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아펠이 내 팔을 끌고 서둘러 달렸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그는 내 방 창문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미안한 듯 웃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펠의 멱살을 잡을 듯 소리쳤다.
“야! 마법 쓸 줄 알면 안다고 말했어야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마법 아니야. 마나. 난 들키기 전에 가볼게. 다음에 봐.”
“아니, 잠깐…….”
끝까지 다급하게 말한 아펠이 내 방 창틀을 밟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아펠은 내가 하려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모습을 감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층에 있는 이동 포트에 짙은 마나가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 사람들, 네 얘기 벌써 다 알고 있는데.”
나는 그에게 하려 했던 말을 뒤늦게 중얼거렸다.
【 유령과의 탐험 놀이 】
“어제도 유령 왔었죠? 데이트는 잘 했어요?”
의자 등받이를 껴안고 앉은 키슈가 생글거리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뭐라고도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내 표정, 분명히 이상하겠지?
본의 아니게 아펠을 속이게 된 기분이었다.
마탑에 있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자신이 이미 유명 인사라는 걸 알면 아펠이 뭐라고 하려나.
“아무튼 크레페 님 장난 아니네요. ‘마성의 여자!’라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인기가 많으니 마법 서약도 하기 아깝겠어요. 아니면 반대로, 서약하고 그 핑계로 평생 자유연애 하실래요?”
키슈는 마법 서약 때문에 결혼을 못 한다고 했다. 연애도 썸도 아닌 이런 싱거운 관계를 저렇게 즐겁게 얘기하는 것도, 그 반작용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풀어온 문제집을 내밀며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불순한 의도로 서약하면 신이 노하시겠네요.”
“에이, 크레페 님 정도의 재능이면 디몬 님도 쌍수 들고 환영하실걸요?”
“디몬 님이요?”
“아, 얘기 안 했던가요? 마법사들 사이에선 신을 그렇게 불러요.”
디몬이라니. 악마 같은 이름이네.
디몬인지 데몬인지 하는 발음 때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세계에선 이해받을 수 없는, 천인공노할 생각이겠지.
나는 태연히 화제를 돌렸다.
“아펠… 아니, 그 유령은 왜 그렇게 마탑을 왔다 갔다 하는 거래요?”
“황궁에서 그분이 마법 배우는 걸 반대하는 것 같아요. 가끔씩 와서 마법책 같은 걸 빌려가고 그러더라고요.”
키슈가 내가 풀어온 문제집을 펼치며 가볍게 답했다.
“반대한다고요?”
“이상하죠? 슈트루델국이 마법사를 핍박하는 것도 아니고,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나쁜 것도 아닌데.”
이상하긴 하다.
나는 혼자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키슈가 내 숙제를 마저 확인하는 동안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 원작에서도 아펠의 어머니는 그가 마법을 배우는 걸 반대한다고 했었다. 역시 이유는 안 나와 있었지만.
“정말 재능이 아깝다니까요.”
내가 더 말하기도 전에 키슈가 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크레페 님도 느꼈죠? 유령의 마나.”
키슈가 내게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펠의 마나는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마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느낌이었다. 특히 다른 것은 그 마나의 농도였다.
“적어도 두세 명은 달라붙어야 하는 공간 이동 포트를 어린애 혼자 작동시키시다니. 처음엔 정말 유령인 줄 알았다고요.”
키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포트와 리시버의 도움이 있다고 해도 어린아이 혼자 공간 이동을 마구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요? 괴물이 따로 없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어디 기죽어서 살겠냐고.”
키슈가 혼잣말하듯 툴툴거렸다.
뒤늦게 안 사실에 따르면, 내가 쉬제트 백작가에서 마탑으로 공간 이동했을 때 기절했던 건 여러 사람의 마나가 섞이면서 생긴 부작용 같은 거라고 했다.
마법사 두세 명이 달라붙어야 가능한 공간 이동을 아펠 혼자서 해냈으니 그녀의 툴툴거림이 이해될 만했다.
그때 타이밍 좋게 피오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가 뭐가 평범해? 지금 이 마탑에서 마법 서약을 한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걸 기억해야지.”
피오르가 품에 안고 온 교재들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 말에 키슈가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피오르 넌 무서워서 서약 안 한 거잖아.”
무서워?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피오르가 내 눈치를 보고 짧게 헛기침을 했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피오르가 민망해하는 것 같았기에, 나는 그를 위해 화제를 돌려주었다.
“그러게요. 세상엔 천재가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러자 키슈가 문제집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크레페 님도! 남 얘기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네?”
“마법 수식 문제 다 맞혔잖아요! 마나 지식은 다 틀렸지만.”
마나 지식을 다 틀렸다고?
곱하기 나누기를 맞힌 건 당연한 거고, 나는 그녀가 덧붙인 말에 더 신경이 쓰여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피오르가 담담한 말투로 키슈를 나무랐다.
“허풍 좀 그만 치랬지. 틀린 게 없다니.”
“허풍 아니라니까!”
키슈가 억울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피오르에게 문제집을 내밀었다.
피오르는 담담히 그것을 받아 훑어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에 놀라워하는 기색이 번졌다.
“어때, 진짜지?”
키슈가 제 일처럼 우쭐거렸다.
피오르는 문제집을 덮고 오늘 몫으로 들고 온 교재를 펼쳐 내 앞에 놓았다.
“이것도 풀 수 있나?”
그가 펼친 부분에는 밤새 풀었던 것보다 어려운 문제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중학교 과정이었다.
