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23)화 (23/181)
  • 23화 

    중학생과 초등학교 저학년생의 대결이라니, 죽었다 깨어나도 카눌레가 이기는 그림은 상상이 안 됐다.

    나는 불안한 눈으로 마르크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카눌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망할, 이렇게 된 이상 카눌레 이겨라!

    나는 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후우.”

    카눌레가 작게 숨을 내뱉고 자세를 잡았다. 지난 몇 달간 이곳 연무장에서 수없이 봤던 그 모습이었다.

    “개시!”

    단장이 치켜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러나 둘 중 아무도 곧바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카눌레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신발을 바닥에 비벼 단단히 섰다.

    문득 축제 때 갈레트가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가 나가떨어졌던 것이 기억났다. 아무래도 이번엔 그때와 다르게 진행될 모양이었다.

    “잘하는 겁니다. 체급 차이가 나면 정공법으로는 힘드니까요.”

    마르크가 해설 위원이라도 된 듯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내가 어쩌다 이런 어린애랑 붙게 된 거야? 이겨도 쪽팔리겠네.”

    덩치는 대충 자세를 잡다 말고 투덜거렸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카눌레에게서 시선을 뗀 순간, 카눌레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챙!

    “참 나.”

    그러나 그 불의의 기습은 너무도 쉽게 가로막혀 버렸다. 카눌레가 이를 악물었다.

    덩치는 말 그대로 어린아이를 대하듯, 검의 각도를 슬쩍 틀어 카눌레의 검을 흘려보냈다.

    스릉.

    날이 서있지 않은 가짜 검이었지만 금속이라는 점에서는 진검과 다르지 않았다.

    서늘한 쇳소리가 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윽.”

    카눌레의 몸이 무게 중심을 잃고 기우뚱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을 뻔했던 그때, 카눌레가 검날을 바닥에 꽂고 몸을 바짝 낮춰 덩치의 정강이에 발차기를 먹였다.

    “악!”

    덩치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지만 자세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덩치는 금방 중심을 잡고 바닥에 꽂힌 카눌레의 검을 발로 찼다.

    “이 쥐방울만 한 게!”

    그러나 카눌레는 이미 그 검을 잡고 있지 않았다.

    카눌레는 어느새 그의 등 뒤로 돌아가 오금을 걷어찼다. 덩치가 무릎을 꿇을 듯 휘청했다.

    설마 이기나?

    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 그 순간이었다.

    “큭.”

    덩치가 재빨리 중심을 잡고 허리를 틀어 뒤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카눌레가 숨을 들이켜며 머리를 뒤로 젖힌 것과 동시에 쇠막대가 카눌레의 코앞을 가르고 지나갔다.

    카눌레는 그 자세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그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자, 덩치의 검이 카눌레의 이마를 겨누었다.

    “…….”

    “…….”

    주변이 적막했다.

    “종료!”

    단장이 외쳤다.

    그 순간 나는 별안간 전쟁터에 내던져진 샌님처럼 비틀거렸다.

    하마터면 갈레트보다 카눌레가 먼저 저세상에 갈 뻔했잖아!

    “크, 크레페, 괜찮아?”

    “이게… 매일 있는 일이야?”

    “아니, 보통 이렇게 위험하진 않은데…….”

    쓰러지려는 나를 붙잡고 갈레트가 말끝을 흐렸다.

    마르크가 어색하게 웃었다.

    “명예도 모르는 놈이네, 대련 중에 검을 놓다니.”

    덩치가 카눌레를 내려다보며 쯧, 혀를 차고는 말했다.

    “대결 상대를 쥐방울이라고 부르는 것보단 낫지.”

    “…….”

    카눌레도 안 지고 대꾸했다.

    하마터면 중상을 입을 뻔했으니 기가 죽을 만도 했지만, 그는 놀라울 만큼 평소와 똑같았다.

    덩치가 카눌레의 목을 겨누고 있던 검을 치우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려 기사의 예를 취했다.

    “백작님의 검을 빌렸습니다.”

    “…받았습니다.”

    카눌레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단장이 나서서 그들의 가검을 도로 가져갔다.

    검을 반납한 덩치가 갈레트를 발견하고 우리 쪽으로 왔다.

    나는 쫄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갈레트를 내 몸 뒤에 숨겼다.

    그러나 덩치는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갈레트에게 짧은 말을 건넸다.

    …내 키가 너무 작아서 그래.

    “야, 네 동생이 너보다 낫더라.”

    “당연하지, 누구 동생인데.”

    갈레트가 태연히 대답하며 내 양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재수 없는 놈.”

    덩치는 쯧, 혀를 차고 걸음을 옮겼다.

    분홍 머리 남학생이 그에게 후다닥 달라붙어 뭐라 이야기를 했다.

    갈레트의 생일 파티 첫날, 작은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나는 파티가 끝나자마자 갈레트를 이끌고 카눌레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오빠, 갠차나?”

    “…….”

    내가 노크하자 카눌레는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안에 들여보내는 대신 팔짱을 끼고 직접 몸으로 문 앞을 막아섰다.

    나는 재빠르게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왜 왔냐?”

    카눌레는 파티 때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반바지라 그의 무릎에 생채기가 나 있는 게 빤히 보였다.

    “걱정되니까 와찌! 아이구, 이거 바! 무릎에 상처 난 거!”

    나는 카눌레의 무릎에 손가락질을 하며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갈레트가 진정하라며 내 어깨를 살짝 눌렀다.

