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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20)화 (20/181)
  • 20화 

    “에휴, 방학하니 살 만하다. 방학 없었으면 우리 크레페랑 놀지도 못하구, 어떻게 살아아!”

    갈레트가 날 안고 이리 빙글 저리 빙글 돌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파티 때 입을 옷 치수를 재러 가겠다고 했는데 이제 일이 끝난 모양이었다.

    노는 걸로 보였는지 브라우니가 내 발밑에서 방방 뛰어다녔다.

    “…어어, 동생 사랑이 대다나네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던 파타슈가 말했다.

    “진짜 부끄럽다니깐.”

    카눌레가 차마 우리 쪽을 보지도 못하고 중얼거렸다.

    “오빠, 어지러어!”

    “아이구, 그래.”

    갈레트가 그제야 나를 놓아주었다. 그러고서 우리 쪽을 보고 있던 파타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파타슈 님도 입학 준비를 하신댔죠?”

    “아, 네에.”

    파타슈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갈레트가 방학을 하기 전엔 행동반경이 겹칠 일이 없었으니 어색할 법도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좀 어색했다. 오빠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나는 웬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왜?”

    “카눌레도 입학해야 하니까, 파타슈 님까지 다 같이 모여서 공부하는 게 어떨까 해서. 마침 방학이니까 서로 도우면서 하면 좋잖아.”

    카눌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꿍꿍이야?”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카눌레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갈레트는 한 번도 공부에 신경 쓰는 티를 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생판 남인 파타슈한테까지?

    그러나 카눌레가 의구심을 품은 건 다른 부분에서였다.

    “형이 웬일로 나한테 신경을 써?”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 동생이 크레페 하나야? 카눌레 너도…….”

    갈레트가 필요 이상으로 격렬히 부정하며 카눌레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눌레는 자신의 옷자락에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질색하며 물러났다.

    “징그러!”

    “…….”

    갈레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저건 갈레트가 내 위로를 받고 싶어 할 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카눌레 탓이니 내가 나서서 토닥여주기도 뭐해서, 나는 그쪽에 다가가는 대신 내 발치를 맴도는 브라우니를 안아 들었다.

    시무룩해 있던 갈레트가 날 힐끔 쳐다보았다.

    “나 위로 안 해줘……?”

    음, 이런 걸 보면 역시 카눌레는 안중에 없는 것 같은데.

    “제가 끼어 이써도 대요?”

    잠깐 잊혀 있던 파타슈가 나서서 물었다.

    “그럼요!”

    갈레트가 곧바로 대답했다.

    “으음…….”

    나는 갈레트를 보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 석연치 않았다.

    파타슈는 다섯 살이다. 그 정도 어린애가 공부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갈레트의 나이는 무려 파타슈의 두 배도 넘었다.

    “같이 공부할 게 있써?”

    내가 묻자 갈레트는 마침 말 잘했다는 듯 싱긋 웃었다.

    “파타슈 님한테 마나 다루는 걸 배우고 싶어서.”

    * * *

    미래의 대마법사 파타슈에게 배우는 방학 마법 특강.

    주의. 선생님 현재 나이 다섯 살.

    이게 무슨 시트콤 같은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벌어져 있었다.

    오빠들과 나는 도서관에 줄지어 앉아 수업을 들을 준비를 했다.

    “나는 마법에 관심도 없는데 왜…….”

    “가만히 있어. 입학시험 공부는 너도 해야 하잖아.”

    카눌레의 투덜거리는 말을 갈레트가 단숨에 제압했다.

    카눌레는 입술을 비죽였지만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걸 보니 관심은 있는 듯했다.

    내가 그에게 속삭였다.

    “파타슈 님 마법은 못 쓰는 거 알찌? 마법진 때문이면 딴 거 하러 가도 대.”

    “네가 뭘 안다고…….”

    오지랖처럼 들렸는지 카눌레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책상 위를 마당 삼아 산책하고 있던 브라우니가 후다닥 달려와 카눌레를 향해 푸릉거렸다.

    카눌레가 브라우니와 눈싸움을 하다가 팩 고개를 돌렸다.

    “쳇, 내가 말을 말지.”

    “삑!”

    브라우니가 코웃음을 치듯 짧게 울었다. 그때 파타슈가 도서관에 들어왔다.

    “키슈 님이 갠찮대요! 그럼…….”

    파타슈가 짧게 말하고 긴 책상의 끝부분, 상석에 앉았다. 나는 파타슈를 향해 몸을 틀어 그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파타슈가 브라우니를 보며 손을 뻗었다. 브라우니가 책상 위를 걸어 익숙하게 파타슈의 자리를 향해 갔다.

