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사실 나와 카눌레는 파티 때만 되면 통하는 게 있었다.
우리 둘 다 아웃사이더 성향이 있어서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카눌레와 내가 제일 오순도순 지내는 때가 바로 파티가 열릴 때 아닐까.
“너,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카눌레가 날 흘겨보며 말했다.
나는 내심 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써. 오빠두 나랑 약속한 거야!”
파티가 시작되고, 나와 카눌레는 아까 약속한 대로 서로의 근처만 맴돌고 있었다.
그래도 대놓고 붙어 있긴 부끄러워 두 걸음 정도는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까지 파티가 있을 땐 온통 어른들뿐이었기에 이런 분위기는 낯설었다.
갈레트의 학교 지인들로 보이는 아이들은 이미 이런 사교 생활이 익숙한 듯 저마다 작은 잔을 손에 들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외국 드라마에서나 봤던 졸업 파티 같은 것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참고로 잔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와인이나 샴페인이 아니라 포도 주스 또는 과일 에이드였다.
하지만 저게 술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 나이대의 아이들이겠지만, 열 살도 안 된 내가 보기에 저들은 아이보단 어른에 가까웠다.
성인이 아니라고는 해도 이들 사이에서 내가 안정감을 느끼기엔 무리였다.
모임의 주인공인 갈레트는 우리와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단상에 올라갔다.
그는 윤기 나는 금발을 뽐내며 귀족 같은(실제로도 귀족이지만) 하늘하늘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소매는 펑퍼짐하면서도 손목엔 딱 붙는 비숍 슬리브였고, 목에는 프릴을 덧대어 만든 자보가, 그리고 가슴께에는 그 프릴 스카프 같은 것을 고정시킨 보라색 브로치가 눈에 띄었다.
얇은 블라우스를 입은 갈레트, 스탠딩 칼라 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카눌레, 몽실몽실한 시폰 드레스를 입은 나.
통일성이라곤 개뿔 없지만 뭐, 귀여우니 됐나.
혼자 잡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파티장의 기둥 사이로 여름의 햇살이 비추었다.
갈레트가 그 빛 아래에서 멈춰 섰다. 그가 입은 흰 블라우스와 금발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괴롭힘당하는 건 아니겠지, 하고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갈레트는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를 위해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저의 열한 번째 생일입니다. 처음에는…….”
“에이, 편하게 해~!”
누군가 장난스럽게 외쳤다.
말이 끊긴 갈레트가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크흠, 처음에는 다들 이렇게 친해질 줄 몰랐는데… 음, 다들 와줘서 고마워, 누나. 형도.”
결국 갈레트는 딱딱한 말투 대신 편한 호칭으로 인사를 마쳤다.
내게는 평생 오빠일 갈레트가 누나나 형 소리를 하는 게 뭔가 어색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했다.
“생일 축하해!”
학생들이 박수 치며 환호했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다가, 아이들끼리 편하게 즐기라며 홀을 나갔다.
갈레트는 그들의 반응이 민망한 듯 홧홧해진 얼굴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우리 갈레트 오빠, 학교에서는 완전 막내 역할이구나.
뭐, 그럴 만하지만.
내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갈레트가 어디 가서 낯을 가리거나 심술을 부리는 타입도 아니고, 학교 내의 유일한 꼬맹이라면 이런 반응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오빠 귀엽죠? 대단하죠?
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입이 근질거렸다.
“으으, 긴장했나 봐.”
갈레트가 곧바로 내게 달려와 나를 품에 꼭 안았다.
“아냐, 잘해써.”
나는 단번에 부정했다. 사실은 귀여웠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갈레트는 항상 내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으니 그 말은 참기로 했다.
“얘네가 네 동생이야? 어쩐지 어린애가 있다 했지.”
그때 한 소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말하는 걸 보면 갈레트의 친구인 것 같았지만, 입학을 늦게 한 건지 성장이 빠른 건지 그는 소년이라기엔 덩치가 컸다.
갈레트가 작아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
갈레트는 날 안고 있던 팔을 내리고 덩치를 향해 돌아섰다.
어쩐지 그들의 대치 상황이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다고 생각한 그때, 덩치가 말했다.
“누구 닮아서 완전 쥐방울들이잖아? 동생한테 멋있는 모습 보여주고 싶다더니, 설욕전은 언제 하게?”
“야, 오늘 갈레트 생일이잖아.”
옆에 서 있던 분홍 머리의 소년이 슬쩍 덩치의 옆구리를 찔렀다.
설욕전?
“야, 크레페. 설룍? 서록전이 뭐야?”
카눌레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나는 그의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졌따가 갚아주는 거야.”
“그럼 저 녀석이 갈레트 형이랑 축제 때 싸웠던 그거?”
맞네!
나는 그제야 덩치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덩치가 이쪽을 보았다.
“저 녀석? 그거? 야, 꼬맹아. 지금 나한테 한 소리냐?”
아까도 말했듯이 남자는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덩치가 큰 편이었다.
그런 사람이 대놓고 까칠한 태도를 취하자 보통 험상궂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갈레트는 겁먹은 기색 없이 끼어들었다.
“애기들한테 그러지 마. 창피하지도 않아?”
비슷한 애기인 그가 말하기엔 그리 어울리는 문장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분위기에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덩치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나는 슬금슬금 다가가 갈레트의 소맷자락을 당겼다. 이러다 뭔 일이라도 날까 불안했다.
