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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38)화 (38/181)
  • 38화 

    * * *

    식사 이후에 이어진 마법 수업은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싱거웠다.

    파타슈가 하듯 손끝에서 바람이 뿅뿅 나간다거나, 키슈가 하듯 마법진이 우웅거린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다. 내가 마법사들이 움직이는 마나를 이미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나를 다루는 건 세 번째 단계야. 첫 단계로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면 두 번째는 마법진에 대해 배우는 거지.”

    피오르는 그렇게 말하며 도서관을 누볐다. 그리고 찾는 책들의 위치를 다 외운 듯 막힘없이 책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곧 내 시야가 가려질 정도의 책이 쌓였다.

    “다른 신입생 같은 경우, 이 정도는 학교에서 배운 다음 마탑에 들어온다. 하지만 넌 학교보다 마탑에 먼저 왔으니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게 많아.”

    “네에…….”

    낑낑거리며 피오르의 뒤를 따랐다.

    피오르가 내 책을 덜어 책상에 올렸다.

    “휴,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와 키슈는 너 말고도 다른 마법사들을 가르치고 있어. 진도가 다른 너를 위해 우리가 가정교사처럼 붙어있을 순 없다는 말이야.”

    “네. 혼자 할 수 있는 만큼 해볼게요.”

    나는 똑 부러지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모범적인 대답을 들은 피오르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도록.”

    “넵.”

    그러고 피오르는 다른 일을 하러 걸음을 돌렸다.

    나는 사람 하나 없는 도서관에 남아 한숨을 내쉬었다.

    뭐, 나도 마탑에 들어온 지 하루 만에 마법을 펑펑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어떤 분야든 기초가 제일 중요한 법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의자를 빼 앉았다. 그리고 피오르가 쌓아준 첫 번째 책을 펼친 순간, 말을 잃었다.

    내가 왜 잊고 있었을까. 마법진을 그리는 기본적인 원리가 수학이라는 걸.

    “끄응…….”

    나는 두꺼운 문제집 다섯 권과 내가 읽을 책 두 권을 갖고 내 방에 돌아왔다.

    거의 피오르가 선정한 교재였지만 내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전부 사칙연산 같은 수준의 문제뿐이었으니까.

    분수의 덧셈이든 소수의 곱셈이든 벌써 다 아는 내용이라고 말해 봐도 피오르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허풍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 옆에 있는 책상에 문제집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혼자 읽을 책도 가져왔겠다, 오랜만에 복습하는 셈 쳐야겠다.

    책을 들고 4층까지 올라올 땐 조금 짜증도 났지만 막상 책상에 공부할 거리를 내려놓으니 새삼 향수가 솟구쳤다.

    “그러고 보니 어차피 대학도 못 갈 거,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지?”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물론 정말 그 이유가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게 학생인 나의 본분이었고 원인은 엄마의 다그침이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누군가 그 이유를 다시 말하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법을 배워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이미 해가 진 시간이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똑똑.”

    똑똑은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펠이 어느새 내 옆에 서 있었다.

    “으악!”

    내가 한 박자 늦게 비명을 질렀다.

    “언제 들어왔어!”

    “방금. 엄청 집중했나 봐?”

    그렇게 대답하며 아펠이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민망해져 헛기침을 하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쳇, 누가 유령 아니랄까 봐.

    아펠이 내 책상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법진책은 어려운 거 보면서 마나학책은 엄청 쉬운 거 보네?”

    “구구단은 20년쯤 전에 졸업했으니까.”

    “응?”

    은근슬쩍 진심을 털어놓았지만 당연히 아펠은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책을 덮고 슬쩍 화제를 돌렸다.

    “너는 갑자기 왜 온 건데? 문 열어주면 돼?”

    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방문을 열러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아펠이 내 손을 붙잡아 막았다.

    “아니야, 너 보러 왔어.”

    심쿵.

    어린애 주제에 왜 벌써부터 잘생겨서 애꿎은 누나 맘을 흔드는 거니, 자존심 상하게.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크레페는 최고의 미모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었지만 아펠은 그의 외모보다 능력으로 유명했다. 뛰어난 마법사이자 훌륭한 검사인 사람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펠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입을 모아 그의 외모에 대해 얘기했다. 실력에 외모가 가려져 있다고.

    나는 순간 그 구절을 떠올리다 말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펠이 나중에 엄청난 미남으로 크면 뭐 해. 어차피 브라우니랑 파타슈를 가로챈 시점에서 로맨스는 포기했는걸.

    “크흠. 용건이 뭔데? 할 말 남았어?”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듯 뻔뻔스럽게 물었다.

    아펠이 자신이 쥐고 있는 내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눈을 접어 웃었다.

    “기억났거든, 널 어디서 봤었는지.”

    “날 봤다구?”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지만 아펠은 대답해 주기는커녕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니, 얘가 왜 이래?

    저절로 내 표정이 괴상해졌다.

    그의 다정한 모습은 꼭 딴 사람처럼 낯설게 보였다. 단순히 원작의 폭군이었던 아펠 슈트루델이 생각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펠은 나를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아펠이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을 때 그가 보였던 차가운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아펠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과 동일 인물이라니.

    어떻게 만 하루도 안 돼서 이렇게 태도가 바뀌었지?

    “우리 아빠랑 아는 사이야?”

