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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40)화 (40/181)

40화 

“키슈한테 그 아기인지 애기인지를 마탑에서 만나고 싶다고 해. 그럼 네가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들어주마.”

“정말요?”

내 목소리가 대번에 밝아졌다. 브라우니도 만나고 마법도 배울 수 있다면 일석이조였다. 그의 말이 진심이라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그러나 피오르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정식으로 마탑에 들어와라. 키슈 말고, 내 밑에.”

“…저 아직 어린앤 거 알아요?”

“문제 있나?”

피오르가 뻔뻔하게 되물었다. 아무래도 이 세계엔 아동 권리 조약 같은 게 아직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짧게 대답했다.

“생각은 해볼게요.”

생각만.

* * *

“브라우니이이!”

“삐유!”

브라우니의 모습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나는 이산가족 상봉하듯 브라우니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갔다. 브라우니도 공중을 오도도 달려 내 품에 안겼다.

포근하고 따끈따끈한 감촉! 이게 바로 힐링이로구나!

“나 기억해?”

“삐!”

“나 많이 보고 싶었어?”

“쀼!”

“울거나 하진 않았지?”

“삐이!”

여전히 말이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헷갈리는 반응이었다. 물론 어느 쪽이든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우리 브라우니가 너무 귀엽다는 거지!

나는 브라우니의 등에 뺨을 문대며 오랜만의 재회를 만끽했다.

“어때요, 건강하죠?”

키슈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곁에는 오랜만에 보는 파타슈도 함께였다.

나는 뒤늦게 민망해져 브라우니를 내려놓았다.

“크흠. 파타슈 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크레페 님도요.”

파타슈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풀밭에서 마구 굴러다니던 브라우니가 금세 파타슈의 발치에 다가가 애교를 부렸다.

브라우니나 파타슈나 오랜만에 보기는 매한가지였는데 내가 너무 다르게 반응했던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함을 잊으려 자리에 쪼그려 앉아서 다시 브라우니를 불렀다.

하지만 브라우니는 파타슈 옆에서 날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 녀석, 그새 파타슈랑 많이 친해졌나 본데?

“여기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안전할 거예요. 저는 일이 남아서 이따 다시 올게요.”

키슈가 짧게 말하곤 등을 돌려 마탑으로 향했다.

이곳은 마탑 뒤에 있는 숲이었다. 파타슈를 마탑 건물 안에 들여보낼 수도, 페가수스가 다른 사람 눈에 띄어서도 안 됐기 때문에 여기 숲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원래 외부인은 이 숲에 들어오는 것도 금지였지만, 파타슈는 나중에 마탑에 들어올 키슈의 가족이라서 어느 정도 눈감아 주는 모양이었다.

파타슈가 몇 걸음 다가와 나를 따라 바닥에 앉았다. 브라우니가 나와 파타슈 중 누구에게 갈지 갈등하는 듯 가운데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여기, 지내기는 괜차나요?”

파타슈가 물었다. 여전히 아이 티가 나는 발음이었다.

불과 몇 주일 못 만났을 뿐이지만, 그 전까진 거의 매일 만나던 사이였기 때문에 그 말투를 듣자 새삼 향수가 느껴졌다.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디저트를 못 먹는다는 것만 빼면.

파타슈는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일 테니 뒷말은 삼켰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잘 지내길래 연락 한 번 안 하냐고 하던데요.”

“누가요?”

“오빠들이요.”

파타슈에게 갑자기 오빠가 생긴 게 아니라면, 그가 말하는 오빠는 분명 내 오빠일 것이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적응하느라 바빠서 편지 쓰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오빠들이랑 연락해요?”

“작은 쪽이 틈만 나면 저한테 뭐라 해서요.”

“작은 쪽?”

“키 작은 쪽이요.”

갈레트 오빠 말이구나.

본인도 한참 어리면서 갈레트에게 저런 호칭을 쓰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갈레트가 한결같이 그를 적대하고 있었으니 더 욕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키슈 님이랑 편지하면서 가끔 제 얘기도 하나 바요. 저번엔 내가 크레페 님이랑 몰래 연락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뭐라 했다고 하더라구요, 바보가.”

파타슈가 쯧, 혀를 찼다.

음, 파타슈 나이에 바보라는 말은 최악의 욕이 아닐까.

나는 헛기침을 하고 정중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빠가 절 너무 아껴서 그래요. 그러니 오빠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아, 저야말로 크레페 님 앞에서 나쁜 얘길 해서…….”

분위기가 두 배는 어색해졌다. 눈앞에서 풀밭 위를 뒹굴고 있는 브라우니가 이 분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삐?”

그때 브라우니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두운 숲속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래?”

“삐!”

브라우니는 꼭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았다. 녀석이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숲으로 들어가려 했다.

“안 돼!”

“쀼?”

나는 급하게 브라우니를 붙잡았다.

이곳이 수도 근처긴 해도 황궁 반대쪽의 숲은 완전히 수해였다. 나무가 빽빽해서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곳. 깊이 들어가면 야생 동물이나 몬스터 같은 게 나올 수도 있었다.

“크레페 님, 저기.”

내가 브라우니와 씨름하고 있는 사이 파타슈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피오르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

후다닥 브라우니를 껴안고 아무 일 없는 척 시치미를 뗐다. 파타슈가 나를 등 뒤에 숨겼다.

