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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32)화 (32/181)

32화 

정말? 이렇게 끝난 건가?

나는 몽블랑이 누워 있던 빈 침대를 바라보았다. 아직 이 상황이 실감나지 않았다.

곧 창밖으로 몽블랑의 마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의무실의 문이 열렸다.

“크레페? 후작님은 어디 가셨어? 인사드리러 왔는데…….”

“…….”

엄마였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엄마.

나는 홀린 듯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잠깐 당황했던 엄마가 내 등을 토닥거렸다. 익숙한 햇빛 냄새를 맡고 나는 그제야 실감했다.

내가 해낸 거야.

밤이 깊었다. 이 시간쯤 되니 급한 일은 여차저차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하루 묵고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엄마는 일분일초라도 이 위험한 곳에 내가 있는 게 싫다는 듯 곧바로 마차를 준비했다.

“후작님께 감사 인사를 못 드려서…….”

“나중에 서신이라도 보내면 되죠. 부족하면 제가 전해드릴게요.”

키슈가 엄마를 위로하듯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엄마가 조금 풀린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오늘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러고서 엄마가 허리를 숙여 정중히 예를 표했다. 키슈가 당황해 손을 휘저었다.

“무슨 말씀을요! 저도 두 분 덕에 살았는걸요. 제 아들도 무사하고. 게다가…….”

키슈가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크레페 님의 빠른 판단이 아니었으면 다른 몬스터들의 습격이 끊이지 않았을 거예요. 빈말이 아니라, 크레페 님은 지금 당장 마탑에 들어가도 될 정도라니까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나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슬쩍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키슈는 흑심 없이 한 말인 듯 다시 엄마에게 말했다.

“수첩에 마법을 건 범인은요? 짐작 가시는 데가 있나요?”

“계속 조사해 봐야죠.”

“몽블랑은…….”

“후작님께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크레페를 지켜주셨으니까요.”

그 수첩을 선물한 게 몽블랑이었다 하니 당장 고소를 때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엄마의 대답은 내가 놀랄 만큼 시원스러웠다. 키슈가 안심한 듯 얼굴을 폈다.

“엄마, 이제 가요.”

내가 끼어들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집에 도착하면 아침이 다 되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제 하품을 참는 것도 한계였다.

“그래. 그럼 돌아가서 뵙겠습니다, 키슈 님.”

“넵.”

키슈가 발랄하게 대답하고 파타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왔을 때처럼 그들을 따라가려고 했으나 엄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크레페, 나랑 같이 가자.”

“에?”

반사적으로 얼빠진 소리를 냈다. 여기까지 올 때는 엄마와 내가 다른 마차를 타고 있었으니까.

그러자 엄마가 내 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웃었다.

“일 다 끝났잖아. 이제 느긋하게 가도 돼.”

엄마와 단둘이 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차 안에 있는 게 단둘일 뿐이고 여행은 아니었지만, 나는 여전히 들뜬 기분이었다.

역시 정해진 미래라는 건 없는 거야!

오늘 나는 그것을 증명했다. 아무래도 집에 도착하면 『내 인생 공략집』을 크게 업데이트해야 할 것 같았다.

“정말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저도 후작님한테 편지 꼭 쓸게요! 오늘 진짜 놀랐는데 후작님 덕분에 살았다구요. 정말… 하암…….”

말하다 말고 나는 하품을 했다. 죽다 살아났다는 환희와는 별개로 자꾸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와 밤 개구리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크레페.”

“네?”

엄마가 조금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도 모르게 잠에 빠질 뻔했던 내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잊은 거 아니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듣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엄마가 비밀 얘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요새에 데려와주는 대신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크레페,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엄마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지난번의 대화가 떠올랐다. 엄마가 가만히 내 손을 맞잡고 말했다.

“혼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지?”

엄마의 목소리는 그 태도만큼이나 부드러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책 속에 들어와서 미래를 알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냥 웃었다. 에이미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안 좋은 꿈을 꿔서 그랬던 거예요.”

“꿈?”

“네, 네. 엄마가… 엄마가 죽는 꿈이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큰일을 겪은 다음이라서 그런지 태연한 척하는 게 오히려 전보다 쉬웠다.

그러나 엄마는 이상하리만치 진지한 얼굴이었다.

“언제?”

“에? 어… 아주 어릴 때요.”

“그랬구나.”

대충 둘러대자 엄마가 나직하게 대답하고 나를 보듬었다.

엄마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의아해할 틈도 없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밤새 안개비가 내린 스산한 아침. 원작에서는 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그날, 나는 엄마와 함께 집에 도착했다.

“조심하세요. 미끄럽습니다.”

“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한결 개운했다. 나는 마르크에게 밝게 대답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흙바닥은 밤새 내린 비로 축축했기에 내가 내려오자 철벅, 소리가 났다. 비 내린 숲의 냄새가 상쾌했다.

아직 부슬비가 멈추지 않아 하늘은 흐렸고 아침 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운치 있어서 좋은데?

