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31)화 (31/181)

31화 

나는 성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을 살폈다.

마르크가 검날을 비틀자 그와 대치중이었던 몬스터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움직입시다.”

책임자의 지휘에 따라 우리는 천천히 위치를 옮겼다.

그러는 동안 괴물은 번갈아 우리를 공격했는데,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괴물들이 노리는 건 엄마 한 명뿐이었다.

상황이 다급해 나를 말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엄마가 암살당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암살에 사용한 게 암살자가 아니라 몬스터였나?

그렇게 생각하자 뭔가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턱을 내리고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파타슈 님.”

“네?”

“마나를 퍼뜨려주세요.”

파타슈는 영문을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내 부탁을 무시하진 않았다. 주변에 잔잔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숙여요!”

그때 성곽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세를 낮췄다.

나는 이때다 엄마의 품으로 뛰어들어 그녀의 옷섶을 더듬거렸다. 엄마가 날 꽉 껴안고 몸을 웅크렸다.

찾았다.

내가 그녀의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끼에에엑!”

“아들!”

고막을 찌르는 듯한 몬스터의 비명 소리와 함께 키슈가 성곽에서 뛰어내렸다. 파타슈가 바람을 일으켜 키슈가 안전하게 착지하도록 도와주었다.

“괜찮아?”

“네, 저는 갠찮은데…….”

파타슈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몬스터가 숲을 휭 돌았다.

그것의 깃 끄트머리가 불씨 없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키슈의 공격이 먹힌 것 같았다.

나는 그 틈을 타 엄마의 옷자락에서 찾아낸 수첩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후다닥 빠져나갔다. 돌발적인 행동에 아무도 날 잡지 못했다.

“크레페!”

엄마가 내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러자 나무 사이를 돌던 몬스터가 다시 방향을 바꾸고 나를 향해 화살처럼 날아왔다.

쐐애애액!

“위험해요!”

파타슈의 외마디 외침과 동시에, 나는 엄마의 수첩을 숲으로 냅다 던졌다. 공중에 떠 있던 몬스터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잡아채고 발톱으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역시 저게 문제였구나.

나는 숨을 돌리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파타슈가 마나를 퍼뜨렸을 때, 저 수첩에서 괴상한 파동이 느껴져 확신했다. 아마 몬스터의 공격을 유도하는 마법 같은 게 걸려있던 듯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게 있어야 몬스터로 특정 인물을 암살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 괜찮…….”

내가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고 안심하라는 얘기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이 내가 아니라 내 뒤의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에에엑!”

“에.”

멍청하게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키슈의 공격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던 녀석이 마법과 관계 없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몬스터는 어느새 내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안 돼!”

엄마의 비명 같은 외침을 마지막으로, 나는 누군가 그녀보다 한발 먼저 나를 끌어안은 것을 느꼈다. 언뜻 하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을 본 듯했다.

“크윽.”

몽블랑이었다.

“후, 후작님?”

몽블랑이 나를 등 뒤에 숨기고 몬스터를 향해 돌아섰다. 누가 던졌는지 몬스터의 날개에는 장검이 꽂혀 있었다.

“키야아아악!”

몬스터가 지옥에서 들릴 법한 괴성을 내지르며 부리를 크게 벌렸다.

몽블랑이 몬스터를 향해 팔을 뻗었다.

“됐어!”

뒤에서 키슈의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공중에 붉은색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몽블랑의 손에 일렁이던 마나가 마법진과 만나 강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소름 끼치는 비명과 함께 몬스터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찰캉.

몬스터의 날개에 박혀 있던 검이 떨어졌다.

몬스터 하나는 죽고, 남은 몬스터들은 엄마의 수첩을 발톱으로 움켜쥔 채 멀어졌다. 어떻게든 상황이 일단락된 듯했다.

“크윽…….”

몽블랑이 한숨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괜찮아요?”

나는 깜짝 놀라 그의 몸을 받쳐주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문득 내 손을 쳐다보았다. 내 손바닥은 그의 등에서 묻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몽블랑이 나를 지켜주다가 입은 상처였다.

아니, 잠깐! 원작에는 이런 내용 없었다구!

다행히 몽블랑은 해가 질 때쯤 눈을 떴다. 엄마는 요새의 책임자와 함께 상황 정리를, 키슈와 파타슈는 브라우니의 치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무실에 남은 건 나와 마르크뿐이었다.

나는 몽블랑이 눈을 뜨자마자 머리를 푹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취를 한 탓인지 몽블랑의 반응은 조금 굼떴다.

“사상자는 있습니까?”

“아뇨. 다들 무사해요.”

“수플레 님도요?”

그 반문에 내가 잠시 멈칫한 사이, 마르크가 대신 대답했다.

“무사하십니다.”

“…다행이군요.”

몽블랑이 그렇게 대답하고 허리를 일으키려 하자, 마르크가 그를 도우며 말을 이어갔다.

“등을 꿰맸습니다. 작은 요새라 치유 마법사가 없어서 흉이 크게 남을 거랍니다. 그 외의 일상생활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마르크의 도움으로 몽블랑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저를 왜 도와주셨어요?”

