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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33)화 (33/181)

33화 

“크흠. 크레페, 아직 얘기 안 했니?”

결국 엄마가 숟가락을 놓고 운을 띄웠다. 갈레트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두리번거렸다.

“뭘요? 무슨 일 있어?”

“아, 나, 아니, 브라우니가 요즘 아파.”

“브라우니가?”

갈레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갈레트의 어깨 너머로 카눌레가 내게 의미 불명의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입 모양을 보니 대충 ‘너 뭐 하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응, 저번에 루아 요새에서 있었던 일 땜에. 그래서 브라우니를 낫게 해주고 싶은데, 근데, 그러려면 내가 마법을 배워야 한대. 그래서 마탑에 가기로 했써.”

“응.”

갈레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마탑에 가자는 말은 예전에도 한 적 있으니 딱히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내가 슬쩍 덧붙였다.

“다음 주에.”

“…응?”

“오빠, 미안. 아무래도 오빠 생일 파티가 끝나면 바로 출발할 것 같아.”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갈레트가 입을 쩍 벌렸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리며 에이미가 디저트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메뉴는 초콜릿 파이와 호두 파이, 달고나 커피였다. 아무래도 여기 있는 아이 넷의 입맛을 다 맞추기 위한 선택인 것 같았다.

에이미도 참 고생 많겠구나.

에이미는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든 갈레트가 입을 벌리고 있든, 프로답게 식당을 누비며 디저트를 나눠 주었다.

나는 갈레트의 디저트 스푼으로 달고나 거품을 떠서 그의 벌어진 입안에 넣었다.

“움… 아, 아니! 이렇게 갑자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물거린 갈레트가 석화 마법이 풀린 듯 한바탕 당황하는 말을 쏟아냈다.

“저번까지만 해도 그런 얘기 안 했잖아! 키슈 님이 마탑으로 납치할지도 모르니까 우리 마법 배우기로 한 건 비밀로 하자며!”

갈레트가 내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그랬어요?”

키슈가 한마디했다.

나는 키슈의 말을 못 들은 척 대화를 계속했다.

“브라우니가 아픈데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쥐방울한테 치료해 달라고 해! 왜 너까지…….”

덩치한테 안 좋은 말버릇이 옮았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번엔 파타슈가 끼어들었다.

“쥐방울요?”

그러자 갈레트가 파타슈를 못마땅하다는 듯 흘겨보았다.

이거 아무래도 분위기가…….

“오빠! 싸우지 않기로 했자나!”

나는 더 늦기 전에 초코 파이를 집어 갈레트의 입에 쑤셔 넣었다. 갈레트가 파이로 가득 찬 두 뺨을 우물거리며 이번엔 나를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당황스러운 것도 이해는 가지만, 조금만 진정해 줬으면.

나는 갈레트가 입안이 가득해 말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숨을 내쉬었다.

갈레트도 원래는 파타슈와 그리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 어색하면 어색했지.

그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작년의 ‘파타슈 애 아빠’ 사건 때문이다.

내가 뿌린 씨앗이니 뭐라 할 순 없지만, 그때부터 갈레트는 파타슈를 적으로 인식한 것 같았다.

“크흠.”

내가 헛기침을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랑 얘기해서 결정한 거야. 마탑에도 다 얘기했구, 오빠 생일에 맞춰서 사람이 온댔어. 계속 파타슈 님한테만 브라우니를 부탁할 순 없잖아.”

갈레트가 입안 가득한 초코 파이를 열심히 씹어 삼키고 말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가!”

“안 돼.”

“왜! 나도 그동안 마법 공부 많이 했어.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고 있고, 키슈 님도 내 학습 속도가 빠르다면서 마법사 될 생각 없냐고 했었다고! 설마 쥐방울이랑 둘이서만 마탑 가려고 하는 건…….”

나는 이번엔 호두 파이 한 조각을 갈레트의 입에 밀어 넣었다.

“웁.”

“파타슈 님도 마탑 안 가. 나만 가는 거야. 그리고 오빠는 여기에서 해줄 일이 있써.”

갈레트가 말은 못 하고 대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해도 되겠지?

목소리를 낮추고 갈레트에게 속삭였다.

“저번에 요새에서 습격당한 거, 우연이 아니야. 누가 엄마를 노리고 있다구.”

갈레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갈레트의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니까 엄마는 오빠한테 맡길게. 내가 마법 배워 오는 동안, 오빠가 엄마를 지켜줘! 알겠찌?”

반은 달래기였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갈레트는 나보다 똑똑했으니까.

“…응.”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갈레트는 결국 더 이상 꼬투리를 잡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생긋 웃으며 갈레트를 토닥였다.

“편지 자주 할게. 걱정하지 마.”

나는 파이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털고 내 앞의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엄마를 향해 물었다.

“디저트 더 갖다 달라고 해도 되죠?”

방으로 돌아가자 에이미가 챙겨둔 짐 가방이 구석에 쌓여 있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안을 보았다.

“…에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나는 가방 세 개를 질질 끌고 방 중앙에 왔다. 그리고 가방을 활짝 펼치고 자리에 주저앉아 짐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 정리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게 너무 많아서 문제지.

아무리 내가 걱정돼도, 양말로만 가방 하나를 가득 채운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차라리 팬케이크 믹스나 커피 파우더 같은 걸 넣어줬다면 탑에서 요리해 먹을 수라도 있을 텐데.

음, 한 번 얘기해 볼까?

“야.”

노크 한 번 없이 문이 열렸다. 호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방문자는 카눌레였다.