나는 생긋 웃으며 엄마를 돌아보았다. 엄마가 뒤이어 마차에서 내리고는 어깨에 두른 짧은 케이프를 벗어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바로 앞이 집인데…….”

“크레페, 네가 다섯 살 때 마법 수식을 푼 것 기억하니?”

엄마가 케이프의 단추 하나를 잠그고 내 눈을 마주 보았다.

물론 기억한다. 하지만 갑자기 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되물었다.

“왜요?”

“그 일 때문에 내가 조사를 좀 했어, 마법에 대해서. 알아보니 재능이 있는 아이는 예지몽을 꾸기도 한다더라.”

엄마의 대답은 꼭 스무고개 하듯 두루뭉술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엄마가 말을 이었다.

“너희 아빠가 널 마탑에 보내자고 했을 때, 사실 난 반대하는 입장이었어. 근데 이제 보니 네 나이만 생각하고 무작정 반대하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엄마의 말이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하지 못하고, 아니 정확히는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으로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때 키슈와 파타슈가 타고 있는 마차가 도착했다.

키슈가 하품을 하며 마차에서 내리자 엄마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키슈 님, 크레페가 지금 당장 마탑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재능이 있다고 하셨죠? 수속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머, 그럼요! 맡겨주세요.”

키슈가 잽싸게 대답하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엄마가 다시 나를 보며 짧게 말했다.

“마탑에 들어가, 크레페.”

네? 이렇게 갑자기요?

“네? 이렇게 갑자기요?”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크레페, 넌 보통 아이가 아니야. 페가수스의 알을 알아본 것도, 이번에 우리 목숨을 구해준 것도 너였잖아. 게다가 내가 아주 오래전에 불러준 자장가도 기억하고 있었지?”

“그건…….”

그 말을 듣고 나자 엄마가 날 불세출의 천재로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속사정은 매우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전부 내가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라는 책 안에 들어와서 생긴 일이었으니까.

물론 그것을 바른대로 말할 순 없었기에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엄마가 이때다 하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얕보면 안 돼.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렴.”

“하지만 엄마가 또 위험해지면요?”

나는 엄마의 눈을 마주 보고 말했다.

몽블랑이 아니라고 해도 다른 누군가가 엄마의 목숨을 노렸다는 건 확실했다.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암살자가 온다든가…….”

“크흠.”

옆에 있던 마르크가 멋쩍게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수플레 님의 검술 실력은 저보다 뛰어나십니다.”

검술?

나는 멍청한 얼굴로 시선을 내려 엄마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검, 몬스터의 날개에 박혀 있던…….

“나를 얕보는 것도 안 돼.”

엄마가 눈을 접어 웃었다.

【 마탑, 들어갑니다 】

“크레페에에에!”

“끄앗!”

달콤한 잠에 빠져있던 내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갈레트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엄마와 요새에 나갔을 때의 일을 이제야 전해 들은 것 같았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하품을 하고 갈레트의 품 안에서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어디 다친 덴 없고? 역시 기숙사 들어가지 말걸! 내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크레페가 다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진정해, 오빠. 나 멀쩡하니까.”

나는 곧바로 대답하고 그를 밀어냈다.

역시 갈레트를 기숙사에 보낸 건 좋은 선택이었구나.

처음엔 하루가 멀다 하고 결투를 한다던 학교에서 24시간 지낸다는 게 걱정됐지만, 나랑 떨어져 지내는 훈련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좋은 일이었다.

아마 이번 일도 진작 얘기했다면 듣자마자 학교고 뭐고 때려치우고 달려왔을 기세였으니, 엄마와 에이미가 아주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하겠다.

“확실하지?”

“응, 응.”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카눌레가 친히 내 방까지 납시었다. 평소의 카눌레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기에 어색하게 웃었다.

“형은 짐 정리나 해. 학교에서 책 엄청 가져왔다며.”

“아, 그래야지. 마탑 가려면 방학에도 못 놀아. 내가 꼭 그 쥐방울을 추월해서… 좋아, 이따 봐, 크레페.”

혼자 전의를 불태우던 갈레트가 내게 뺨을 맞대고 인사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카눌레가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너, 다음 주에 마탑 들어간다고 언제 말할 거냐?”

“그러게…….”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와 요새에 다녀온 게 어느덧 보름 전이었다.

그때도 이미 여름이었으니 갈레트가 방학을 맞이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얼마 후면 갈레트의 열세 번째 생일이기도 하고.

올해 생일에는 깜짝 소식을 선물하게 되겠군. 환불, 교환도 안 되는데 반응이 어떠려나.

벌써부터 생각하기에는 조금 두려운 상상을 하다가, 나는 점심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의 자리는 언제나 그렇듯 엄마가 상석에, 그녀를 기준으로 왼쪽은 나, 갈레트, 카눌레의 자리였고, 오른쪽은 키슈와 파타슈의 자리였다.

식사 시간에도 카눌레는 틈만 나면 내게 눈짓으로 갈레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덧붙여 엄마와 키슈도 은근히 갈레트의 눈치를 살폈다.

다들 갈레트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만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끄응, 이러면 내가 더 부담스러워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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