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갈레트의 팔을 확 잡아당기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천장! 브라우니!”
“에? 윽.”
얼빠진 소리를 내며 위를 올려다본 갈레트가 대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갈레트가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덩달아 팔을 휘둘러 귀족들의 시선을 잡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래요! 오늘 날씨도 좋은데 다들 나가서…….”
음, 이렇게 일차원적인 해법을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나는 잠깐 뒤통수를 긁적거리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내가 우왕좌왕하는 걸 구경하고 있던 듯한 카눌레가 다가와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움? 글쎄! 오늘 날씨가 너무 조아서 그룬가!”
“삐이.”
“어, 지금 뭔가 이상한 소리가…….”
“우와와와! 저기 바!”
스리슬쩍 끼어든 불청객 같은 소리에, 나는 억지로 카눌레와 몽블랑의 등을 떠밀며 바깥을 손가락질했다.
뭔가를 발견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내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서 마침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불같이 새빨간 머리색을 가진 키슈와 갈색 피부의 파타슈였다.
“키슈?”
“아? 몽블랑, 네가 여긴 무슨 일로…….”
몽블랑과 키슈는 마탑에 있던 시절에 페가수스 논문을 같이 썼던 동료라고 그랬다. 서로가 여기 있는지는 몰랐던 듯, 그들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휴, 일단 몽블랑은 키슈가 붙잡고 있어주겠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 좀 이상하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한 카눌레가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쪽에 신경도 안 쓰고 파타슈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게 연신 무시당한 카눌레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갈레트에게로 향했다.
파타슈와 함께 파티장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간 나는 이쪽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파타슈 님, 브라우니 찾았써요!”
“네, 저희두 브라우니의 마나를 느껴서… 앗!”
파타슈가 말하다 말고 탄성을 내질렀다. 브라우니를 발견한 것이다. 브라우니는 여전히 공중에 동동 뜬 채 잠들어 있었다.
“피유…….”
귀를 기울이자 작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고놈 참 귀엽기도 하지.
아니, 이럴 때가 아니라구!
나는 도리질을 치고 파타슈의 팔을 확 끌어당겨 다시 그가 나를 보도록 했다.
“파타슈 님, 저기까지 장풍 쏠 수 있써요?”
“네? 장뿌가 머예요?”
“바람이요!”
자세한 설명을 하기엔 상황이 다급했다. 나는 계획을 최대한 간추려 말했다.
“제가 저 샹들리에 밑에 있쓸 테니까, 파타슈 님이 바람으로 브라우니를 훅 밀어서 저한테 보내주쎄요. 저는 저거 그냥 인형인 척하구 나갈게요. 할 수 있겠써요?”
“자, 정원은 저쪽입니다~”
“날씨가 좋네요!”
“형! 엄마! 잠깐 얘기 좀……!”
엄마와 갈레트는 아직도 귀족들을 밖으로 내몰기 위해 바람을 잡고 있었다. 손님들도 집주인이 저렇게 말하니 못 이기는 척 한두 명씩 바깥으로 나갔다.
파타슈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따라 파티장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소란이 일어났다.
“어머! 평민 아이가 여기까지 어떻게…….”
아직 파티장에서 안 나가고 있던 귀족들이 파타슈의 생김새와 편한 옷차림을 보고 불청객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니에요! 이분은…….”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아무도 어린아이인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여기 바움쿠헨 노예가 들어왔어요!”
“어서 내보내주세요!”
“자, 자깐…….”
나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노예 소리를 들은 파타슈가 발끈한 표정으로 귀족들을 향해 팔을 치켜들었다.
그때 나와 파타슈의 눈이 마주쳤다.
“…….”
파타슈의 갈색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파타슈는 입술을 깨물고 귀족들 대신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샹들리에를 흔들고 브라우니의 엉덩이 털을 들썩이게 했다.
“쀼?!”
브라우니가 고무줄 총에 맞기라도 한 듯 푸드덕거리며 눈을 떴다.
나는 다급히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샹들리에 밑에서 두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내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브라우니가 사람이 바글대는 것을 보고 놀라 허공에서 우왕좌왕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티장은 위아래로 난장판이었다.
키슈는 아직 몽블랑과 얘기 중인 것 같았고, 가족들은 손님들을 내보내느라 바빠 이쪽에 신경 쓰지 못하는 듯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방금 이상한 소리 나지 않았어요?”
“그보다 저 아이 좀 쫓아내 봐요.”
“수플레 백작 부인님?”
파타슈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차마 두고 볼 수 없는 광경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우리 애 아빠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쎄요!”
“…….”
“…….”
그 순간 찬물이라도 뿌린 듯 장내가 조용해졌다.
정문 쪽에 있던 엄마와 가족들도, 샛문 쪽에 있던 몽블랑과 다른 손님들도 모두 날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키슈는 그 적막을 틈타서 허공을 둥둥 떠다니던 브라우니를 점프로 잡아챘다. 그녀가 옷자락 속에 브라우니를 숨기고 후다닥 멀어졌다.
“저… 크레페 님?”
이름 모를 귀족 한 명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나는 발을 한 번 구르고 당당히 말했다.
