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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30)화 (30/181)
  • 30화 

    나는 찝찝한 입가를 문지르며 엄마 옆에 섰다. 부디 마르크가 이 부끄러운 얘기를 퍼뜨리지 않기를 바라며.

    “잤어?”

    하지만 엄마는 날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엄마가 내 이마를 문질렀다.

    나도 뒤늦게 그녀의 손이 닿은 곳을 건드려보았다. 일자 모양으로 창틀 자국이 나 있는 게 느껴졌다.

    “끄흠.”

    나는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대충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엄마가 못 본 척해 주겠다는 듯 웃었다.

    “그럼 요새를 안내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엄마와 같은 마차를 타고 왔던 요새 책임자가 말했다.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작은 공책을 꺼냈다.

    그건 자수로 된 엠블럼이 붙어 있는 가죽 표지에, 가죽 끈으로 묶여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수첩이었다.

    엄마의 작년 생일에 들어온 선물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나는 그들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엄마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엄마는 장식 하나 없는 간소한 드레스 차림으로, 허리에는 검집을 차고 있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검 손잡이를 보니, 어쩌면 여기가 생각보다 위험한 장소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엄마는 요새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거대한 돌과 석회를 쌓아 만든 벽을 살피고 수첩에 뭔가를 적기만 반복했으니까. 옆에 있던 내가 보기엔 다소 지루한 작업이었다.

    금붕어 똥처럼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나는 결국 다시 하품을 했다.

    “아직 안 끝나셨어요?”

    키슈가 다가와 물었다. 나는 하품을 언제 했냐는 듯 눈을 치켜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몽블랑 후작님은요?”

    “아직 안 오셨대요.”

    키슈가 대답했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브라우니를 바라보았다.

    브라우니는 파타슈의 품 안에 꽁꽁 옭아매져 있었다. 우리에게 페가수스가 있다는 건 극비였기에 밖에 있는 동안에는 절대 내려놓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하늘 나는 모습만 안 들키면, 크기가 작은 건 원래 그런 종이라서 그렇다고 빡빡 우길 수 있으니까.

    “크레페 님이 안고 시퍼요?”

    파타슈가 브라우니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내 시선을 오해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대답 대신 브라우니를 넘겨받았다.

    “고맙씁니다.”

    “삐유.”

    아직 몽블랑도 안 왔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따끈따끈한 브라우니를 품에 안으니 초조한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우으으, 이게 말로만 듣던 동물 테라피… 응?”

    “왜요?”

    파타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그의 반응이 오히려 의아했다. 파타슈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긴가민가 싶어 망설이다가 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요즘 잠을 못 자서 몸이 허해졌나 바.”

    나는 한겨울처럼 몸을 부르르 떨고 서둘러 엄마 뒤에 따라붙었다.

    “그럼 저는 몽블랑 언제 올지 망 좀 보고 있을게요. 파타슈, 어디 가지 말고 크레페 님이랑 같이 있어!”

    키슈가 언제나 그랬듯 파타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훌쩍 걸음을 옮겼다. 개밥에 도토리가 되어버린 파타슈가 씁쓸히 나를 따라왔다.

    뭐랄까, 키슈도 참 한결같은 사람이구나.

    “여기부터 저기까지 보이는 게 요새의 성곽입니다. 세 달 전쯤에 보수 작업을 마쳤고요.”

    “바깥쪽도 볼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책임자가 우리를 거대한 문 앞까지 안내했다.

    그 문은 내가 목을 최대한으로 젖혀야 꼭대기를 볼 수 있을 만큼 높았고, 내가 이름을 아는 모든 사람이 늘어서도 남을 만큼 넓었다. 이건 그냥 내가 아는 사람이 얼마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잠시 입맛이 써진 그때, 책임자가 팔을 높이 들었다. 신호를 받은 기사 한 명이 톱니바퀴처럼 생긴 손잡이를 돌렸다. 거대한 문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와아아.”

    나는 나지막한 탄성을 내지르며 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책이나 영화에서만 봤던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감흥이 남달랐다.

    그것이 열리는 동안 책임자가 설명을 이었다.

    “사실 몬스터가 많을 때는 소수 인원으로 밖에 나가는 게 엄금됩니다만 지금은 소강상태라 괜찮을 겁니다. 얼마 전에 대규모 토벌도 마쳤으니까요.”

    “그렇군요.”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고 책임자를 따라 문을 나갔다.

    이 모든 것을 처음 보는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문득 브라우니를 내려다보았다.

    또다. 이상한 느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브라우니의 등가죽을 문질렀다. 그러나 정작 브라우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삐?”

    “아가씨, 어서 따라가시는 게…….”

    “쉿.”

    마르크의 말을 끊고 나는 조용히 집중했다.

    브라우니를 안은 품에서부터 뭔가 낯선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으음, 그냥 기분 탓인가?

    “왜 그래요?”

    파타슈도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대답 대신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감각을 표현할 말을 찾기 위해 끙끙거렸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감각에 집중하지 못했다. 숲이 있는 방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한…….

    “파타슈 님,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아요?”

    “네?”

    파타슈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 그의 뒤로 거대한 독수리가 날아올랐다.

    아니, 독수리가 아니었다.