    카눌레가 문에 몸을 기대고 삐딱하게 섰다.

    “나 졌다고 놀리러 왔어?”

    “무순 말을 그러케 해?!”

    나는 왁 소리를 지르고 카눌레와 문 사이의 틈을 비집어 방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거기 선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안녕, 갈레트.”

    “…왜 왔냐?”

    분홍 머리 남학생, 그리고 카눌레와 싸웠던 덩치가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뇌리에서 걸러내지 못한 말을 꺼냈다.

    “저, 저 덩치가 여기 왜 이써?”

    “덩치?”

    덩치가 용케도 자기 얘기라는 걸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분홍 머리 남학생이 덩치의 뒤통수를 퍽, 소리 나게 때렸다. 덩치의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윽, 아프겠다.

    “이제 쟤한테도 결투 신청하려고? 넌 쉬제트 백작가라면 한 살짜리한테도 시비 걸 거야?”

    분홍 머리가 덩치에게 훈계했다.

    덩치가 뭐라 반발하지 못하고 혀를 찼다.

    “…쳇. 야, 네 동생들 하나같이 말버릇이 왜 이 모양이냐?”

    “크레페가 뭐? 크바스 형이 덩치가 크긴 하잖아.”

    갈레트가 뻔뻔하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와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카눌레의 방 안이 그가 허락하지도 않은 방문자로 가득 찼다.

    “하, 그래. 들어와라, 들어와.”

    카눌레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

    【 브라우니 소동 】

    갈레트의 생일 파티는 내일도 이어질 예정이었지만 이제 학생들은 거의 다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내일부터는 갈레트의 친구들보다 부모님의 지인들, 또는 쉬제트 백작가와 인연이 있는 귀족들이 모이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들도 벌써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설마 아직 남아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카눌레의 방에!

    “그래서 저 덩치가 우리 오빠 방에 왜 있냐구여!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

    “사과하러 온 거야. 그치, 크바스?”

    분홍 머리가 끼어들어 중재했다.

    덩치가 날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나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큰 사고가 일어날 뻔한 것 때문에 본인도 놀란 모양이었다. 굳이 사과하러 온 걸 보면 고의가 아니라는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검술을 오래 연마했으니 그런 반사적인 행동이 나온 거겠지. 분위기를 보니 카눌레도 사과를 받아준 것 같고.

    흐름을 보니 대충 훈훈하게 사태가 마무리되려는 듯했다.

    그러나 나까지 그 흐름에 몸을 맡기기엔, 아직 덩치에게 쌓인 감정이 많았다.

    까딱하면 갈레트의 생일이 카눌레의 제삿날이 될 뻔했잖아! 게다가 갈레트랑 매일같이 싸운다면서, 내가 못 보는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카눌레 오빠한테만 미안해여? 갈레트 오빠한테능요?”

    나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덩치를 째려보았다. 덩치가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저 쥐방울한테 왜?”

    “…….”

    아무래도 갱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군.

    나는 돌아서서 갈레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빠, 나 저 덩치 시러.”

    갈레트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나도 싫어.”

    “이 녀석들이…….”

    “크흠, 크레페라고 했지?”

    분홍 머리가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어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소개가 늦었네. 나는 젤라토, 저쪽 덩치는 크바스야. 갈레트랑은 같은 수업을 듣고 있어.”

    제법 신사적인 태도지만 덩치랑 같은 편이라는 점에서 이미 마이너스다!

    나는 대답 대신 그를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잠깐. 젤라토? 그거 아이스크림 이름인데?

    한 박자 늦게 그 사실을 떠올리고 나자 내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이 세계관에서 저런 이름을 가진 사람치고 평범한 엑스트라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그런 이름은 본 기억이 없었다.

    어쩌면 키슈의 아들이 파타슈였던 것처럼, 젤라토의 친인척 중에 주요 인물이 있는 건가?

    나는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고 젤라토에게 그의 풀 네임을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갈레트가 내게 바싹 붙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만해, 형. 무서워하잖아.”

    아무래도 내가 뒤로 물러난 것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결국 젤라토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뒤에서 덩치, 크바스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나한텐 잘도 대들더니만. 어디서 구르다 온 쥐방울 같은 게.”

    “지금, 크레페를 쥐방울이라고 부른 거야?”

    갈레트의 표정에 웃음기가 가셨다.

    나 역시 덩치의 버릇없는 태도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는 화를 내는 대신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레 물었다.

    “오빠? 설마 또 싸우려는 건 아니찌?”

    “설마. 그치, 얘들아? 크레페가 걱정하잖아.”

    젤라토가 웃는 낯으로 크바스와 갈레트를 번갈아 보았다.

    크바스가 쳇, 소리를 내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나자 갈레트가 날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그럼. 걱정하지 마, 크레페.”

    휴, 다행이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사람이 날 쥐방울이라고 부를 땐 가만히 있었으면서.”

    카눌레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음. 그건 참으로 내가 할 말이 없다.

    나는 차마 꺼내지 못한 위로를 삼켰다.

    “그래서 내 방엔 왜 왔는데?”

    카눌레가 어깨를 펴고 우리에게 물었다.

    대화가 시작되려는 낌새가 보이자 젤라토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크흠, 우리는 먼저 갈게. 오늘 미안했어.”

    “그래. 어, 많이 안 다쳐서… 아무튼 간다.”

    크바스는 끝까지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못하고 조금 민망해하는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의 앞을 가로막고 씩씩거리며 발을 굴렀다.

    “똑바로 해여! 미안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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