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너네도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이번에…….”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크바스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대번에 갈레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오빠!”
“컥.”
갈레트가 순간 휘청했다.
…이건 나 때문인가? 아니면 오빠의 힘이 문젠가?
한결 진지하게 나는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드레스 겉으로 똥똥한 라인이 보였다.
“끄응, 크레페에.”
내가 더 깊은 생각에 빠지기 전에 갈레트가 날 껴안았다.
“마탑 꼭 가야 돼? 안 가면 안 돼?”
갈레트가 10년은 어려진 것처럼 칭얼거렸다. 물론 내가 결정을 번복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짠한 기분으로 갈레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뒤쪽에서 크바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런 놈이랑은 엮이기 싫은데.”
“저런 형이랑 같이 사는 나도 있다.”
카눌레가 맞받아쳤다. 뒤늦게 민망해진 내가 헛기침을 하며 갈레트의 품에서 벗어났다.
“실례합니다.”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갈레트의 친구들만 있는 파티장에서 그 남자는 유일한 성인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턱을 한참이나 치켜들어야 했다.
“크레페 님이십니까?”
목소리가 높낮이 없이 단조로웠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이 세계에서 드문 안경을 쓰고 있었다. 가늘고 치켜올라 간 눈매나 호리호리한 체형, 마른 편인 얼굴 때문에 학구적이고 깐깐한 인상으로 느껴졌다.
그나마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갈색이라 아주 사나워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검을 드는 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마른 손에는 마법진이 그려진 책이 들려 있었고, 한여름에도 윗옷은 허벅지를 덮는 길이였다. 그 때문에 성직자처럼 금욕적인 이미지가 느껴지기도 했다.
성직자가 아니면 마법사인 것 같긴 한데.
“누구세요?”
“크레페 님을 데리러 온 피오르라고 합니다. 원래 내일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수플레 님께서 먼저 인사를 나누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셔서 잠깐 들렀습니다.”
“마법사?”
카눌레가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거 처음 보는 마법책인데? 여기 단추에 그려진 건 진짜 마법진이에요?”
가만히 두면 단추를 다 뜯어갈 기세였다.
나는 카눌레의 옷자락을 슬쩍 당기고 앞으로 나섰다.
“저 크레페 맞아요. 잠깐 나가서 얘기해도 괜찮을까요?”
나는 내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갈레트를 억지로 떼어내고 피오르라는 남자와 함께 파티장을 나갔다. 화장실에라도 갔는지 내 호위를 맡은 마르크는 보이지 않았다.
뭐, 기사도 사람이니까.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피오르를 내 저택까지 안내했다.
“할 말이 있으십니까?”
피오르가 물었다.
나는 저택 안쪽 뜰에 서서 주변에 다른 귀족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거 때문에요.”
나는 품에서 몽블랑 후작이 쓰던 손수건을 꺼냈다.
“저번에 제가 이걸 갖고 있었을 때, 브라우니가 커다래졌어요. 아는 분이 준 손수건인데, 여기 이게 증폭 마법진이라고 했거든요. 근데 그날 이후로는 효과가 없는 것 같아서요.”
이건 키슈에게도 물어본 사항이었다. 하지만 키슈는 마법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나는 마탑에서 사람이 나오면 이것부터 물어보겠다며 벼르고 있던 차였다.
피오르는 손수건을 건네받고 그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안경을 고쳐 쓰고 그가 짧게 질문했다.
“혹시 몽블랑이 준 겁니까?”
“네? 네, 맞아요.”
몽블랑의 몽 자도 안 꺼냈는데 어떻게 알았지?
나는 조금 얼떨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피오르가 입꼬리를 비틀며 손수건을 꽉 쥐었다.
“망할 새끼, 남이 준 걸 막 뿌리고 다니네.”
“에?”
“아, 실례했습니다.”
피오르가 다시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고 손수건을 탁탁 털어 주름을 폈다.
“여기 있는 건 제가 새긴 마법진입니다. 몽블랑에게 맞춰 특별히 손을 봤죠. 크레페 님께 효과가 없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닙니다. 사람의 마나 패턴이 워낙 다양하니 오히려 효과가 있었던 게 놀랍군요.”
그가 간략히 설명하며 손수건을 곱게 접어 돌려주었다. 네모반듯한 각을 보니 본래 성격이 꼼꼼한 스타일인 것 같았다.
귀를 의심하느라 잠시 말을 잃었던 내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직접 만드셨다고요? 그럼 혹시 제 것도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저 마탑 안 들어가도 될 것 같…….”
쾅!
난데없이 나와 피오르 사이에 거대한 나뭇가지가 떨어졌다.
나는 뒤늦게 헉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 뭔가 이상한데?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위를 살폈다. 그러나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숲도 정원도 아닌 뜰이었다. 태풍이라도 불지 않는 한 나뭇가지가 이런 곳에 떨어질 리가 없었다.
“실례합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못 들었습니다만.”
피오르가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마, 마탑 들어갈 테니까, 저한테도 이런 거 만들어주실래요?”
그러자 피오르가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웃? 이것도 아웃인가?