    나는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아펠의 태도가 바뀐 게 내가 풀네임을 알려준 후부터라는 게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나름 날카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펠은 내 질문이 우습다는 듯 키득거리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궁금해?”

    나는 잠시 눈을 껌뻑거렸다.

    원작의 크레페는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마탑에 올 일도, 여기서 아펠을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도 내가 미래를 바꿔서 생긴 일인가? 아니면 원작의 비하인드?

    “응, 궁금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자 아펠이 내 손을 이끌고 창가로 갔다.

    “따라오면 말해 줄게.”

    마탑은 표면이 거친 돌들을 쌓아 만든 건물이었다.

    벽 중간중간 튀어나온 조형물도 있었고 구조 자체도 울퉁불퉁한 모양이었기에 탑의 겉을 돌아 오르내리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감안하고서도 아펠의 몸놀림은 날랬다.

    아펠은 튀어나온 돌의 모퉁이를 잡고 탑을 내려갔다. 그리고 기숙사와 마탑을 연결하는 통로의 지붕 위에 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조심해.”

    “걱정되면 위험한 짓을 시키질 말라고.”

    그의 손을 붙잡고 괜히 입술을 비죽였다.

    아펠이 말없이 웃고는 날 에스코트했다.

    아펠은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복도 지붕을 밟고 마탑의 본관으로 향했다. 본관 탑은 겉에 계단이 둘러진 모양이었다.

    아펠은 익숙하게 그 계단의 난간 위에 올라가 앉았다. 바로 아래로는 숲이, 멀리로는 담 너머의 황궁이 보이는 명당자리였다. 게다가 난간은 지붕 처마처럼 넓어서 앉기에도 편해 보였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한두 번 온 게 아니구만.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아펠이 물었다.

    “안 앉아?”

    밤하늘을 담은 그의 푸른 눈동자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고, 달빛이 파도처럼 부서진 회색 머리카락은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혹시 사람을 홀리는 마법이라도 썼나?

    싱거운 생각이 들었다. 작중 최고 미남이라더니, 될성부른 떡잎이라는 게 이런 걸지도.

    잠깐, 그렇게 따지면 나도 엄청난 미녀여야 할 텐데.

    “크흠.”

    문득 스친 생각을 무시하고, 나는 못 이기는 척 그의 옆에 앉았다.

    “그래서 날 어디서 봤는데?”

    원작에서 나오지 않았던 비하인드, 또는 바뀐 운명이라는 것. 내가 아펠을 따라온 이유는 그 사정을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펠의 대답은 간결하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했다.

    “꿈에서.”

    “야, 내가 지금 장난하자고 온 줄 알아?”

    “장난 아니야. 예지몽이지.”

    “예지몽 같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나는 말을 멈췄다.

    아펠은 농담을 하는 것 같은 표정이 아니었다. 문득 얼마 전에 엄마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그 일 때문에 내가 조사를 좀 했어, 마법에 대해서. 알아보니 재능이 있는 아이는 예지몽을 꾸기도 한다더라.’

    설마, 정말로?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펠이 내 표정을 보고 킥킥 웃었다.

    “나도 개꿈인 줄 알았어. 처음 보는 여자애가 자꾸 등장하길래.”

    “무슨 내용이었는데?”

    “그건 비밀이야.”

    아펠이 말을 아꼈다. 나는 입술을 툭 내밀었다.

    “사람 궁금하게 왜 말을 하다 말아?”

    “나중에 얘기해 줄게.”

    억지로 말하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더 이상 캐묻진 않았다.

    아펠의 태도를 보면 안 좋은 꿈이었던 것 같지도 않고, 예지몽을 꿨기 때문이었다면 나에 대한 호의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됐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건 하나 더 있었다.

    “나인 건 확실해?”

    “밀 크레이프. 이름이 케이크랑 똑같아서 기억해.”

    “…….”

    내가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괜히 민망해져 입을 다물었다.

    아펠이 허리를 숙이고 내 눈을 마주 보려 했다. 난간에서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자세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할 말 있어?”

    “아냐. 위험하니까 이제 들어가자.”

    “벌써?”

    아펠은 아쉬운 듯 보였으나 나는 긴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먼저 난간에서 깡충 내려와 복도 지붕 위에 섰다. 아펠도 별수 없이 엉덩이를 뗐다.

    나는 그를 기다릴 요량으로 잠깐 멈춰 서서 치마를 털었다.

    “크레페, 거긴 지붕이 미끄러우니까 조심…….”

    “에.”

    삐끗.

    아펠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발이 미끄러졌다.

    나는 비명도 못 지르고 팔을 허우적댔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아펠이 내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그의 힘에 훅 딸려 올라간 내가 탑의 울퉁불퉁한 벽을 다급히 붙잡았다. 그리고 내가 딸려간 거리만큼 아펠은 밖으로 밀려났다.

    아펠이 발이 허공을 밟았다.

    “아, 아펠!”

    나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나 아펠은 떨어지지 않았다.

    “쉿!”

    “웁?!”

    아펠은 풍선이라도 밟은 듯 아무렇지 않게 올라와 내 옆에 섰다. 나는 이번 생에서 이보다 더 놀란 적이 없을 만큼 놀랐다.

    아펠이 내 입을 막은 손을 뗐다.

    “마나를 썼어. 마법사들이 눈치챌 수도 있으니 빨리 가야겠다.”

    그의 말대로 공기 중에 무거운 마나의 느낌이 가득했다.

    나는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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