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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27)화 (27/181)
  • 27화 

    몽블랑의 마나가 냉기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주 차가운 얼음이나 드라이아이스 같은 것을 상온에 놓으면 생기는 흰 연기가 내 주변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주변에 습기라도 있었다면 서릿발이 휘날렸을 것이다.

    “야, 크레페. 넌 아무렇지도 않아?”

    후다닥 멀어졌던 카눌레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내가 품에 안은 브라우니를 쳐다보았다.

    “삐?”

    브라우니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괘, 괜찮아요?”

    키슈도 나를 돌아보며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나는 이런 느낌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브라우니가 부화하던 그날, 파타슈가 알에 마나를 넣으려 했을 때.

    그때 파타슈의 마나는 난반사되듯 주변에 퍼졌다가 순식간에 알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꼭 지금처럼.

    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브라우니가 나를 지켜준 거예요?”

    “글쎄요. 이게 반사적인 건지 의도적인 건지.”

    몽블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슈트 가슴주머니에 꽂혀 있던 손수건을 꺼내 가볍게 손을 닦았다.

    “브라우니를 따로 놓고 크레페 님께만 위해를 가해보는 것도 좋은 시험이 되겠네요.”

    “뭐요?”

    카눌레가 인상을 찌푸렸다. 몽블랑이 손수건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싱긋 웃었다.

    “농담입니다.”

    “…….”

    나는 얼떨떨하게 품 안의 브라우니를 내려다보았다. 브라우니는 여전히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몽블랑이 키슈를 향해 말했다.

    “어쩌면 페가수스의 가죽에 순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연구할 게 많아질 것 같은데.”

    “가죽 벗끼는 건 안 대요!”

    나는 브라우니를 꽉 껴안고 외쳤다. 내게 뭔가 하겠다는 말보다 브라우니를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더 무서웠다.

    “하하, 아직 연구할 게 많은데 그렇게 함부로 죽이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데려가는 것도 나중으로 미루죠. 각인한 상태에서 하는 연구도 필요할 테니까. 무엇보다…….”

    몽블랑이 파타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분의 사랑의 결실을 제가 빼앗아갈 순 없으니까요.”

    …이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몽블랑이 다시 키슈에게 물었다.

    “키슈,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해?”

    “아직은 문제없어.”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는 걸로 하지. 쉬제트 백작께서 걱정이 많으시던데, 내가 보증했다고 하면 별문제 없을 거야. 황제 폐하께도 내가 전해드릴 테니 걱정 말고. 피오르한테 안부 전해줘.”

    그렇게 말하며 몽블랑은 다시 장갑을 손에 끼웠다.

    정말? 이렇게 돌아간다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내가 걱정한 것과 완전 반대되는 진행이었다. 어쩐지 김이 빠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너무 쉬워서 도리어 의심스럽기도 했다.

    “후작님, 우리 아빠랑 친해여?”

    “같은 왕당파거든요. 아, 폐하의 편이라는 뜻입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알기로 그는 우리 쉬제트 백작가와도, 아펠 황태자와도 정치적 대립 관계였다. 그렇지 않다면 몽블랑이 왜 우리 엄마와 갈레트를 암살했겠는가.

    하지만 왕당파라면 아펠 황태자와 척을 질 리가 없었다.

    설마 조만간 몽블랑에게 무슨 일이 생기나? 그래서 마음을 바꾸고 엄마를 암살하게 되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접대실을 나갈 채비를 하는 몽블랑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자깐만요! 후작님, 가지 마쎄요. 아니, 저두 같이 갈래요.”

    별안간 그렇게 요청하자 몽블랑이 놀란 듯 눈을 껌뻑거렸다.

    나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몽블랑이 날 향해 허리를 숙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영애, 양다리는 나쁜 거예요.”

    “역시 크레페 님, 너무 조숙하시다니까.”

    키슈가 내 속도 모르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아닌데.

    예기치 않게 양다리 미수의 파렴치한이 되어버린 나는 순간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부탁할 상대가 잘못됐다는 거.

    나는 몽블랑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파타슈에게 브라우니를 떠맡겼다.

    홑몸이 된 내가 접대실을 뛰쳐나갔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르크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엄마한테 가려구요.”

    “응? 왜 그러니?”

    마르크에게 답하자마자 엄마의 목소리가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고개를 돌리니 마침 파티 정리가 마무리된 듯 엄마와 갈레트가 복도를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그쪽으로 달려가 엄마의 바지 자락을 잡아당겼다.

    “엄마, 나…….”

    몽블랑 후작령에 가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엄마의 얼굴을 보니 차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죽음까지 앞으로 겨우 1년이었다. 실패했을 때 돌이킬 방법도 없었다.

    만일 내가 잘못 생각한 거라면? 내가 어떻게 설득하든 몽블랑이 엄마를 죽이려 한다면? 내가 몽블랑의 영지까지 들어가서도 암살을 막지 못하면?

    차라리 여기에서 엄마와 갈레트를 지키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내가 몽블랑의 저택까지 쳐들어간다는 게 용기인지 객기인지 스스로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엄마와 갈레트의 죽음을 막을 가능성이 있다면 뭐든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막상 그들의 곁을 떠나기엔 겁이 났다.

    “…….”

