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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21)화 (21/181)

21화 

“키슈 님이 너한테 재능 있다고 했다며?”

“아냐, 그래두 모르겠써.”

“와, 크레페. 도리도리 한 번만 더 해주라. 너무 귀엽다.”

“…….”

나는 불퉁하게 뺨을 부풀리고 갈레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갈레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곧장 사과했다.

“미안.”

그러면서 갈레트가 손가락으로 내 볼을 꾹 눌렀다.

“미안해.”

꾸욱. 꾸욱.

“진짜 미안.”

갈레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 뺨의 말랑말랑한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전혀 미안한 표정도 아니었기에 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저렇게 행복한 표정에 대고 무슨 말을 하겠나.

게다가 이제 나도 브라우니한테 이 짓을 하고 있는데.

품 안을 내려다보고는 한 팔로 브라우니를 안고 다른 쪽 손으로는 브라우니의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처음엔 내가 제 꼬리를 건드릴 때마다 돌아보던 브라우니였지만, 이젠 만지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쓸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손가락 사이를 간질이는 부드러운 감촉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음, 이게 먹이 사슬이라는 건가? 내리갈굼? 내리사랑?

“후우, 좋다아.”

마치 내 감상을 대신 말해 주듯, 갈레트는 내 뺨을 양껏 누르다가 만족한 듯 웃었다.

“오빠, 요즘 힘드러?”

나는 그의 태도가 조금 낯설게 느껴져 그렇게 물었다.

원래는 내 뺨을 누를 때도 싫다고 하면 바로 손을 뗐는데, 오늘 갈레트는 달랐다. 갑자기 마법을 배우겠다고 하질 않나.

“…….”

내 질문이 정곡을 찌르기라도 했던 걸까? 갈레트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테이블에 턱을 올렸다.

“저번 축제 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갈레트가 말했다.

“나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잖아. 근데 파타슈 님이 카눌레 밀어버리는 거 보고, 나도 그것만 할 수 있으면 다음엔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

잊고 있던 기억을 갈레트가 되살려놓았다.

나는 조금 놀랐다. 그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긴 줄 알았는데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갈레트는 부끄러운 듯 이마를 테이블에 대고 표정을 감췄다.

그래봤자 귀가 빨개져 있는 것은 훤히 보였지만.

“삐?”

내가 브라우니를 바닥에 내려놓자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갈레트에게 다가갔다.

갈레트가 얼굴을 돌려 테이블에 뺨을 댄 채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일어선 키와 갈레트의 앉은키가 똑같았다.

“그래두 나한텐 오빠가 훨씬 멋있었써.”

“…….”

평소 같으면 역시 나밖에 없다며 징징거리는 소리를 했겠지만, 이번에 갈레트는 조용히 팔을 들었다.

나는 헤헤 웃으며 갈레트의 품 안에 안겼다.

잘 마른 옷감 냄새가 섞인 비누 향이 났다. 갈레트의 냄새였다.

“나바께 없지?”

“응.”

그제야 갈레트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속삭였다.

“나한테도 오빠밖에 없써. 마법 못 해도 돼. 내가 지켜주께.”

* * *

갈레트가 브라우니를 한 팔로 안고 한 손으로는 녀석의 등가죽을 주물럭거렸다.

이제 브라우니는 완전 갈레트 전용의 장난감처럼 보였다.

브라우니가 저걸 싫어하는 것 같으면 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이젠 완전 해탈한 티벳 여우 같은 표정이고…….

“그러더니 그 형이 나한테 뭐랬는지 알아?”

갈레트는 분통이 터진다는 투로 말했다.

내게 하는 건지 브라우니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이었지만, 나는 잘 듣고 있다는 뜻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똑똑한 쵹하더니 별것도 없두라~ 그러는데 진짜, 나도 몇 년만 있으면 그만큼 커질 거라고! 축제 때 나 한 번 이겼다고 완전 기가 살아선! 시험만 보면 바닥인 게!”

“그럼그럼, 우리 오빠가 채고지!”

물론 그 형이라는 사람이 저런 혀 짧은 말투로 비꼬진 않았겠지만, 나는 굳이 태클 걸지 않고 곱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갈레트가 겨우 진정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높이 들고 갈레트의 어깨를… 음, 대충 어깨 근처를 토닥였다.

“휴우. 고맙다, 크레페. 내가 진짜 마법만 배우면 그 인간을 그냥…….”

“삐!”

브라우니를 만지작거리던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브라우니가 갈레트를 돌아보며 외마디 경고를 했다.

갈레트가 서둘러 사과했다.

“앗, 미안. 미안해, 브라우니.”

“쀼.”

브라우니가 콧바람을 흥, 내쉬고 다시 갈레트의 팔에 편하게 고개를 기댔다. 아무래도 갈레트는 훌륭히 조련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갈레트가 학교 다니느라 바빠서 그동안 신경을 못 써줬는데, 아무래도 나이 차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스트레스받을 일이 많았던 것 같았다.

“내일 칭구들도 초대해써?”

“으응. 엄마가 걱정하시는 것 같아서.”

내일이 바로 갈레트의 생일 파티 날이었다.

갈레트가 대답하고 옅은 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근심이 떠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도 조금 걱정됐다.

작년 갈레트의 생일에 학교 친구가 오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으니까.

하지만 올해마저 그의 생일이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간다면 엄마가 걱정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까지 그런 걱정이 들 정도였으니까.

혹시 어리다고 왕따라도 당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불안한 눈으로 갈레트를 올려다보았다.