“오, 오빠, 그냥 가쟈. 저 밖에 기사님들도 이쓰니까…….”
오빠 아직 죽으려면 사 년이나 남았단 말이야! 이런 데서 저런 엑스트라한테 죽어나는 꼴 못 봐!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으나, 갈레트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좋아. 설욕전 지금 해.”
“오, 진심이냐?”
덩치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는 갈레트의 두 손이 야무지게 주먹을 말아 쥐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게 긴장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저 덩치를 이길 자신이 있어서 시비에 응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나와 우리 가족을 모욕한 것,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
갈레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이거 아무래도 내가 말리긴 힘들 것 같다.
나는 빠르게 포기하고 내 필살기인 ‘사람 불러오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갈레트에게도 말했듯이 파티장만 나가면 내 호위기사인 마르크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몸을 돌려 후다닥 건물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발걸음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형이 왜 싸워? 저 녀석이 시비 건 건 난데, 내가 싸워야지.”
“…….”
나는 내 귀가 잘못됐길 바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모두의 시선이 카눌레에게 향해 있는 걸 봐선, 역시 내가 잘 들은 게 맞는 것 같았다.
대체 이 상황은 뭔가요.
핑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렸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갈레트는 비틀거리는 날 붙잡아주었고, 시비를 걸었던 남학생은 카눌레를 향해 코웃음을 치며 홀을 나갔다. 물론 카눌레도 같이.
“크레페,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나!
나는 갈레트를 향해 홱 고개를 돌리고 그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 달려들었다.
“나 말구! 카눌레 오빠는? 오빠를 걱쩡해야지!”
“괜찮아. 진정해, 크레페. 이 정도 시비는 맨날 있는 일인데.”
“맨날?”
“으응.”
갈레트가 어눌하게 말하며 웃었다. 아무래도 그냥 둘러댄 얘기 같지는 않았다.
갈레트를 돕기라도 하듯, 아까 전 덩치를 말려주었던 분홍 머리의 소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귀족 학교잖아. 무례한 사람을 그냥 눈감아줄 순 없지. 아까 그 녀석은 평소에도 갈레트한테 좀… 시비를 자주 걸어. 공부로는 못 이겨서 그런가 봐. 나쁜 애는 아닌데…….”
“형. 애가 걱정하게 만들어서 어쩌려고.”
“아, 미안.”
갈레트가 살짝 만류하자 그가 곧바로 사과했다.
이런 싸움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게 귀족 사회의 일상이란 말이야?
지금껏 평화로운 가정에서 따순 밥 먹고 살아왔던 내게는 별세계 같은 정보였다.
“아무튼 보는 사람도 많으니 심하게 싸우진 않을 거야.”
“지굼 그게 문제야?!”
나는 왁 소리를 지르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품에 안은 채 허둥지둥 홀을 나갔다.
내가 이런 폭력적인 환경에서 애들을 키우려 했다니, 오빠들을 홈스쿨링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겠다!
“크레페 님? 아까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던데…….”
“어디로 갔는찌 아라요?”
내가 세상 급하게 묻자 마르크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들이 향한 곳은 피낭시에 제2기사단의 연무장이었다.
평소 카눌레에게 검술을 가르치던 단장이 건물에서 대련용 가검(假檢)을 들고 나왔다.
“자깐……!”
없는 체력에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숨이 차서 목소리가 잘 안 나왔다.
내가 카눌레를 부르려 하자 말없이 날 따라오던 갈레트가 내 어깨를 잡았다.
“크레페, 안 돼. 카눌레가 결정한 거잖아. 네가 끼어드는 건 카눌레의 명예를 더럽히는 거야.”
“…….”
그놈의 명예가 뭐라고.
만난 지 일 년도 더 된 아빠가 떠올랐다. 이런 때까지 명예 소릴 들어야 해?
“그렇습니다. 크레페 님은 그냥 지켜봐 주세요. 사용하는 것도 가검이고, 상황이 심각해진다면 단장님이 말려주실 겁니다.”
마르크도 그렇게 말하며 날 만류했다. 다들 하는 말이 똑같았다.
카눌레를 위해서 지켜봐 달라고.
나는 결국 입술을 앙다물고 카눌레가 잘 보이는 곳에 멈춰 섰다.
단장이 카눌레에게 가검을 건네주고 이어 덩치에게도 그것을 내밀었다. 덩치가 한 손으로 그걸 받아 들며 조소했다.
“하, 그 녀석 동생 아니랄까 봐 꼬맹이가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네.”
덩치가 검을 가져가려는데 단장이 손을 놓지 않았다.
그가 단장을 쳐다보자 단장이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쉬제트가의 연무장입니다. 예를 갖추십시오.”
“…백작님의 검을 빌립니다.”
덩치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단장이 그제야 손을 놓아주고 뒤로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춘 걸 보니 그가 심판을 맡기로 한 것 같았다.
“쳇.”
덩치가 작게 혀를 찼다. 내게도 들릴 정도였으니 카눌레가 못 들었을 리 없었지만, 카눌레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빌리시길.”
“대전!”
단장이 굵은 목소리로 외치며 손을 치켜들었다.
카눌레와 덩치가 서로 일정 거리를 두고 섰다.
이렇게 보니 역시나 말도 안 되는 체급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