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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37)화 (37/181)

37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내가 그를 다그치듯 물었다.

“너 왜 아직 안 갔어!”

“포트 문도 잠겨 있단 말이야! 내가 밤새도록 문을 얼마나 두드렸는데…….”

아펠이 적반하장으로 대들었다. 내심 기가 막히긴 했지만 사정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내려올 때도 내 방 창문으로 들어오고, 돌아갈 때도 이 창문으로 올라가는 거야?”

기가 막힌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내 표정에서 느낀 점이 있었는지 아펠이 잠시 멈칫한 후 입을 열었다.

“내가 미리 얘기하지 못한 건 실수였어.”

“…….”

아니, 책임을 묻자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가 도리질을 치고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럼 지금은 문제없는 거지? 다 괜찮은 거 맞아?”

“바로 돌아가면 문제없어. 근데 포트로 돌아가기에는…….”

아펠이 말을 흐리고 뒤를 돌아 창가로 갔다. 그가 창틀에 발을 올리고 내게 손을 뻗었다.

“와볼래?”

어쩐지 피터팬을 따라가는 웬디가 생각나는 구도였다.

그래서, 웬디가 피터팬이랑 이어졌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내가 순수한 동화를 로맨스판타지 소설로 바꿔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자 민망해졌다.

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 때문이야.

거기에서도 아펠은 경국지색이라던 크레페와 어울릴 만큼의 미남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아펠이 원래대로라면 나와 약혼했을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하니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에잇, 어린애한테 무슨!

아펠은 물론 다른 생각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나도 태연한 척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펠이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없이 있기에는 조금 긴 시간이 지났다. 뭔가 수상쩍은 분위기에 나는 살짝 고개를 갸울였다.

“왜 그래?”

“아니… 왠지 익숙해서.”

대답을 들었는데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 아펠도 신경 쓰지 말라고 대답하며 내 손을 당겼다.

나는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그를 따라 창틀에 발을 올렸다. 창틀은 넓은 편이었지만 여기가 발코니인 건 아니었기에 당연히 난간 따위는 없었다.

괜히 쫄려서 창틀에 쭈그려 앉았다.

하지만 아펠은 익숙한 듯 창밖으로 완전히 몸을 빼고는 위 창틀을 잡고 매달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위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이지? 창문에 덧문이 쳐져 있잖아. 벌써 이동 업무를 맡은 마법사가 들어온 거야.”

“그게 무슨 뜻인데?”

“내가 올라가면 바로 들킨다는 거지.”

짧게 말한 아펠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창틀에서 내려갔다. 그러곤 손을 내밀어 내가 창틀에서 내려오는 걸 도왔다.

그와 손을 마주 잡자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재차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하고 말했다.

“좋아, 내가 도와줄게!”

“네가?”

* * *

“쉿!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5층으로 올라온 나는 아펠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그를 계단 구석에서 기다리게 했다. 아펠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낮췄다.

나는 옷차림을 가다듬은 후 그가 말한 방 앞에 서서 문을 노크했다.

“저기, 제가 길을 잃어버렸는데요.”

곧 문이 열리며 장년의 아주머니가 나왔다. 언뜻 문 안을 보니 바닥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녀 외에 다른 인기척은 없는 것 같았다.

좋아.

“누구니?”

아주머니가 물었다. 나는 긴장한 척 내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라고 해요. 어제 들어왔어요. 근데 식당이 어딘지 모르겠어서요.”

“아, 쉬제트 백작가의?”

아주머니도 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최대한 불쌍하게 말했다.

“식당까지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요……?”

“하하, 알았어. 그 정도쯤이야.”

아주머니가 흔쾌히 승낙하며 앞장섰다. 이제 나와 아주머니가 내려간 사이에 아펠이 저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겠지?

나는 낙천적으로 생각하며 그녀를 따라 소용돌이 모양으로 된 탑의 계단을 내려갔다. 아니, 내려가려고 했다.

그때 계단 위쪽에 숨어 있던 아펠이 느닷없이 내 팔을 잡아챘다. 그러곤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아주머니가 수상한 기척을 느끼기도 전에, 나를 데리고 공간 이동을 하는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왜, 왜 그래?”

“네가 밀 크레프였어?”

얘기 안 했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냥 크레페라고만 소개했던 것 같았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

그러자 굳어있던 아펠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어쩐지 우는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벽안이 색과 맞지 않을 만큼 따뜻하게 느껴졌다.

“너였구나, 크레페.”

아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퍼졌다.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표정으로 보였지만 사실 내게는 낯선 모습이었다.

