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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36)화 (36/181)
  • 36화 

    【 너 남주 맞니? 】

    나를 배려한 듯, 방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쉬제트 백작가에 있는 내 방과 비슷했다.

    나는 아직 남아있는 짐 가방을 풀까 고민하다가 하품을 했다. 어두운 창밖을 봐도 그렇고,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잘 때가 된 건 분명한 것 같았다.

    급한 대로 잠옷만 꺼내 입었다. 그리고 나는 마법등 앞에 서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나는 밝으면 잠을 못 잔다. 하지만 귀신은 싫다.

    “…에이,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의미 없는 혼잣말을 하고 나는 마법등에 손을 댔다. 불이 꺼지며 창문으로 희미한 달빛이 들어왔다.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다. 집 밖에서 잠을 자는 건 처음이었기에 조금, 아니 많이 어색했다.

    나는 한참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다.

    딱히 귀신이 무서운 건 아니었다. 피오르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분명 거짓말이겠지.

    몇 번이고 되뇌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한 번 눈을 감으니 왠지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듯했다.

    “으으!”

    눈은 못 뜨고 괜히 몸서리를 한 번 쳤다.

    뚜벅.

    봐, 봐. 역시 누가 있는 것 같잖아.

    발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했다. 공기에 노출된 목덜미가 오싹해졌다.

    심지어 그 발소리는 문밖의 복도에서 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바로 내 옆, 내 방 안을 걷는 듯이 생생한 기척. 곧이어 문고리가 덜컹이는 소리. 게다가 누군가 달빛을 가리고 내 옆에 선 듯, 눈꺼풀 너머가 조금 어두워지는 느낌. 더불어 숨결 같은 따스한 체온이 바로 귓가에…….

    “누구 있어요?”

    “끄아아악!”

    콰당.

    놀라서 구르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버렸다. 다행히 이불을 꽉 껴안고 떨어져서 아프진 않았다.

    나는 거북이처럼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침대 밑에 바짝 엎드린 채 소리쳤다.

    “귀, 귀신이면 물러가고, 사람이면 누구냐!”

    “…….”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용기가 생긴 내가 이불을 꽉 쥐고 슬쩍 눈을 꺼냈다.

    침대 너머에 사람의 그림자가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달빛을 등지고 있었기에 어두워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

    그림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귀신이 이 정도의 실체감을 가질 순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조금 진정할 때쯤, 그림자가 다시 물었다.

    “마탑에 왜 어린애가 있어?”

    “여긴 내 방이야!”

    무서움과 부끄러움이 가시고 나자 울화통이 터졌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몸을 일으켰다. 어둠이 익숙해지자 상대의 모습이 아까보단 선명히 보였다.

    그는 내 또래인 것 같았고, 고급스러운 흰 옷은 달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순간 말을 잃고 그의 눈에 시선을 빼앗겼다.

    분명 밤이고 조명조차 없었는데, 그의 투명한 눈동자가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보석 같은 눈동자라는 게 딱 맞는 설명일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바다에 비친 터키석처럼 밝은 파랑이었다. 여름밤에도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채도 높은 파랑.

    “원래는 빈방이었단 말이야.”

    남자아이가 짧게 말하며 침대 옆에 있던 마법등을 켰다.

    그제야 나는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늑대를 닮은 은회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 머리카락에 파란 눈. 마법사만 있는 마탑에 들어온 어린아이.

    설마…….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아펠?”

    그러자 남자아이가 턱을 내렸다. 아이답지 않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가 물었다.

    “너 누구야?”

    슈트루델국의 황태자이자 여주인공 크레페의 약혼자. 현존하는 유일한 페가수스 브라우니의 주인이며 대마법사 파타슈의 주군. 또한 자신 역시 뛰어난 마법사이자 검사로 알려진 작중 남주인공.

    아펠 슈트루델.

    딸꾹.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아펠은 두어 걸음 물러나서 다른 등에도 불을 켰다. 이제 아펠도 날 볼 수 있을 만큼 방이 밝아졌다.

    “나는 널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가 다시 물었다.

    “자, 잠깐만. 히끅. 여기 내 방이라구! 딸꾹. 일단 너부터 설명해!”

    황태자라는 걸 알았는데 계속 너라고 불러도 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펠은 별생각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윗방에 리시버가 있어.”

    “리, 리시버?”

    “공간 이동을 하는 방.”

    “근데?”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야.”

    나는 괴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 방도 아니고, 이 윗방에 공간 이동을 하는 방이 있든 시간 이동을 하는 방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냔 말인가.

    게다가 ‘원래 빈 방’이었다고 한 걸 보면 여길 처음 들어온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아펠이 물었다.

    “어린애가 마탑에 어떻게 온 거지? 그리고 내가 아펠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사회 배경을 막론하고 한 나라의 왕족이라는 건 보통 정신으로 살아남기 힘든 배경일 것이다. 그 생각을 증명하듯 아펠의 질문은 아이답지 않게 제법 날카로웠다.

    실수하면 난 사형당하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마른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나… 나는 신입생이야. 오늘 들어왔어. 그리고 너, 손목에 이거 없잖아.”

    내가 팔을 들어 손목 안쪽을 내보였다. 오늘 키슈의 집무실에서 비밀 유지 각서 같은 것에 서명하고 생긴 문신이 남아 있었다.