    나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숲에서 날아온 그것은 독수리의 날개와 다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상반신은 사람과 비슷한 형상이었다.

    괴물이 흉측한 부리를 벌리고 어깨를 퍼덕였다.

    “위험합니다!”

    마르크가 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괴물이 노리는 건 우리가 아니었다.

    “키이익!”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이 엄마를 향해 돌진했다.

    엄마의 이름을 외칠 시간도 없는 짧은 순간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을 슬로 모션처럼 볼 수 있었다.

    그때 내 손끝에서부터 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낯설진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고민하던 그 감각의 이름을 깨달았다.

    마나.

    그리고 내가 눈치챘을 때, 브라우니는 내 품에 없었다.

    “어, 엄마!”

    나는 뒤늦게 엄마를 부르며 뛰쳐나가려 했으나 마르크가 나를 붙잡았다.

    “위험합니다!”

    “놔요! 파타슈!”

    “네, 네!”

    파타슈가 반사적으로 마르크에게 마나를 내뿜었다. 바닥에 흙먼지가 일며 마르크가 뒤로 밀려났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의 팔을 뿌리치고 엄마를 향해 달렸다. 몬스터의 날개에 가려 엄마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퍼드덕.

    날갯짓 소리와 함께 괴물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는 그제야 엄마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말 형상의 무언가도.

    말?

    나는 눈을 의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것이 곧 작아져 내가 익히 아는 모습으로 변했다.

    “브, 브라우니!”

    “삐유!”

    브라우니가 엄마를 지켜준 건가?

    “크레페?”

    엄마가 놀란 듯 내 이름을 불렀다. 어느새 그녀는 호신용 검을 빼 들고 있었다.

    다친 것 같진 않았지만 아직 상황이 급박했다. 몬스터가 공중에서 날갯짓을 하며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안 돼, 크레페! 오지 마!”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옆에 있던 요새 책임자가 뒤늦게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완전 무장을 갖춘 게 아니기 때문에 몸을 덮는 몬스터의 그림자 밑에 선 그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퓨.”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브라우니가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내 하늘에서 작은 망아지와 몬스터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 마르크가 내 몸을 낚아채 들어 올렸고, 나는 발버둥을 치며 책임자를 향해 소리쳤다.

    “안전할 거라면서요!”

    “부, 분명히…….”

    “삣.”

    책임을 묻기에 그리 좋은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았다. 브라우니가 몬스터의 날개에 맞고 외마디 신음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제가 잡을게요!”

    파타슈가 마나로 바람을 일으켜 브라우니를 안전하게 잡았다.

    “일단 들어갑시다.”

    마르크가 서둘러 말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한 발도 떼지 못하고 다시 나를 내려놓았다.

    “…….”

    스릉.

    마르크가 검을 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아가씨, 돌발 행동은 하지 마세요.”

    “키이이익.”

    “끼이익!”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휘파람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메아리쳤다.

    괴물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고비는 이제부터인가.

    나는 우리 머리 위를 맴도는 반인반조의 괴물들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눈에 보이는 괴물은 세 마리였다. 숲에 더 숨어 있는 괴물만 없다면 말이다.

    음, 무서우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마르크가 조금씩 움직여 나를 성벽으로 몰았다.

    브라우니를 안은 파타슈와 나는 무사히 엄마와 합류했고, 엄마를 안내하던 책임자가 마르크의 반대쪽을 지키고 섰다.

    나는 곧바로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요?”

    “오지 말라니까.”

    짧게 대꾸한 엄마가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쳐다보더니, 우리를 지키는 데 집중하려는 듯 검을 도로 검집에 넣으며 책임자에게 물었다.

    “샛문은 없습니까?”

    “여기는 샛문보다 정문이 더 가깝습니다.”

    “공중전에 대한 대비는요?”

    “화살이 있긴 한데, 우리가 맞을 위험이 있어서 지금 사용하긴 힘듭니다. 사다리를 내리기에도…….”

    후웅.

    우리들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날개 달린 몬스터를 피해 사다리를 올라가는 건 ‘나 좀 먹어줍쇼!’ 하는 것과 똑같을 것이었다.

    “…저것들을 자극하지 않게 천천히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키에엑!”

    엄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몬스터 한 마리가 우리에게로 돌진해 왔다.

    마르크가 그것의 발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

    검끼리 맞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공격은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괴물은 발톱으로 마르크의 검날을 꽉 쥐고 버티고 있었다.

    날개를 포함하면 괴물은 마르크의 세 배도 넘는 크기였다. 마르크가 힘에서 밀리는 듯 이를 악물었다.

    “크윽.”

    나는 다급히 파타슈에게 고개를 돌렸다.

    “브라우니는요? 괜찮아요?”

    “네, 아마…….”

    파타슈가 팔을 내밀어 브라우니를 보여주었다.

    브라우니는 눈을 감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피가 나진 않았지만 어딘가를 세게 얻어맞은 게 분명했다.

    아까 잠깐 커진 것 같아 보였는데, 어떻게 한 거지?

    나는 입술을 깨물고 브라우니의 몸에 손을 올렸다. 아까 전처럼 기묘한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내가 아까 뭘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더 할 수 있으면…….

    “위험해!”

    엄마가 나와 파타슈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몬스터의 날개깃이 내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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