카눌레는 바닥에 널브러진 내 옷가지와 짐들을 보고 잠시 멈췄다가, 이내 발등으로 옷가지를 밀어버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화들짝 놀라 카눌레의 발등을 때렸다.

“새 옷인데 발로 머 하는 거야!”

“그럼 이렇게 어지럽히질 말든가!”

할 말 없군.

나는 헛기침을 하고 카눌레를 올려다보았다. 카눌레는 티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가 앉았다.

“갈레트 오빠가 시켜서 왔어?”

“형은 옷 맞추느라 바빠.”

대답이 짧았다. 카눌레는 다시 입을 다물고 날 바라보았다. 딱히 급한 용건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뭐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했다. 하지만 카눌레는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다시 짐 챙기기에 집중했다.

조용한 건 싫었는지 카눌레가 그제야 말을 걸었다.

“너 갈레트 형을 완전 애처럼 다루더라? 엄마를 노리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허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나는 태연한 척 양말을 돌돌 말면서 대답했다.

“응. 그렇게라도 해야 말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오빠는 계속 순수하게 커줘.

나는 순전히 카눌레를 위해 속내를 숨기기로 했다. 그러고서 혹시라도 그가 계속 캐물을까 봐 먼저 말을 돌렸다.

“하지만 브라우니가 아프다는 건 진짜야. 이제 나한테 안기려고도 안 하잖아. 맨날 잠만 자고…….”

옷을 개던 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대로, 브라우니는 오늘도 내내 파타슈의 품에 있었다. 부족한 마나를 충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는 다시 브라우니를 안고 저번처럼 내 마나를 나눠 주기 위해 끙끙댔지만, 그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몽블랑의 손수건에 그려진 마법진의 힘을 빌렸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한 번 마나를 느껴봤으니 두 번째는 더 쉽겠지.

그게 나의 희망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마법을 배워 나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미룰수록 위험해질 가능성을 그냥 무시할 순 없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젓고 다시 짐을 챙기며 말했다.

“아무튼 최대한 빨리 마법을 배워서 나오려구. 브라우니도 키우고, 우리 가족도 지켜야지.”

“쪼그만 게 무슨.”

카눌레가 코웃음을 쳤지만 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가볍게 생각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몽블랑이 범인이었던 미래는 바뀌었고 엄마에게는 예지몽을 꿨다고 해놨으니 알아서 조심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그래서, 너 마탑 들어가면 언제 나오는데?”

그의 질문에 나는 큰 고민 없이 답했다.

“목표는 열 살 되기 전에 나오는 거야.”

내가 빨리 마법을 배우려는 이유는 브라우니와 더불어 하나 더 있었다. 내 열 살 생일에 갈레트가 죽을 운명이니까.

막 태어났을 땐 10년이나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이삼 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브라우니가 그때도 골골대거나 내가 마법을 쓰지 못하면, 이번에야말로 운명을 바꾸지 못하고 갈레트가 죽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전에 쫓겨나지나 마라. 가는 김에 살도 좀 빼고.”

“참 나, 나 없다고 울지나 마.”

“내가 울긴 왜……!”

카눌레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했다.

내가 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카눌레도 뒤늦게 자신이 과민 반응한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가 쯧, 혀를 차고 다시 의자에 편히 앉았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물었다.

“근데 왜 온 거야?”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다, 왜!”

“내 방은 복도 끝인데?”

“흥. 내 맘이다!”

말문이 막힌 카눌레가 별안간 콧방귀를 뀌고 내 방을 나갔다.

날 걱정했나 보구나.

나는 닫힌 문을 보며 킥킥 웃었다.

그러게, 마탑 들어가면 우리 오빠들 보고 싶어서 어쩌나.

갈레트의 생일이 되었다.

작년 생일까지만 해도 세상 해맑게 웃고 있던 갈레트는 파티 내내 낯빛이 어두웠다. 누가 보면 초상이라도 났나 생각했을 것이다.

덩치가 먼저 시비를 걸지도 못하고 주변만 맴돌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뭐야, 저놈. 무슨 일 있냐?”

덩치, 크바스가 우리에게 다가와 슬쩍 말을 걸었다.

“크레페가 마탑에 들어간대.”

카눌레가 콧방귀를 뀌고 답했다.

“뭐? 저 도토리?”

일 년 만에 봐도 밉상인 건 똑같구만.

내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와, 정말이야? 학교도 건너뛰고?”

분홍 머리의 젤라토도 끼어들었다.

나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 마탑에 들어가는 게 순서였다. 나야 브라우니를 키워야 한다는 사정이 있으니 마법진 그리는 법 따위 건너뛰고 마나 다루는 것만 배우는 게 목표였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나를 10년쯤 월반한 천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쯧, 요즘 애들은 공부 어려운 줄을 모른다니까.”

크바스가 혀를 찼다.

그래봤자 본인도 학생이면서.

내가 가는눈을 뜨자 나와 크바스가 또 싸우기라도 할까, 젤라토가 끼어들었다.

“크레페 엄청 똑똑한가 보구나! 갈레트도 맨날 1등이던데, 가족이 다 천재인가 봐. 내 동생은 책보다 검을 더 좋아하거든.”

어쩐지 아이 다루는 게 익숙해 보인다 했더니, 동생이 있는 모양이었다.

“동생이 있어요?”

“그래봤자 나보다 한참 부족한 실력이겠지.”

크바스가 잘난 체하며 숟가락을 얹었다.

나이 차가 있으니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보다는 이번 축제 때 자기가 1등을 했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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