“크레페 님이 던져버린 그 수첩에, 몬스터를 유인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죠?”

몽블랑은 마치 알고 있던 내용을 말하는 것처럼 평온하게 대답했다. 그건 어려운 질문을 꺼낸 나와는 대조될 정도로 메마른 어조였다.

“그 수첩을 선물한 게 저였거든요.”

잠시 적막이 맴돌았다.

이건 암살을 계획했던 사실을 고백한 거라고 봐도 될까?

하지만 내가 그를 추궁하기 전에 몽블랑이 태연히 말을 잇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가 마법을 건 것은 아닙니다. 아마 중간에 바꿔치기라도 당했겠지요.”

몽블랑이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르크가 그를 부축하러 다가갔다.

하지만 몽블랑은 손을 들어 그의 도움을 거절하고 똑바로 섰다.

그가 옷차림을 가다듬으며 뒷말을 계속했다.

“제 선물로 애먼 사람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럼 후작님께서는 수플레 님을 해하려 한 게 아니었다는 뜻입니까?”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 듯 마르크가 끼어들었다. 나도 듣고 싶은 대답이었다.

나는 몽블랑을 올려다보았다. 석양 지는 하늘이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 비추었다.

절묘하게 역광이 되어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게 된 순간, 몽블랑이 대답했다.

“신께 맹세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마르크가 더 추궁하지 않고 자세를 바르게 해 섰다. 단순 기사의 신분으로 후작을 추궁하는 게 부담스러워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크레페 님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르크가 기사의 예를 취하며 말했다.

“…….”

그때 의무실의 문이 열렸다. 브라우니를 안은 파타슈와 키슈였다.

“몽블랑! 다행이다. 일어났구나.”

키슈가 마법등에 손을 올려 불을 켰다.

그들이 입장하자 방이 환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조도가 올라가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파타슈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의 품 안에 있는 브라우니의 상태를 살폈다. 녀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브라우니는 갠찮아요?”

“네. 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대요. 근데 몸에 마나가 많이 부족해진 것 같다구…….”

“거대화 때문이잖아요.”

키슈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녀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크레페 님! 브라우니에게 마나를 나눠 주셨다면서요? 그때 브라우니가 수플레 님도 지켜줬다던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도 순간이라 아직도 내 착각이었나, 하고 있었던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브라우니가 커졌어요? 제 착각이 아니라?”

“저도 봤쪄요. 거기 있던 사람들도 다 봤을껄요.”

파타슈가 대답했다. 키슈가 제 일처럼 들뜬 말투로 말했다.

“크레페 님의 재능이 모두의 목숨을 살린 거죠! 수첩에 유인 마법이 걸려 있는 걸 눈치챈 것도 크레페 님이셨다면서요!”

키슈의 호들갑에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브라우니를 내려다보았다. 낯선 감각이 느껴졌던 건 사실이지만 나 혼자였더라면 무엇에 마법이 걸려 있었는지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파타슈 님 덕분이었어요. 파타슈 님의 마나는 익숙하니까, 파타슈 님이 마나를 퍼뜨리면 어디에서 위화감이 느껴지는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게 천재인 거죠!”

키슈가 내 어깨를 꽉 잡고 열변을 토했다.

“보통 사람이 그 급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해요! 참 나, 겸손도 그 정도면 병입니다, 병.”

나는 그녀의 격렬한 반응에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키슈가 뒤늦게 내 어깨를 놓고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무튼, 거대화한 건 좋지만 그 마나가 소량이라 브라우니가 오래 버티지 못한 것 같아요. 그때 무리한 것 때문에 지금까지 잠들어 있는 거고요. 다른 부상은 없었어요.”

건강하다는 얘기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브라우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조용히 있던 몽블랑이 말을 꺼냈다.

“페가수스가 잠들어 있다면 내가 여기 있을 필요는 없겠군.”

“돌아가려고? 더 쉬다 가지.”

키슈가 놀라 말했다. 그러나 몽블랑은 이미 시간이 늦었다며 고개를 젓고는 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잊은 게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후작님. 잠깐만요.”

내가 품 안에서 그의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돌려드리께요. 지난번에 놓고 가신 거요.”

그러나 몽블랑은 그것을 받아 드는 대신 내게 물었다.

“혹시 그걸 계속 갖고 계셨습니까?”

“놓고 가셨자나요.”

“아니, 오늘 말입니다. 페가수스를 거대화시켰을 때.”

나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몽블랑이 말했다.

“그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이걸요?”

손수건을 주고 싶으면 새 걸로 주지 왜 쓰던 걸 주나.

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손수건을 들여다보았다. 내 심정이 티가 났는지 몽블랑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 행커치프에는 증폭 마법진이 그려져 있어요. 페가수스를 키울 때 도움이 될 겁니다. 어쩌면 오늘도… 그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 감사합니다.”

내가 뒤늦게 인사했다.

몽블랑은 이렇다 할 대답 없이 의무실을 나갔고, 키슈와 파타슈가 그를 배웅하러 따라 나갔다.

나는 얼떨하게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미래가 바뀌었다.

그것도, 메인 빌런이었던 몽블랑이 내 목숨을 구해주는 쪽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