그래봤자 키가 비슷해서 숨겨진 기분도 안 들었지만, 마음만은 감동이구나.

“아저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오랜만이구나.”

말하는 걸 보니 피오르와 파타슈는 구면인 것 같았다.

피오르는 파타슈와 짧은 안부만 주고받고 곧바로 내게 물었다.

“그게 브라우니지?”

“네에.”

내 대답을 들은 피오르가 다가왔다. 그러더니 품에서 철사처럼 얇은 팔찌를 꺼낸 후 그것을 브라우니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브라우니가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곧 팔찌 위에 괴상한 문자 같은 것이 떠올랐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문자가 사라진 후 피오르가 내게 그 팔찌를 내밀었다.

“받아. 약속한 물건이다.”

피오르와 약속 아닌 약속을 한 건 하나뿐이었다.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줄 테니 정식으로 제 소속이 되어달라고 했던 것.

나는 곧바로 그것을 받는 대신 물었다.

“뇌물이에요? 전 아직 대답 안 한 것 같은데.”

“어차피 이것도 실험작이야. 네가 내 밑에 들어온다고 하면 제대로 연구해서 만들어주마.”

키슈가 돌아오기 전에 몸을 피할 생각인 듯, 피오르는 내 왼쪽 손목에 멋대로 그것을 채우고 다시 마탑으로 돌아갔다.

이걸로 어떻게 마법을 쓴다는 거지?

나는 팔찌를 찬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달라진 점을 느끼진 못했다.

다시 둘만 남자 파타슈가 뒤늦게 질문했다.

“말했어요?”

“들켰어요.”

“…….”

망설임 없는 대답에 파타슈가 말을 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슈가 돌아와서 파타슈와 브라우니를 다시 데려갔다.

브라우니는 파타슈의 품에 안겨 있는 내내 숲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원하는 만큼 마음껏 달리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숲에서 이상한 거라도 봤나?

나는 잠깐 고민했지만 어차피 답을 알 방법은 없으니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후 나는 피오르와 같이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파타슈를 바래다주고 온 키슈가 뒤늦게 내 손목에 끼워진 얇은 팔찌를 발견했다.

“어라, 그거 혹시…….”

키슈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피오르에게 눈을 부라렸다. 놀랄 만한 상황 판단 속도는 둘째 치고, 그녀의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이 팔찌가 보통 물건은 아닌 듯했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열심히 수프를 떠먹었다.

키슈도 보는 눈이 있어서인지 대놓고 피오르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얘길 나눌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크레페 님. 저는 이놈이랑 얘기를 해야겠으니 부디 꼬임에 넘어가지 말고 제 밑으로 오세요. 알겠죠?”

“생각해 볼게요.”

나는 피오르에게 했던 대답을 되풀이했다.

키슈는 충분히 만족했다는 듯 생긋 웃고 피오르의 귀를 잡아당겼다. 피오르가 아야,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끌려 나갔다.

나는 그들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기숙사로 이어지는 복도가 평소보다 선선하다 했더니 어느덧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덧창문을 닫았다.

기다렸다는 듯 천둥이 내리치며 빗소리가 커졌다. 낮아진 기온 때문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왼쪽 손목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팔찌라고 해봤자 하나도 예쁘지 않은, 그냥 철사처럼 가는 금속이었다.

그것은 예쁘기는커녕 공예품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내 통통한 손목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피오르의 안목에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이건 뭐 비엔나소시지도 아니고.

“…….”

혼자 한 생각에 셀프 충격을 받아버렸다.

나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잠옷 원피스의 긴 소매로 팔찌를 덮었다. 마침 유령의 기척이 느껴졌다.

피부로 느껴지는 습기와 어두운 조명, 구름에 가려진 햇빛, 돌로 만들어진 탑과 소용돌이 모양의 계단까지.

유령이 나오기 딱 좋은 배경이긴 하네.

나는 피식 웃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이제 마탑에 떠도는 유령 소문이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똑똑.

빗소리 사이에서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4층 창문 밖의 방문자. 어느 괴담에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였지만 나는 놀라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안녕!”

아펠이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했다.

“왔어?”

이제 그의 예고 없는 방문에도 조금 익숙해졌다. 몇 번 겪어보고 나니 위층에서 풍겨오는 그의 마나가 더욱 선명히 느껴진 탓이었다.

내가 웃는 낯으로 인사하자 아펠은 없는 꼬리라도 흔들 듯 밝은 얼굴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짙은 마나를 풍기면서 대체 어떻게 비밀스럽게 움직이려고 한 건지 모르겠다니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삼켰다. 마법사들도 모르는 척해 주고 있으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들어가도 돼? 나…….”

쿠르릉.

천둥소리가 아펠의 말을 끊었다.

창틀에 쪼그려 앉은 아펠이 입을 다물고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창틀이 빗물에 젖어 있었다. 젖은 채로 방에 들어와도 될까 고민하는 게 분명했다.

애기가 별걸 다 걱정하네!

나는 아펠의 팔을 잡고 창틀에서 끌어 내렸다. 그러고 서둘러 덧문을 닫은 후 아펠에게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짧은 길이었지만 그의 머리카락은 이미 젖어 있었다.

“감기 걸리면 어떡해. 비 그치면 오지.”

“걱정해 주는 거야?”

아펠이 머리를 털다 말고 살포시 웃었다. 그의 회색 머리카락에 맺힌 빗물은 은색처럼 투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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