나는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네.”
“이건?”
피오르가 펼친 다음 부분, 다음 교재도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일차 방정식, 이차 방정식, 인수분해, 비례식과 원주율을 이용한 마법진 크기 구하기.
응용문제가 낯설 뿐, 기본적인 개념은 모두 배운 적 있는 것들이었다.
잘못하면 다시 더하기 빼기만 주구장창 풀어야 할 지경이었기에 나는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선생님, 시간낭비하지 않을게요. 재작년에 아빠한테 연락 받으셨다고 했죠? 마법 공식을 이해한 아이가 있다고.”
내가 피오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맺었다.
“그거, 오빠가 아니라 저였어요.”
“…….”
“뭐가요? 뭔데? 언제요? 그랬어?”
키슈는 무슨 얘기냐면서 나와 피오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슬슬 정신없다고 느껴질 때쯤, 피오르가 키슈에게 말했다.
“크레페는 내가 키워야겠다.”
“뭐? 무슨 소리야, 크레페 님은 내가 찜해 놨는데!”
잠깐만요, 두 분. 단어 선택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나처럼 마나를 아예 운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마법 수식을 풀고 이해하는 실력은 수준급인 경우는 그들도 처음 겪어본다고 했다.
그리고 이 미증유의 사태에 날 어떤 식으로 교육시켜야 할지,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대립 중이었다.
“못하는 걸 계속 피하면 어떡해? 마나만 다룰 줄 알게 되면 크레페 님은 곧바로 대마법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장점을 극대화시킬 생각을 해야지. 마법진을 개발하고 마법 도구를 만드는 게 적성에 맞는 길이야.”
키슈의 전공이 브라우니를 중심으로 한 연구인 것처럼 피오르의 전공은 마법진이라고 했다. 인력난이라더니, 두 사람이 나 대신 내 진로를 고민해 주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논쟁이 안 들리는 척하며 책장이나 넘기고 있었다.
어차피 남 일이니까.
“크레페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뭐가 더 배우고 싶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들의 질문이 날 향했다.
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려고요. 여기, 문제 다 풀었어요.”
“…….”
피오르가 내 앞에 와서 앉았다. 그가 채점하는 동안 나는 키슈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파타슈 님은 잘 있어요?”
사실 진짜 묻고 싶었던 건 브라우니의 안부였지만 나는 그렇게 돌려 질문했다. 마탑에도 듣는 귀가 있으니까.
“네. 만나게 해드릴까요?”
“그럴 수 있어요?”
“그럼요! 애기도 데려오라고 할게요. 당장은 힘들겠지만, 조만간이라면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와아!”
흔쾌한 대답을 듣고 나는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키슈가 눈치가 빨라 다행이었다.
페가수스 얘기를 모르는 피오르는 우리를 미심쩍은 듯 쳐다보다가 펜으로 책을 툭툭 쳤다.
“다 맞았다. 마법 수식뿐 아니라 독해력도 제법이군.”
그때 누군가 우리가 있는 강의실의 문을 두드렸다.
“키슈 님, 여쭤볼 게 생겼는데요.”
“아, 그래?”
혼자 진도가 다른 나는 단체 강의나 연구에 참여하지 못하는 깍두기 같은 존재였다. 때문에 키슈나 피오르는 다른 일이 없을 때만 내게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다른 일이 생기자 키슈는 나와 피오르에게 짧게 눈인사를 하고 학생을 따라 강의실을 나갔다.
여기에는 이제 피오르와 나만 남아 있었다.
아직 단둘뿐인 상황은 조금 어색해서 나는 그의 눈을 마주 보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책상의 교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피오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크레페.”
“네?”
“저번에 증폭 마법진이 필요하다고 했었지.”
몽블랑에게서 받았던 손수건에 대해 물어보며 그런 얘기를 꺼냈던 것 같기도 했다.
혹시 나한테도 만들어주려고 그러나?
나는 희망을 갖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만 있으면…….”
“브라우니가 커질 거라고?”
내, 내가 그런 얘기도 했었나?
지금 생각해 보니 마법사를 따로 불러내 증폭 마법진이 필요하다고 말할 어린애가 흔할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뒤늦게나마 시치미를 떼고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방긋 웃었다.
“마법 쓰면 푸딩을 케이크만 하게 만들 수도 있겠쬬?”
“…페가수스 얘기인 것 알아.”
“알면서 왜 사람을 바보 만들어요.”
말꼬리를 잡듯 빠르게 대꾸했다. 뻔뻔한 척하고 싶었는데 뺨이 은근히 달아올랐다.
피오르도 민망하긴 매한가지였던 듯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뭐, 비밀로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얘기 안 했다. 키슈가 직접 말해 준 건 아니고, 그 녀석이 원래 연구실 문단속을 잘 안 하거든.”
“…….”
키슈 님…….
사정은 알 만했지만 그래봤자 나도 잘한 건 없으니 키슈만 탓하기도 뭐했다.
나는 그냥 화제를 돌리기로 하고 다시 물었다.
“저한테도 그 손수건 만들어 주시려고요?”
페가수스의 페 자도 안 꺼내고 있던 피오르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내심 기대에 찬 눈빛으로 피오르를 쳐다보았다.
“아니, 증폭 마법진은 너랑 안 맞아. 0에는 무슨 숫자를 곱해도 0이니까. 하지만 페가수스를 이용하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배경 지식이 없는 나는 피오르의 말뜻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피오르가 쉽게 풀어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