    결국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엄마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나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브라우니 때문에 그러는 거지? 우리 딸, 많이 속상해?”

    엄마가 나를 위로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뺨에 붙은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괜찮아, 그 애는 건강할 거야. 나중에 같이 만나러 가자. 응?”

    “브라우니 안 데려가신대요.”

    “어머.”

    접대실의 문이 열리며 키슈가 나왔다. 엄마가 몸을 일으켜 세우는 뒤로 갈레트가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이 보였다.

    “정말요?”

    “네, 폐하께는 제가 말씀드리기로 했습니다. 아직 페가수스 성체도 아니고, 키슈 님과 연구 결과를 공유하면 별문제 없을 것 같아서요.”

    몽블랑도 키슈의 뒤를 이어 접대실을 나왔다.

    갈레트가 내 어깨를 도닥이며 웃었다.

    “뭐야, 놀랐잖아! 잘됐다, 크레페.”

    그러나 나는 그에게 마주 웃어줄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몽블랑을 쳐다보았다. 몽블랑이 나를 내려다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크레페 님이 정식으로 사교계에 진출하는 열다섯이 되면 제 저택에 초대해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는 편지로 참아주시길.”

    그러고서 몽블랑은 복도를 걸어 나갔다. 엄마가 그를 배웅하러 따라갔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몽블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일곱 살이 암살을 막아내는 법 】

    시간은 훌쩍 지나 내 나이도 일곱 살이 되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 원작에서 엄마가 죽었던 그 나이.

    나는 일곱 살이 되는 생일 당일부터 엄마의 집무실 근처를 맴돌았고 밤에는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아직 여름이건만, 이런 생활을 1년 내내 지속해야 한다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크레페 님, 갠차나요?”

    파타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집무실의 창문 너머로 엄마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내가 파타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요즘 잘 못 자는 거 가타서요.”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일 년 전과 마찬가지로 자그맣기만 한 브라우니가 풀밭을 뒹굴며 놀고 있었다.

    “하아… 브라우니가 대체 왜 안 크는 걸까요?”

    참지 못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브라우니를 데려온 이유는 녀석을 키워서 엄마와 갈레트의 경호원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직도 세상 천진하게 놀고만 있으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성장을 하고 있긴 해요. 단지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게 문제죠.”

    키슈가 태연히 무릎을 굽히고 브라우니 옆에 앉았다.

    “다른 페가수스가 없으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나눠 주는 마나에 원인이 있는 것 같아요.”

    “무슨 원인요?”

    내가 자세를 고쳐 앉고 물었다. 치마폭이 팔락거리자 브라우니가 내 허벅지 위에 올라와 쓰다듬어달라는 듯 뭉그적거렸다.

    브라우니는 요즘 틈만 나면 내 배나 허벅지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아무래도 푹신푹신해서 그런 것 같았다.

    날 좋아해 주는 건 고맙지만 예상되는 이유가 민망하기 그지없었기에, 나는 슬쩍 치맛자락을 당겨 브라우니를 잔디밭으로 내렸다.

    “아들?”

    키슈가 짧게 손짓했다. 파타슈가 다가와 브라우니의 몸에 손을 대고 마나를 나눠 주었다.

    키슈가 그 모습을 보며 설명했다.

    “브라우니는 가공되지 않은 순마나를 영양분으로 체내에 저장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마나를 고순도로 만들기 위해 제가 정화 마법진을 쓰거나 그랬는데, 그런 편법은 안 먹히는 모양이더라고요. 제가 없는 사이에 브라우니가 태어난 것도 그래서였겠죠.”

    그녀의 말에는 여전히 어려운 단어가 많았다. 나는 대충 눈치로 때려 맞히고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키슈는 날 빤히 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쉽게 설명할게요.”

    못 알아들은 티가 그렇게 많이 났나?

    나는 멋쩍게 웃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브라우니가 마나를 먹고 큰다는 거예요. 문제는 파타슈 혼자 그 마나를 다 대기가 힘들다는 거고요. 처음엔 저도 제 마나를 브라우니에게 나눠 주려고 했는데…….”

    키슈가 파타슈의 손 옆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브라우니는 키슈의 손이 닿든 말든 여전히 파타슈의 마나를 음미하며 늘어져 있었다.

    곧 키슈가 마나를 움직였다. 그녀가 마법진을 띄울 때 그랬듯 붉은색의 아지랑이가 그녀의 손 주변에 일렁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파타슈의 마나와 달리 브라우니에게 흡수되지 않았다. 마치 브라우니를 중심으로 얇은 막이 그 기운을 반사시키는 것 같았다. 작년에 몽블랑이 브라우니를 위협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키슈가 다시 손을 뗐다.

    “브라우니가 부화할 때, 크레페 님이 알을 안고 있었다고 하셨죠?”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슈가 마저 설명했다.

    “아무래도 그때 브라우니가 두 사람을 부모로 인식한 것 같아요. 크레페 님과 파타슈의 마나만 영양분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 마나는 튕겨내는 거죠.”

    “그럼…….”

    “크레페 님이 직접 마법을 배워서 브라우니를 키우든가, 파타슈가 혼자 브라우니를 성장시킬 때까지 기다리든가. 방법은 그것뿐이겠네요.”

    설명이 끝난 듯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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