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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25)화 (25/181)
  • 25화 

    조금 늦긴 했지만 그래도 오해는 푸는 게 좋겠지 싶어 가볍게 말했다.

    “별로 중요한 거 아니자나요.”

    “구래요?”

    파타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는 우리 브라우니를 부화시켜 줄 사람이라면 다른 건 상관 안 했꺼든요.”

    나는 브라우니를 바닥에 놓고 벤치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파타슈의 앞에서 치맛자락을 들고 살짝 무릎을 굽혔다.

    “늦었찌만 브라우니의 아빠가 되어주셔써 감사합니다, 파타슈 님.”

    “저, 저야말로 절 후원해 쭈신다고 해주셔써…….”

    “삑!”

    파타슈가 허둥지둥 벤치에서 내려오다가 브라우니를 밟았다.

    깜짝 놀란 브라우니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그리고 브라우니 위에 발을 얹고 있던 파타슈는 스카이 서핑을 하듯 허공에 떴다가 그대로 벤치에 뒤통수를 박고 넘어졌다.

    “악!”

    “개, 갠차나요?”

    나는 다급히 파타슈의 머리를 살폈다. 다행히 피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파타슈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나 아픈 것보다 부끄러운 게 더 큰 것 같았다.

    그는 우는 대신 입술을 꽉 다물고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갠차나요?”

    고집 센 어린아이 같은 면모에 나는 헛웃음을 짓고 그를 따라 똑바로 섰다.

    근데, 뭔가 잊은 것 같은데?

    “어, 브라우니는요?”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덩달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파타슈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쩌, 쩌기……!”

    내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브라우니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아.”

    얼빠진 나의 탄성과 동시에 브라우니가 나뭇가지 사이로 쏙 사라졌다.

    “으아아악! 브라우니이이!”

    “키, 키슈 니이임!”

    수풀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느라 내 몰골은 완전 거지꼴이었다.

    본저택으로 돌아오자 제복을 입은 갈레트가 밖에 나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벌써 파티장에 갈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아직도 준비 안 했어? 아침부터 어딜 갔다 와?”

    나는 갈레트의 질문을 듣고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오빠아아…….”

    “왜, 왜 그래, 크레페?”

    “브라우니가…….”

    나는 눈물을 참으려 드레스 자락을 꽉 잡았다. 파타슈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키슈가 살짝 끼어들었다.

    “브라우니가 없어졌대요.”

    갈레트가 키슈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어, 먹는 거?”

    “말구!”

    이럴 때조차!

    나는 억울함이 담긴 샤우팅을 내지르고 입술을 깨물었다.

    파타슈가 다가와 어색하게 내 등을 토닥여 위로했다.

    “갠찮을 꺼예요…….”

    “뭐야, 어떻게 된 건데?”

    갈레트가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듯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슬쩍 파타슈를 밀어내고 내 옆자리를 차지한 후, 제 옷이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내 어깨를 감싸며 토닥였다.

    조금 감동적이었지만 조금 기가 막히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얘기나 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나는 눈물이 고인 눈을 부릅뜨고 갈레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오빠, 브라우니가 날아갔써. 이쪽 방향인 건 봤는데 아직 못 찾았구! 오빠도 도아줘!”

    “괜찮아, 브라우니는 엄청 똑똑하잖아. 몇 번 부르면 바로 나오겠지.”

    “문제는 그게 아니죠.”

    키슈가 끼어들었다.

    우리 셋이 그녀를 돌아보자 키슈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곧 파티 시작하잖아요. 들키면 큰일 날지도 몰라요. 황제 폐하께 비밀로 페가수스를 키웠다는 게 들통나면… 어쩌면 반역죄를 뒤집어쓰게 될지도?”

    나와 갈레트가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냐 싶기도 했지만, 정치판이 워낙 살벌하니 설마가 사람 잡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갈레트가 당황해 말했다.

    “그, 그럼 저도 같이 찾을게요!”

    “파티 주인공이 빠져서 어떡하려고요? 손님들이 왜 늦냐고 물어보면, 페가수스 찾느라 그랬다고 하게요?”

    “그럼 어떠케요!”

    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키슈가 조용히 하라며 쉿, 소리를 내고 나를 저택으로 떠밀었다.

    “일단 파타슈랑 제가 더 찾아볼게요. 수플레 님께도 말씀드릴 테니, 두 분은 파티장에 가 계세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고요!”

    사형당할 일 있나. 말하라고 해도 절대 말 안 할 거다!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리가 거의 그렇듯, 오늘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은 파티의 당사자인 갈레트보다 쉬제트 백작가와의 친목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갈레트는 엄마와 함께 단상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느라 바빴고, 나와 카눌레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어쩐지 데자뷔가 느껴지는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언제나처럼 어리벙벙하게 움츠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은근슬쩍 걸음을 옮겨 밖이 잘 보이는 쪽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혹시 아나? 우연히라도 브라우니를 발견하게 될지.

    “뭐 하냐?”

    갑자기 첩보원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날 보며 카눌레가 미간을 찌푸렸다.

    “쉿. 그런 게 이써.”

    사정을 얘기하면 카눌레도 아군이 되어주겠지만 사람들이 가득한 파티장에서 그런 비밀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대충 대답하고 발코니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은 드레스가 아니네요?”

    “아, 안녕하쎄요.”

    몽블랑 후작이었다. 나는 몸을 굳히고 제복 차림에 맞는 기사의 예로 인사했다.

    내가 파티 때 드레스를 입은 건 갈레트의 친구들만 왔던 어제, 그리고 맞는 옷을 찾지 못했던 작년뿐이었다.

