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너 오기 전에 다 끝났어!”
크바스가 귀찮다는 듯 날 밀어내고 젤라토와 함께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도토리 같은 게 굴러와 갖곤…….”
“머야?!”
“크레페, 진정해!”
당장이라도 씩씩거리며 방을 뛰쳐나가려는 걸 갈레트가 말렸다.
“괜찮아, 도토리는 귀여우니까.”
…오빠, 내 편 맞아?
순간 벙찌는 기분이었으나 도리질을 해 겨우 털어내고, 본래 용건을 떠올린 내가 후다닥 카눌레에게 달려갔다.
“무릎 말구는? 또 어디 다친 데 이써?”
“괜찮다니깐.”
내가 카눌레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그의 팔다리를 들었다 놨다 하자, 카눌레가 파리 쫓아내듯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카눌레의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아이구, 여기 바! 손바닥도 다 까졌네. 무릎이랑 다 잘 씻었찌?”
“하아.”
카눌레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잠깐 아까 있었던 일을 복기하며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무릎에 난 상처는 카눌레가 공격했을 때 작은 돌들에 쓸린 것 같았고, 손바닥은 마지막에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까진 것 같았다.
그럼 또 다쳤을 만한 곳은…….
아, 제일 중요한 머리를 안 봤잖아!
뒤늦게 깨닫고 나는 카눌레의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통을 샅샅이 살폈다.
이 잡아주는 원숭이처럼 카눌레의 검은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으려니 갈레트가 내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고 그대로 침대 밖으로 끌어당겼다.
“크레페, 그만하면 됐어.”
“만족하냐?”
카눌레가 까치집이 된 머리로 불퉁하게 말했다.
내가 좀 과민 반응했나?
“헤헤…….”
그제야 나는 평정심을 찾고 멋쩍게 웃었다. 카눌레가 혀를 차고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털었다.
“그래, 뭐. 내가 검술을 제대로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이기는 게 이상하지.”
나이 차이가 많이 난 만큼 경험도 체격도 상대가 안 됐지만, 카눌레는 오늘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나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말했다.
“그러케 말하지 마, 오빠 오늘 잘했쓰니까. 마르크 아저씨도 오빠 칭찬 마니 했어.”
“칫.”
카눌레는 아직도 믿는 둥 마는 둥 했다.
지원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갈레트에게 눈치를 주었다. 갈레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난 크바스 형이 그렇게 진지하게 나온 것도 처음 봤는걸. 나랑 싸울 때는 맨날… 크흠.”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던 듯, 갈레트가 말하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너 의무실 간 다음에도 연무장이 시끌시끌하더라. 네가 검술 배운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니까.”
“…….”
그렇게 어르고 달래자 카눌레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충 위로가 됐겠지, 하고 안도하려던 찰나 갈레트가 슬쩍 물었다.
“혹시 크레페한테 위로받고 싶어서 속상한 척하는 거야?”
“내가 형인 줄 알아?!”
카눌레가 발끈하며 일어났다.
아무래도 갈레트를 끌어들인 게 잘못이었나 보구나.
“이, 이제 가자, 오빠.”
나는 뒤늦게 깨닫고 갈레트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바로 방을 나가지는 못했다.
까치발을 해서 카눌레의 방문을 열자 바로 앞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무순 일이에요?”
내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다들 여기에 와 있다고 하길래. 들어가도 괜찮아?”
엄마는 나와 갈레트를 뒤로하고 카눌레를 향해 물었다. 카눌레가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엄마가 온 이유가 기사단장에게서 카눌레의 일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 같이 티 테이블에 둘러앉은 그 순간까지도 나는 참새처럼 가슴을 부풀린 채 콧대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런 위험한 짓, 다신 못 하게 해주세요, 엄마!
하지만 엄마는 갈레트나 카눌레가 아닌, 나를 보며 말했다.
“크레페, 저번에 페가수스 일로 아빠랑 연락했던 것 기억나?”
“네? 네에.”
나한테 용건이 있었던 건가?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우니가 부화한 후 엄마는 아빠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아빠의 반응은 놀람 그 자체였다. 하긴, 신기하다고 보낸 알에서 갑자기 전설의 동물이 태어났다면 놀랄 만도 했다.
그러나 아빠는 그 대발견에 대해 기쁨보단 걱정이 앞선 것 같았다. 우리끼리 숨기고 있기에는 그 발견이 너무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 원작에서도 아빠는 그 알이 보통 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황태자에게 그것을 바쳤다.
군인 정신으로 똘똘 뭉친 아빠이니, 우리가 브라우니를 꿀꺽하고 그대로 입을 닦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다.
“근데 왜요?”
나는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갈레트가 테이블에 올린 내 팔을 토닥이며 든든하게 말했다.
“괜찮아. 아빠가 믿을 만한 사람한테 상담해 보고 다시 연락해 주시겠다고 그랬잖아. 브라우니를 바로 빼앗아 가거나 하진 않으실 거야.”
“그…….”
엄마가 곤란한 말을 하려는 듯 잠깐 머뭇거렸다.