정적의 간계에 넘어가 크레페와 파혼하고, 제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을 모조리 죽이며 그녀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람처럼 매몰차게 대했던 아펠 슈트루델.

이 남자아이가 정말 그 남주랑 동일 인물이라고?

내게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기고 아펠이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웠어. 밤에 다시 올게.”

“엥?”

밤에 다시 온다니?

나는 그 말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얼빠진 소리를 했다. 하지만 사정을 들을 여유는 없었다.

“크레페? 무슨 일 있어?”

아주머니가 내 등 뒤에 있는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문이 열리지 않도록 등으로 눌러 막았다. 그 사이 아펠이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아펠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곧 사방의 벽에 벽지처럼 붙은 마법진이 빛나며 짙은 마나가 일렁거렸다. 그러나 내가 공간 이동을 했을 때처럼 멀미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분명 아펠의 마나일 무형의 기운이 방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펠의 발밑에 있던 마법진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짧은 빛에 눈을 깜빡이자,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봤던 마술쇼처럼 아펠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크레페!”

아주머니가 내 이름을 외쳤다. 나는 더 의심 사기 전에 시치미를 떼고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여기가 뭐 하는 덴지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들어와 버렸어요.”

아주머니는 내 핑계를 듣는 둥 마는 둥하고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물론 아펠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아펠의 마나가 조금 남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내가 했다고 둘러대면 괜찮겠지.

나는 뻔뻔하게 생각하며 아주머니를 지나쳐 방을 나왔다.

“식당 어디예요?”

그러자 아주머니가 날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찔리는 데가 있어서인지 그녀의 시선은 꼭 내게 자백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피식 웃었다.

“뭐야, 유령이랑 같이 있었던 거구나?”

“네? 유령이요?”

나는 아주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할 말이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가 부탁했던 대로 식당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우리는 한낮에도 음산한 복도를 지나 본관으로 이어지는 문을 통과하고, 낡은 종이 냄새가 풍기는 책장 옆을 걸었다.

아주머니가 도서관 뒷문을 열고 말했다.

“저기 건물 보이지? 저게 식당이야.”

“감사합니다. 이제 혼자 갈 수 있어요.”

나는 치맛자락을 들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유령 얘기는 마탑 밖에선 비밀이다?”

그러고서 그녀가 자신의 손목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주머니의 손목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관에서 식당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군침 돌게 하는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식당의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뭐, 뭐지?

“왜 이렇게 늦었어요!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몇십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키슈의 빨간 머리색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가 내 팔을 끌고 배식구로 안내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입술도 떼지 못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식당은 학교에 딸려 있는 학생 식당과 비슷한 구조였다. 식판과 배식구가 있는 것도 똑같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았다. 따닥따닥 붙어야 백 명이 겨우 앉을 수 있을 것 같다고나 할까.

키슈가 왜 마탑의 인력난을 그렇게 걱정했는지 조금 알겠다.

“자요. 아무 데나 앉으면 돼요.”

“가, 감사합니다.”

키슈가 열성적으로 나를 챙겨주었다.

나는 수프와 찐 감자 따위가 수북하게 쌓인 식판을 들고 빈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나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애써 모르는 척 식사를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 한 명이 키슈에게 속삭였다.

“아까 얘기한 천재가 이분이에요?”

천재요?

“맞아.”

키슈 님?

나는 귀를 의심하며 키슈를 올려다보았다. 키슈가 못 들은 걸로 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어서 드세요. 수업하러 가야죠.”

“그럼 혹시 아까 포트를 작동시킨 것도 이분이?”

“풉.”

수프를 먹다 사레가 들렸다.

내가 캑캑거리며 한참 기침을 하자 여자가 재빨리 물을 떠다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뭘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컵을 건네준 손에 비밀 서약의 문신이 남아 있었다. 그녀도 마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인 것 같았다.

키슈가 그녀를 나무라며 말했다.

“포트를 쓴 게 크레페 님이었다면 지금 이분이 여기 있겠어? 공간 이동으로 사라졌겠지.”

“아, 그러네요. 그럼 역시 유령이겠죠?”

홀짝.

나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물을 홀짝거렸다.

키슈가 내 태도에서 이상한 것을 느낀 듯 날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괜히 어깨를 움츠리자 키슈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속삭였다.

“크레페 님도 보셨나 보네요?”

“아뇨! 아무것도 못 봤는데요!”

음, 너무 티 났나.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하고 나서야 과민 반응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어색하게 컵을 내려놓자 잠시 놀라 있던 키슈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이 서약도 마탑 밖 사람한테만 얘기 안 하면 되는 거니까.”

“다요? 다 알고 있다구요?”

그 말에 놀라 나는 멀뚱히 눈을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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