    내가 기사의 예를 취하자 몽블랑도 오른손은 왼쪽 가슴에, 왼손은 뒷짐을 지고 살짝 허리를 굽혀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잘생긴 것과는 별개로 소름 끼칠 만큼 냉랭한 외모부터 어딘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미소까지. 작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주변의 눈치를 한 번 보고 먼저 말을 걸었다.

    “브라우니 때문에 온 거죠?”

    “브라우니요? 아, 네.”

    잠깐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몽블랑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우니가 페가수스의 이름이라는 걸 이제 막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이런 곳에서 페가수스 얘기를 꺼낼 순 없지만 브라우니인 척할 수는 있으니까.

    음, 이럴 땐 이런 이름이 참 좋구나.

    “브라우니 내 꺼예요. 후작님은 브라우니에 대해 잘 모르시자나요.”

    “저는 브라우니에 대해 논문을 쓴 적도 있는데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브라우니는… 음, 제가 잘 구워드리겠습니다.”

    “…….”

    문맥으로 맞춰보자면 대충 잘 보살펴 주겠다는 뜻이었겠지만, 먹는 브라우니로 대입하니 저런 단어가 나온 것 같았다.

    나는 가는눈을 뜨고 그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몽블랑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첫사랑보다 브라우니가 더 좋나 봐?”

    몇 걸음 뒤에 있던 카눌레가 얄미운 말을 하며 다가왔다. 그가 몽블랑과 못 나눈 인사를 나누고 말했다.

    “얘가 원래 단걸 좋아해요. 저번에 보내주신 마론 슈도 앉은 자리에서 한 상자를 다 먹더라고요. 마론 슈 열 상자만 더 보내주시면 브라우니는 포기할걸요? 저기, 배 똥똥한 거 보이죠?”

    카눌레가 밉살스러운 말을 연속했다.

    발끈한 나는 카눌레의 정강이를 향해 킥을 날렸다. 그러나 카눌레는 슬쩍 몸을 돌려 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술 배우라고 하지 말걸.

    “단걸 정말 좋아하시나 보네요. 그러고 보니 여름에도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보셨죠?”

    나와 카눌레의 다툼을 멈추기 위해서인지 몽블랑이 끼어들었다.

    “마법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보여드릴 수 있는데, 잠깐 나가실까요?”

    페가수스 얘기를 하기 편한 곳으로 나가자는 뜻으로 보였다.

    나는 카눌레와 시선을 교환했다. 카눌레가 몽블랑을 올려다보며 짧게 물었다.

    “마법진도 보여주실 거죠?”

    “아… 원하신다면요.”

    몽블랑이 잠깐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카눌레가 만족한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몽블랑을 따라 파티장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파티장 제일 높은 곳, 금박이 입혀진 화려한 천장의 그림 아래 마법등을 엮어 만든 샹들리에.

    “삐휴…….”

    브라우니가 그 옆에 동동 떠서 잠들어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저놈 저거 왜 저기 있어, 저거!

    순간 숨이 멎을 뻔했지만 다행히 비명은 삼켰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척 고개를 내렸다. 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하다 못해 아찔할 지경이었다.

    어떡하지? 여기서 내 품으로 내려오라고 할 수도 없고. 저렇게 가만히 있다가 다른 사람 눈에 띄는 거 아냐?

    “크레페 님?”

    “네, 넵.”

    나는 몽블랑에게 재빨리 대꾸했다.

    지금 제일 위험한 사람이 바로 몽블랑이었다. 만일 키슈의 말대로 브라우니를 숨기고 있던 것이 큰 죄가 된다면, 몽블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니까.

    ‘저도 여기에 페가수스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하고 아빠를 배신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나마 다행으로, 몽블랑이나 카눌레는 내가 어색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나는 단상 위에 있는 엄마와 갈레트를 확인하고 헛기침을 했다.

    “끄흠, 저 잠깐 할 일이 생각나서요. 두 뿐은 마법진 갖구 놀고 이써요.”

    “뭔…….”

    저를 어린아이 취급했다고 생각했는지 카눌레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후다닥 단상 위로 올라갔다.

    “엄마, 엄마.”

    “응?”

    내가 다급히 엄마의 옷자락을 당겼다. 그녀가 나를 따라 단상의 구석으로 왔다.

    갈레트가 엄마의 몫까지 악수하며 파티에 초대된 귀족들을 상대하고 있는 동안, 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돌아보지 말구 들어요. 브라우니가, 저기, 천장에 있써요.”

    “무…….”

    “쉬잇! 갑자기 쳐다보면 들킬 쑤도 있쓰니까!”

    “…….”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면 상황이 이대로 끝날 수도 있을 위기였으나,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엄마도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갈레트의 옆자리로 돌아가 인사를 계속했다.

    나는 천장을 흘끗 곁눈질했다. 여기 단상 위에서도 분명 보였다. 살랑살랑 움직이는 하얀 꼬리와 초콜릿처럼 먹음직스러운 색의 허벅다리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때문에 조금 가려져 있긴 했지만, 몇 번 봐도 브라우니가 틀림없었다.

    엄마도 악수를 하는 척하며 브라우니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기품과 품위가 느껴지던 그녀의 여유로움에 슬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제분이 벌써 열두 살이라니, 정말 시간이 빠르네요.”

    “하하, 네, 그러게요. 일단 나가실까요?”

    “예?”

    엄마가 세상 어색하게 인사를 받은 후 갑자기 단상에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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