“파타슈 님은 우리 브라우니를 만들어주신 분이라꾸요!”
“브라우…니요?”
“네! 저 아이는 집안의 요리를 책임지고 있는 에이미의 수제자랍니다. 에이미가 빈 접시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한 거죠?”
엄마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나는 눈에 보이는 빈 쟁반을 파타슈에게 떠맡기고 나도 빈 접시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파타슈의 팔을 질질 끌고 파티장을 나갔다.
* * *
“크레페, 약혼 축하해.”
카눌레가 무심한 투로 말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자리에 갈레트 오빠가 없는 걸 다행으루 생각해.”
나는 흥,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카눌레가 못 들은 척 소파로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는 접대실이었다. 갈레트와 엄마는 아직 손님들과 함께 파티장에 있었고, 나는 키슈와 파타슈, 몽블랑과 함께 파티장을 빠져나온 상태였다.
“크흠, 페가수스가 각인한 것 같다고?”
몽블랑이 헛기침을 하고 키슈에게 질문했다. 키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뭔가 굉장히 어려워 보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다가 포기하고 카눌레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파타슈와 함께 파티장을 나간 이후의 상황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우리 얘기 했써?”
카눌레가 파타슈를 흘끗 쳐다보고 대답했다.
“갈레트 형이 좀 심하게 삐진 것 빼곤 별일 없었어. 누가 품위 없이 그런 얘길 대놓고 물어보겠냐? 뭐, 나중엔 소문이 퍼질 수도 있겠지만. 네가 바움쿠헨에서 온 시종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재송해요. 크레페 님이 저 땜에 그런 오해를 받게 대서.”
파타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침울해하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파타슈의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사람들이 아직도 파타슈 님을 시종으로 안다는 거자나요. 차라리 쉬제트가에서 후원해 주고 있는 천재라고 말해 줄 껄 그랬써.”
나는 진심이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귀족들 사이에서 굳어있던 파타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특히 파타슈가 귀족에게 모욕을 되갚아주려던 순간, 그가 날 발견했을 때의 표정이 말이다.
차라리 카눌레에게 했을 때처럼 말썽이라도 부리지. 어린애가 멋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게 이렇게 마음 짠해지는 일이었다니.
그러나 내 심정을 모르는 카눌레는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서라, 그럼 진짜 약혼한 줄 안다.”
“파타슈 님이 노예 소리 듣는 것뽀단 나아!”
“뭐?! 누가 우리 아들한테 그런 말을 했어?”
몽블랑과 대화하던 키슈가 번뜩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이미 한참 지난 일이었기에 나는 이름 모를 귀족들을 고자질하는 대신 한숨만 내쉬었다.
“아들, 미안해! 내가 이 아저씨를 오랜만에 만나서.”
“아, 아니에요. 갠차나요. 크레페 님이 말려주셨구.”
말리다가 지금 이 상황이 된 거긴 했지만…….
그래, 의도가 좋았으니 이해해 주겠지.
“이 애가 네 아들이라고?”
몽블랑이 파타슈에 대해 물었다.
키슈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 넌 처음 보지? 여긴 파타슈야. 페가수스의 알을 부화시킨 것도 우리 아들이었고. 대단하지 않아?”
“그렇군. 저 애가…….”
대화가 다시 이어지려는 낌새가 보여서 나는 내 앞에 있는 브라우니에게 한눈을 팔았다. 브라우니는 기다란 테이블에 몸을 비비적거리며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단순히 돌의 시원한 감촉을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행복해 보이니 됐다.
“크레페 님.”
몽블랑이 내게 말했다.
“브라우니를 한번 불러보시겠습니까?”
“네에. 끄흠. 브라우니?”
“삐?”
배를 뒤집고 뒹굴뒹굴하던 브라우니가 대답하듯 콧소리를 내고 똑바로 섰다.
이제 됐냐는 질문 대신 나는 몽블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몽블랑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몽블랑이 얇은 장갑을 벗고 한 손을 들어 브라우니의 뒤통수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그가 뭐라 입술을 달싹거리자 곧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기가 주변을 감쌌다. 마나가 움직일 때의 느낌이었다.
“몽블랑?”
키슈의 짧은 부름과 동시에 몽블랑의 손바닥에서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맞은편에 있던 내게까지 느껴질 정도의 한기였다.
그건 기묘한 광경이었다. 몽블랑의 하얀 머리카락도, 회백색의 블라우스도 전혀 미동이 없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브라우니는 그쪽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브라우니는 제 이름을 부르고 더 이상 아무 행동도 안 하는 나를 향해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둥실 날아 내 품에 안겼다.
얼떨떨하게 브라우니를 껴안은 것과 동시에, 몽블랑의 마나가 내 주변을 덮쳤다.
“윽.”
파타슈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꽉 감았다.
“으앗! 뭐야, 이거!”
내 옆에 있던 카눌레는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 수 미터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 키슈가 몽블랑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몽블랑, 이건 심하잖아!”
그녀의 손 위에는 마법진이 떠 있었다.
그러나 ‘심하다’고 했던 키슈의 말과 다르게, 나는 멀뚱히 두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