하며 페이지를 누볐다.

    잠시 기다리자 글자가 완전히 바뀌었다.

    [하지만 운명이 완전히 고정된 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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