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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35)화 (35/181)

35화 

지난 일은 이미 내 관심 밖이었다. 게다가 그날 나와 엄마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도 한두 명 덕분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브라우니, 몽블랑, 파타슈와 키슈, 마르크, 요새의 책임자까지 모두 자리를 지키고 싸워준 덕분이지.

나는 조심스럽게 가방을 내려놓고 마르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높이 들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요. 아무튼 다 잘됐잖아요. 오히려 아저씨가 없었다면 저도 죽은 목숨이었을 텐데요.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역으로 감사 인사를 하며 웃었다. 그리고 마르크의 반응을 보기가 민망해 후다닥 다시 가방을 들고 피오르 옆에 붙었다.

“이제 가요! 마차는 어디 있어요?”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피오르가 들고 있던 마법책을 펼쳤다.

그가 집중하는 듯하더니 곧 우리의 몸을 가로로 관통하는 거대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고 가방을 슬슬 흔들어 마법진 모양을 흩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연기처럼 아른거리기만 할 뿐 모양이 번지지는 않았다. 꼭 다른 차원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키슈가 파타슈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파타슈가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키슈.”

“응.”

키슈가 피오르의 부름에 대답하고 손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오르, 키슈, 파타슈까지 무려 세 명의 기운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이렇게 짙은 농도의 마나는 처음이었다. 멀미가 날 것처럼 울렁거려서 나는 조금 비틀거렸다.

“와, 마법진이…….”

곧 죽어도 작별 인사라고 할 수 없는 카눌레의 말을 끝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내가 눈을 뜨자 위에는 난생처음 보는 천장이 있었다.

“공간 이동 마법을 썼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마나에 예민한 체질이신가 보군요.”

피오르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기절했던 건가?

“끄응…….”

아직도 속이 메슥거렸다. 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은 집무실인 것 같았다.

창문 없이 어둑한 방에는 낡은 책장과 작은 책상이 있었고, 내가 누워 있던 곳은 천 소파 위였다.

아니, 애가 쓰러졌는데 의무실도, 침대도 아닌 소파에 눕혀놨어?

“여기가 어디예요?”

“마탑이죠. 일단 여기 서명부터 하셔야 해요.”

공간 이동 마법이랬나. 참 대단도 하다. 속도도 속도지만 이 구린 울렁거림이 특히.

마법에 대한 경외심보다 멀미감에 대한 불만이 먼저 생겼다. 맨엉덩이로 몇 시간 동안 말을 타고 있어도 이 정도로 어지러울 것 같진 않았다.

키슈가 내 표정에 의문을 표하지도 않고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마탑에는 마법사만 들어올 수 있다고 했지?

문득 파타슈와 브라우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아이인 나 혼자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지금의 상황 때문인가, 왠지 사기당하는 듯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종이에 곧바로 서명하는 대신 거기 적혀있는 내용을 읽어보았다.

[1. 마탑 안에서 일어난 일을 마탑 소속 외의 인물에게 발설하지 말 것.

2. 마탑 안에서 알게 된 것을 마탑 소속 외의 인물에게 발설하지 말 것.

3. 허가 없이 마탑 안팎을 오가지 말 것.]

기본적으로 비밀 유지를 위한 조항들인 것 같았다.

남은 글이 있었지만 그 이상 깊이 생각하기엔 아직 머리가 어지러워 대충 납득하고 내 이름을 적었다.

그러자 종이가 갑자기 빛을 내며 흩어졌다. 그리고 그 빛은 내 손목에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 손목에는 뜻을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문신처럼 남아있었다.

“이, 이게 뭐예요?”

“마탑 신입 연구생이 됐다는 뜻이죠! 환영합니다~!”

키슈가 유치원 선생님처럼 손짓으로 반짝거리는 효과를 표현했다.

나는 그저 얼떨떨해져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자 키슈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키슈 님이 연구생 교육 담당이랬죠?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 제가 연구생 교육 담당은 맞는데…….”

“신입 교육 담당은 나다. 이제 가지.”

피오르가 언제 존댓말을 했냐는 듯 짧게 말했다.

설마 저 재수탱이랑 단둘이 나가야 하는 건가?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키슈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키슈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오세요.”

…그래. 엄격해 봤자 얼마나 엄격하겠어. 난 아직 어린앤데.

나는 반쯤 체념하고 피오르 뒤에 따라붙었다.

그는 키슈의 집무실을 나가 기다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복도 양옆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가 적힌 책들과 책장이 늘어서 있었다. 어두침침한 건물이라서인지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마탑이라더니 누가 보면 불법 생체 실험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내가 열심히 주변을 살피는 사이 복도 끝에 다다른 피오르가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가 마탑의 별관과 본관을 잇는 출입문이다.”

문에는 거대한 책장이 양옆으로 늘어선 복도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었다. 우리가 지나온 그 길이었다.

피오르가 자신의 키의 세 배는 될 법한 그 문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조각된 그림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이 문의 양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수많은 책장이 늘어선 모습인 것은 똑같았지만, 바뀐 그림의 장소는 복층 도서관이었다.