“사실 그분이 갈레트 생일 파티를 핑계로 여기 오시기로 했어. 페가수스, 아니 브라우니의 상태를 살펴볼 건데, 상황에 따라 브라우니를 떠나보낼 수도 있단다. 크레페, 너한테 미리 얘기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안 대요!”
나는 테이블을 쾅 치며 소리쳤다.
“크레페,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엄마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도 무작정 땡깡을 부리려는 생각은 없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남의 가족을 왜 멋대로 빼앗아가려 하느냐 울며불며 생난리를 피우고 싶었지만, 이렇게 어린애 같은 고집만 부려봤자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어른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엄숙하게 말했다.
“아라써요. 그럼 낼 오는 사람을 설득하면 대는 거죠?”
“뭐? 으음, 설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갈레트가 날 대신해 물었다.
“어떤 사람인데요?”
“너희도 아는 분이야.”
엄마는 어쩐지 나를 보며 살짝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몽블랑 후작님.”
“…크레페, 축하해. 1년 만에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됐구나. 이러다 결혼하는 거 아냐?”
카눌레가 은근슬쩍 놀리는 말을 했다.
곧바로 갈레트가 카눌레의 멱살을 잡을 듯 덤벼들었다. 엄마가 깜짝 놀라 둘을 말렸다.
카눌레의 방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파티가 시작되기도 전 이른 아침, 나는 파타슈가 묵고 있는 임시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손님용으로 지어진 객실과는 반대쪽에 있는 건물이었는데, 원래는 제1기사단의 연무장이었지만 그들이 모두 변방에 나가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내게는 초행길이었으나 제2기사단의 연무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거기까지 가기가 그리 힘들진 않았다.
마침 파타슈가 건물 밖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삐!”
파타슈의 품에 안겨 있던 브라우니가 날 발견하자마자 달려왔, 아니 날아왔다. 파타슈가 그다음으로 날 발견하고 어색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키슈가 있었다면 그렇게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등짝을 때렸겠지만, 나는 그가 난감해할까 봐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나는 브라우니를 안고 파타슈가 있는 벤치로 걸어가며 물었다.
“파타슈 님, 드러써요?”
“네에. 브라우니를 보내줘야 할지도 모른다구…….”
내가 무슨 말을 하러 온 건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파타슈가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앉았다. 다리가 공중에 대롱대롱 떴다.
나 역시 침울하게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내 다리도 바닥에 닿진 않았다.
“언제 오신대요? 그, 미들 만한 사람이라는 분요.”
“모르게써요. 이따 파티 때는 오신다구 들었는데.”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브라우니가 우릴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쀼?”
“…흑.”
나는 참지 못하고 브라우니를 인형 안듯이 꽉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이란 말인가.
내가 브라우니를 키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엄마와 갈레트를 암살의 위협에서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그 범인은 오늘 오기로 한 몽블랑이었다.
만일 몽블랑이 우리 가족을 없애버릴 생각이라면, 당연히 암살에 방해물이 될 브라우니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아빠는 믿을 만한 사람을 부른다더니 왜 하필 몽블랑을!
하아, 그래, 아빤 미래를 모르니까…….
나는 감정 조절이 서툰 사람처럼 분노했다가 체념하기를 반복하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위안이 되는 건 브라우니의 부드러운 꼬리털밖에 없구나.
나는 브라우니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우리 없써도 브라우니 잘 살까요?”
“글쩨요.”
“혹시 해부를 당한다거나 각쫑 실험에서 모르모트로 쓰인다거나 하면… 으으!”
나는 내 말에 내가 놀라 진저리를 쳤다.
파타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해부? 모르모트로?’ 하고 중얼거렸다. 다섯 살짜리에겐 너무 어려운 단어였나 보다.
하지만 묻지도 않은 설명을 먼저 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보다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브라우니와의 추억이 더 중요했다. 나는 파타슈에게 신경을 끄고 브라우니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지켜주께, 브라우니……!”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자신이 있진 않았다.
작년에 몽블랑을 처음 만난 후, 나는 그에게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내가 그와 친해지면 몽블랑이 우리 가족을 해치려 할 때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계산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몽블랑의 답신은 매번 사무적이었다. 대필을 시키는 것 같기도 했고, 매크로처럼 정해진 답변을 반복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나마 내 생일에 마론 슈를 선물로 보낸 걸 봐서는 날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뭐 그것도 예의상 보낸 선물이었다면 할 말 없지.
“에휴…….”
나는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확신은 없지만 어쩌겠는가. 브라우니를 위해서라면 몽블랑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늘어지는 수밖에.
흑흑, 어떻게든 설득해야지!
“크레페 님은…….”
내가 브라우니와 눈물의 교감을 하는 동안 가만히 날 바라보고 있던 파타슈가 입을 열었다.
“저한테 머 안 물어보네요?”
“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물었다.
파타슈가 머쓱한 듯 딴 곳을 쳐다보며 발을 휘휘 저었다.
“아니… 머, 평민일 때 어땠냐느니, 어디서 마법을 배웠냐느니, 그, 제가 오빠님을 첨에 넘어뜨려쓸 때도 암 말 안 해줘꾸…….”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나?
어쩌면 내가 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으니 친해지고 싶은 의사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