긴장되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내가 굳은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자, 피오르가 싱긋 웃었다.
“그럼요.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그런 것도 못 해주겠습니까.”
“가, 감사합니다.”
어쩐지 마탑 생활이 그리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순식간에 기가 빨렸다. 피오르는 편히 쉬라는 소릴 하며 멀어졌고,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파티가 진행 중인 홀로 돌아왔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편히 쉬긴 개뿔.
“어디 다녀오신 겁니까! 저한테 말도 안 하고……!”
복도에 서 있던 마르크가 내게 다가왔다.
먼저 자릴 비운 게 누군데 싶어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서러움이 먼저였다. 나는 울컥해서 그의 허리를 껴안고 매달렸다.
“크레페 님?”
“나 마탑 가면 호위기사랑 같이 가는 거죠? 아저씨가 와요?”
마탑에 들어가도 시종이나 호위기사를 동행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내 편 하나 없는 곳에서 기도 못 펴고 있긴 싫었다.
우리 기사단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겠지만, 이왕이면 아는 얼굴이 같이 있어줬으면!
나는 제발 그렇다고 말해 달라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마르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마탑 안에는 마법사가 아니면 아무도 못 들어가는데요?”
“…….”
말을 잃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파티장 안에 있던 카눌레가 뒤늦게 복도로 나왔다.
“너는 왜 파티 때마다 스캔들을 일으키려고 하냐!”
카눌레가 날 마르크에게서 떼어놓고 파티장에 밀어 넣었다.
내가 멍청하게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갈레트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크레페! 케이크 먹자! 아~”
갈레트가 포크로 케이크를 떠서 내 입에 쏙 넣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다물고 오물거렸다.
제대로 확인할 정신은 없었지만 맛을 보니 블루베리 생크림 케이크였던 것 같았다.
깔끔하고 부드러운 생크림의 단맛과 촉촉한 빵, 상큼한 블루베리 향이 입안에서 조화롭게 섞였다.
하지만 맛있는 건 맛있는 거고, 나는 케이크를 씹는 내내 갈레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금발과 보라색 눈 때문에 아빠가 떠올랐다.
마탑에 들어가더라도 시종이나 호위기사는 같이 갈 수 있다고 말한 건 아빠였다.
아빠 거짓말쟁이!
“아~”
“통째로 줘!”
나는 갈레트의 손에서 접시와 포크를 빼앗아 케이크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쟤가 왜 도토리가 됐는지 알겠다.”
크바스가 내게 다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생크림 묻은 입가를 소매로 문대 닦고 그에게 터벅터벅 걸어가 정강이를 걷어찼다.
“어쭈?”
크바스가 다리를 들어 내 발차기를 종아리로 막았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젤라토가 크바스의 뒤통수를 때렸다.
“윽.”
“애가 때리면 좀 맞아줘.”
“…….”
크바스가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젤라토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크바스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커헉.”
크바스의 짧은 비명을 못 들은 척하고, 나는 갈레트의 손을 이끌고 다음 케이크를 가지러 갔다.
카눌레가 자신도 당해봤다며 크바스를 위로하는 듯한 말소리가 들렸다.
* * *
이제 와서 배경 설명을 하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슈트루델은 신성 제국이었다. 권력이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믿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라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신을 믿었고, 신전 역할을 하는 마탑은 슈트루델의 수도에 있었다.
그리고 수도는 우리 쉬제트 백작가와 제법 거리가 멀었다.
고속 열차는커녕 자동차도 없으니 가는 길이 고생이겠구나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피오르는 그런 경고 같은 말 하나 없이 나를 저택 앞으로 불러냈다.
“짐은 다 챙기셨습니까?”
“네! 다 확인했어요!”
나는 제일 작은 가방을 두 손으로 들고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피오르는 앞으로 내 선생님이 될 사람이었다. 그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었다.
“꼭 편지해. 알겠지……?”
갈레트가 두 번 다시 못 만날 사람처럼 내 손을 꼬옥 쥐고 말했다. 내가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갈레트의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이제 슬슬 어린이보단 청소년에 가까운 나이일 텐데.
나는 살짝 민망해져 헛기침을 하고 파타슈에게 말했다.
“브라우니를 잘 부탁할게요.”
“네, 네.”
“삐이…….”
고개를 끄덕이는 파타슈의 품 안에서, 브라우니가 몸살이라도 앓는 듯 힘없이 대꾸했다.
걱정스레 녀석을 쳐다보자 키슈가 다가와 나를 위로해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저도 업무 복귀하잖아요. 파타슈도 수도 근처에 있을 거고 저도 마탑에 있을 테니, 브라우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 권한으로 어떻게든 해드릴게요.”
“인사 끝났으면 갈까요?”
피오르가 끼어들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마르크가 끼어들었다.
“한마디만 해도 되겠습니까?”
“네? 네.”
갑작스러운 말에 그만 대답을 더듬어버렸다.
마르크가 내 앞으로 다가와 기사의 예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크레페 님, 위험에 처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
나는 잠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마르크는 진지했다. 아무래도 지난번 루아 요새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해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아직 어린애인 나한테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