“따라와라.”

큰 힘을 들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에 조각되어 있던 것과 똑같은 도서관이 나타났다. 나는 그곳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우와…….”

그곳은 방금 전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돔으로 된 천장은 내가 본 건물 중 제일 높았고 천장에는 수많은 마법등이 둥둥 떠 있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아래로는 아까 말했듯 복층의 도서관이 있었다. 쉬제트 백작가에 있던 도서관도 충분히 넓다고 생각했는데, 이곳과 비교하면 중학교 도서실과 국립 도서관 정도로 차이가 났다.

“여기도 마탑이에요? 복도랑은 완전히 다른데.”

나는 도시에 처음 올라와 본 시골 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탑이라길래 탑처럼 좁고 어두침침한 공간을 생각했는데 내부가 놀라울 만큼 넓고 밝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오르는 여전히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이곳이 본관이지. 아까는 별관인 연구동이었고.”

도서관은 넓은 공간이 휑해 보일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피오르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탑은 총 세 개의 건물로 되어 있어. 우리가 방금 지나온 연구동, 이곳 마탑, 마지막으로 네가 지낼 기숙사까지. 모두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니 오가는 게 힘들진 않을 거다.”

피오르가 도서관을 가로질러 다음 문에 도착했다. 이곳 도서관이 양각된 똑같은 문이었는데, 피오르가 손을 올리자 조각이 움직여 다시 복도 모양으로 변했다.

윽. 여기도 복도는 어둡네.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는 연구동의 복도와 마찬가지였다. 나는 슬쩍 피오르의 옆에 다가가 그의 긴 옷자락을 슬쩍 붙잡았다.

“할 말이 있나?”

“네? 아, 아니…….”

이 음산한 분위기가 무섭다고 말하면 다그치기라도 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귀신은 없죠?”

그러자 피오르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마탑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피오르가 웃음기 남은 얼굴로 말했다.

“마법사는 성직자야.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어.”

“그래서 귀신이 나온다구요?”

“그런 소문이 있긴 하지.”

맙소사.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피오르의 옷자락을 더 세게 잡았다.

피오르는 몇 번 피식거리며 복도를 지나고 소용돌이 모양의 계단을 요리조리 돌아서 한 방문 앞에 멈췄다.

“손을 대봐라.”

문을 열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내가 팔을 들어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내 손목에 남은 문양이 빛나더니 내가 문고리를 돌리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이미 정리가 끝나 있었다.

복도에 비해 방은 꽤 넓었고 가구나 전체적인 분위기도 화려했다. 쉬제트 백작가에 있던 내 방과 비슷할 정도로.

“여기가 네가 머물 4층 숙사야. 1인실인데다 창문으로 숲과 황궁이 바로 보이는 로얄층이지.”

나는 쭈뼛쭈뼛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복도나 마탑 본관에도 없던 창문이 보였다.

그러나 이미 해가 진 시간이었기에 풍경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기절해 있는 사이에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크레페.”

“네, 네?”

피오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게 낯설어서 나는 말을 더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오르가 말을 이었다.

“네 부모님이 거는 기대가 크니 너도 힘들 거야. 하지만 난 너한테 큰 기대 안 해. 그러니 그냥 적당히 시간 때우다 돌아가라.”

“네?”

갑자기 무슨 말이지?

나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피오르는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 머뭇거리다가 제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말했다.

“재작년이었나? 네 아빠인 쉬제트 백작께서 나한테 연락을 했어. 자기 아들이 마법 공식을 이해한 천재라나 뭐라나. 곧 취소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자기 자식이니 다 천재로 보였나 보지.”

뜨끔.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뒷사정을 알고 있는 내가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피오르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피오르는 나 정도 되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게 많이 서툰 것 같았다. 그는 민망한 듯 날 쳐다보지도 않았고, 뒤통수를 하도 긁적거려서 단정했던 머리는 반쯤 산발이 되어 있었다.

“키슈가 네 칭찬을 많이 하긴 했지만 뭐, 그 녀석은 원래 호들갑떠는 걸 좋아하니까 그런 것 같고……. 아무튼 너도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다. 대충 3개월 정도만 버티면 돌려보내 줄게.”

“네에…….”

그래,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하긴 내 나이에 누가 마탑을 들어오겠는가. 아무래도 피오르는 적당히 학생 부모님께 항의 안 받을 정도로만 가르쳐서 날 마탑에서 내보낼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응? 아니, 잠깐.

“피오르 님, 그럼 제가 마탑 안 들어가겠다고 했을 땐 왜 말렸어요?”

그렇게 묻자, 피오르는 막 방을 나가려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가 곤란한 질문이라도 받은 듯 안경을 고쳐 썼다.

“기부금… 받으려고. 미안하다.”

피오르가 외마디 사과를 남기고 문을 닫았다. 내가 입을 쩍 벌렸다.

어른의 사정에 놀라야 하나, 아니면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줬다는 데 놀라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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