    “마탑 소속도 아닌 어린애가 마탑을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데, 당연히 왕족이겠지. 네 나이에 파란 눈이면 아펠 슈트루델밖에 없고…….”

    “그 잠깐 사이에 그런 생각을 했다고?”

    “응. 내가 좀 천재라서.”

    물론 아펠의 눈에 정신이 팔려 손목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이 나이에 사형당하고 싶진 않았기에 뻔뻔하게 대답했다.

    아펠은 대충 납득한 듯 입을 다물고 자신의 맨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이번엔 내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는… 몰래 나온 거지?”

    아펠이 뜨끔한 얼굴로 어깨를 굳혔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랬구나.

    밤늦은 시간에 황족 어린아이가 호위도 없이 나올 리가 없었다. 게다가 문소리도 없이 들어온 걸 보면 분명 창문으로 내려왔을 게 뻔했다.

    “걱정하지 마. 너 왔다고 얘기 안 할게.”

    “…문 열어주면.”

    아펠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방문을 쳐다보았다.

    아펠이 조금 민망한 듯한 얼굴로 덧붙였다.

    “빈방이었을 땐 그냥 나갔는데 오늘은 잠겨 있더라고.”

    그래서 그냥 못 나갔구나.

    나는 뒤늦게 납득하고 슬쩍 방문으로 다가갔다.

    아펠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꼭 사람을 경계하는 야생동물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문고리를 잡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 손목의 문양이 한 차례 빛났다.

    나는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났다.

    아펠이 문으로 나가려다 말고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너 이름은 뭐야?”

    “크레페.”

    “…고마워.”

    아펠이 들릴 듯 말 듯한 말을 남기고 내 방을 나갔다.

    대체 무슨 일이냐.

    나는 뒤늦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남자 주인공인 아펠은 검사이자 마법사이고 황태자였지만, 그 직위나 능력보다 그를 더 잘 표현하는 말이 있었다.

    폭군.

    내가 파타슈를 불편해했던 이유 중 하나도 여기 있었다. ‘그’ 아펠 황태자의 심복인데 파타슈는 또 얼마나 괴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방금 내가 본 아펠은 소설에서와는 느낌이 달랐다.

    아마 원작의 아펠이었다면 내가 의심스럽다며 목을 치거나, 고맙다는 말을 하기는커녕 자길 본 걸 말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위협을 하고 갔을 게 뻔했다.

    아직 아이라 그런가?

    이유야 어떻든 아무 일도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물론 아펠은 모르겠지만, 내가 또 그에게 못할 짓 한 게 많아서 더 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브라우니를 빼앗았다거나 파타슈를 가로챘다거나…….

    “아훔.”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한 일들을 떠올리다가, 나는 하품을 하고 눈을 비볐다. 아펠 생각을 하느라 푹 잘 수가 없었기에 아직 피곤했다.

    아침이 밝았다.

    침대에서 나온 나는 편한 원피스로 갈아입고 프릴 칼라에 붙어 있는 리본을 묶었다.

    시중 들 사람 한 명 없이 옷을 갈아입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전생의 서민 짬밥이 있어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오늘도 날씨가 참 좋구나.

    새로운 생활에 대한 불안은 있었지만 설렘과 기대감도 있었다. 나는 내 말랑말랑한 볼을 꾹꾹 눌러 긴장을 풀고 한 번 싱긋 웃었다.

    “조아.”

    지난밤엔 생각지 못한 사건을 겪긴 했으나, 이제 이 방이 내 방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 아펠도 두 번 다신 여기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난 일을 다 잊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기분으로 문을 열었다.

    근데…….

    “너, 너 왜 아직 안 가고…….”

    나는 말을 맺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아펠이 내 방문 옆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곧 아펠이 인기척을 느낀 듯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으음… 크레이프 케이크……?”

    영문 모를 잠꼬대에 당황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탑의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와 아펠의 눈이 똥그래졌다.

    나는 아펠의 어깨를 팍 당겨 내 방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다급히 문을 닫음과 동시에 피오르가 계단을 다 올라왔다.

    “오, 오셨어요?”

    “꽤 빨리 일어났군. 식당을 안내해 주러 왔는데.”

    “제가 직접 찾아갈게요! 바쁘실 텐데 선생님도 식사하셔야죠.”

    “선… 크흠.”

    둘러대느라 꺼낸 호칭에 피오르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내가 어제 한 말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어제는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으니까 잊어도 좋아. 어린애가 마탑에 들어온 전례는 없지만, 다른 학생하고 똑같이 대할 테니 너도 명심하도록.”

    “네,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최대한 방긋방긋 웃으며 싹싹하게 대답했다.

    피오르가 식당 위치를 간단히 설명하고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아펠이 작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뒷발로 내 방문을 걷어찼다.

    쾅.

    피오르가 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다. 내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에구, 안에서 뭐가 넘어졌나 봐요. 저는 짐 정리를 조금 하다가 갈게요.”

    “그… 그래, 편할 대로 해라. 너무 늦으면 음식이 안 남을 테니 주의하고.”

    “넵.”

    나는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피오르를 내려 보냈다. 그리고 그의 정수리가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내 방의 문을 열었다.

    어린 아펠은 여전히 내 방에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소설 속의 한 페이지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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