갈레트가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쪼그려 앉아 나랑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크레페, 혹시 널 채가려는 나쁜 오빠들 있으면 꼭 말해 줘. 알겠지? 아니, 친절하게 말을 거는 언니들도 조심해야 돼! 꼭!”

“삐!”

“…….”

브라우니, 너까지 왜 이러니.

* * *

“걱정 마세요. 브라우니는 저희가 잘 돌보고 있을게요.”

“네에…….”

나는 키슈의 웃는 얼굴을 여러 번 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아기를 혼자 두고 가는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불안하긴 했지만 나는 이제 갈레트의 생일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하늘을 나는 망아지를 대공개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는 브라우니의 아빠인 파타슈가 잘 보살펴주겠지?

“얌전히 기다리고 이써어어!”

“쀼!”

멀리서 손을 흔들어주자 브라우니가 밝게 대답했다. 파타슈가 함께 있기 때문인지 걱정 따위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 키슈 님이랑 파타슈 님이 같이 있는데 뭔 일이야 나겠어?

나는 애써 밝은 생각을 하려 애쓰며 방으로 돌아갔다.

내가 방에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옷을 갈아입는 것이었다.

원래 파티 때 우리 가족의 드레스 코드는 제복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다른 어른들 없이 갈레트가 초대한 사람들만 모이는 날이었으니까.

이 옷차림도 또래끼리 편한 분위기에서 지낼 수 있도록 엄마가 배려해 준 것이었다.

“휴, 어때요? 괜찮죠?”

에이미가 내 시폰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부풀리며 물었다.

“네, 조아요!”

나는 싹싹하게 대답하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등에 묶인 커다란 리본이 팔랑거렸다.

에이미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역시, 요즘 단걸 줄인 보람이 있네요.”

“…요즘 호두 파이만 나온 게 그래서였써요?”

어쩐지 초코 파이를 해달라고 해도 무시하더니만.

내가 뚱한 표정을 짓자 에이미가 말없이 웃으며 내 머리를 땋아주었다.

어깨 정도 오는 반곱슬 머리카락을 굵게 엮어 머리띠처럼 반대쪽으로 넘기고, 땋은 머리가 끝나는 부분에는 큼지막한 보라색 보석이 박힌 꽃 핀과 작은 구슬 핀들을 꽂아 고정시켰다.

그리고 목에는 페가수스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작은 목걸이를, 가슴께에는 코르사주와 브로치를 달았다.

으음, 조금 무겁긴 하지만 모처럼 꾸몄으니 참아볼까.

일단 옷 사이즈가 넉넉했기에 숨 쉬는 데도 문제없었고 신발도 편했다. 얇고 바스락거리는 옷감으로 잔뜩 주름을 잡은 치마는 통풍도 잘 됐다.

흰색이라 더러워지면 빨래를 어떻게 할까 걱정되는 것 말고는 완벽했다.

…내가 너무 서민적인 걱정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 오늘 완전 꾸미고 나오셨네요?”

이제 완전 나의 파티 전담 호위기사로 자리매김한 마르크가 말을 붙였다.

나는 생긋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뜨 부탁해여, 기사님.”

“아이쿠, 여부가 있겠습니까, 레이디.”

내 손을 맞잡은 마르크가 장난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곧장 카눌레를 찾아갔다. 갈레트는 파티 주인공이라 나중에 따로 입장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카눌레의 방 앞에 도착하자, 카눌레가 마침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방에서 나왔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눈치였다.

“왜 구래?”

“…….”

내 질문에 카눌레는 대답 대신 어색한 듯 다리를 들고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무릎이 훤히 보이는 반바지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고, 장딴지에는 양말이 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가터까지 차고 있었다.

카눌레가 은근슬쩍 의견을 구했다.

“너무 애 같지 않냐?”

“오빠 애 맞자나.”

내가 단박에 대답하자 카눌레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차림새를 바꾸기엔 시간이 없었다.

나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카눌레에게 다가갔다.

“여기, 단추를 끝까지 채우면 갠차늘 거야.”

내가 두 손을 높이 들자 카눌레가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혀주었다.

나는 카눌레가 입은 스탠딩 칼라 셔츠의 제일 위에 달린 단추를 잠그려 손을 꼼지락댔다.

단추는 카눌레의 눈과 꼭 닮은 빨간색 보석이었다.

와, 나랑 카눌레는 이대로 가출해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겠다. 온몸이 돈이네.

상황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나는 몇 번의 실패 끝에 단추를 꿰는 데 성공했다.

“대따!”

내가 뿌듯하게 웃었다. 하지만 카눌레는 내 감정 변화엔 아랑곳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으, 가기 싫은데. 형이 또 잘난 체할 걸 생각하면…….”

카눌레가 껄끄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고 목깃을 만지작거렸다.

누가 들으면 갈레트가 자신의 조기 입학에 대해 으스대는 사람인 줄 알겠지만, 사실 갈레트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카눌레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요즘 카눌레는 검술 연습에 매진하느라 입학시험 공부는 전혀 못 하고 있었으니까.

이번 입학시험에는 떨어질 게 뻔한데, 그 와중에 갈레트의 학교 친구들이 잔뜩 초대받았다니 이 자리가 불편할 만도 하지.

“그래도 어쩔 쑤 없자나. 갈레트 오빠 생일이니까.”

내가 카눌레의 등을 토닥토닥했다.

한풀 기가 꺾인 카눌레가 대답했다.

“…그치.”

누가 그걸 모르냐며 톡 쏘아줄 법도 한데, 카눌레는 그냥 긍정하는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에구, 안쓰러운 우리 오빠.

나는 열심히 그를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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