    “우쩌는 브라우니로 연습하께요. 이러케 손을 대고요.”

    파타슈는 거두절미하고 브라우니의 등에 양손을 댔다. 겉보기로는 변화가 없었지만 브라우니는 마치 마사지라도 받는 듯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는 많이 본 장면이었다. 브라우니는 파타슈의 마나를 마치 부모가 주는 간식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내가 브라우니를 쓰다듬는 만큼 파타슈는 브라우니에게 마나를 나누어 주곤 했다.

    “휴우, 봤쬬?”

    잠시 시간이 지난 후 파타슈가 손을 뗐다. 브라우니가 기분 좋은 듯 팔딱팔딱 뛰었다.

    “뭐야? 어쩌라고?”

    물론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손을 대고 있을 뿐이었지만.

    카눌레가 괴상한 표정으로 묻자 파타슈는 조금 곤란한 듯 브라우니의 엉덩이를 떠밀었다.

    “아무튼 해바요. 브라우니한테 손을 대면 먼가 느껴질 꺼예요.”

    “…….”

    브라우니가 곧장 내 앞으로 돌아왔다.

    내 양옆에 앉아 있던 갈레트와 카눌레가 손을 뻗어 브라우니의 등에 손바닥을 올렸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탔으니 놀랄 법도 했지만 브라우니는 고개만 갸우뚱하고 말았다.

    뭔가 느껴질 거라구?

    나도 브라우니의 양 뺨에 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이렇게 쓰다듬는 게 처음도 아니고, 대체 뭐가 느껴질 거라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왔다.

    부드러운 털? 심장 소리?

    “…바보 같아.”

    카눌레가 혀를 차고 제일 먼저 손을 뗐다.

    “다섯 살짜리가 가르치긴 뭘 가르쳐? 난 아직도 이놈이 페가수스라는 것도 안 믿기는데.”

    그러며 카눌레는 브라우니의 머리를 수박 통 확인하듯 두드렸다.

    “얘 아직 날지도 못하지? 날개도 없고. 그냥 돌연변이 망아지 아냐?”

    “삑!”

    브라우니가 강아지처럼 짖었다.

    “어쭈?”

    “오빠, 싸우지 마아.”

    “흥, 내가 뭘 했다고. 요즘 망아지는 사람 말이라도 알아듣는대?”

    카눌레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내가 카눌레와 입씨름을 하는 사이에도 갈레트는 브라우니의 몸통을 붙잡고 집중하듯 끙끙거리고 있었다.

    “형도 적당히 해. 저깟 꼬맹이 말을 어떻게 믿어?”

    “삐우!”

    그때 갈레트가 브라우니를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카눌레의 이마 바로 앞에 브라우니를 가져다 대고 녀석이 뒷발차기를 하도록 시켰다.

    “끄악! 이 녀석이…….”

    아니, 뭔가 이상한데?

    나는 멍청한 얼굴로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갈레트가 깜짝 놀라 브라우니를 놓았다.

    “나, 나 아니야!”

    “브라우니!”

    나는 브라우니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라도 할까 다급히 브라우니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브라우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책상에 사뿐히 내려앉아 내 쪽을 돌아보았다.

    “쀼?”

    “…….”

    “페가수스 맞나 바요.”

    말을 잃은 우리의 귓속으로 파타슈의 한마디 말이 들렸다.

    “브라우니, 착하지?”

    “삐?”

    브라우니는 침대 위에 둥둥 뜬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갈레트가 어르고 달래며 침대에 올라가 양팔을 위로 뻗었다. 하지만 여전히 브라우니에게 손이 닿진 않았다.

    “그래, 얌전히 있어라아…….”

    갈레트가 상냥하게 말하고 살짝 다리를 구부렸다. 그리고 한순간에 무릎을 펴고 뛰어올랐다.

    침대의 힘을 빌린 발군의 점프력에 브라우니가 맥없이 잡혔다.

    “삐이이이! 뿌우우! 삐우우!”

    “어허, 얌전히 있으라니깐.”

    브라우니가 몸을 비틀며 발버둥을 쳤다. 세게 뛰어오른 반동으로 갈레트는 아직도 침대에서 방방 뛰고 있었다.

    항상 어른스러운 모습만 보다가 이런 걸 보니 이제야 좀 어린애 같네.

    키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갈레트도 브라우니도 귀엽기 그지없었다. 원래 모든 생물은 아기 때가 제일 귀엽다고 했던가?

    나는 갈레트 방에 있는 의자에 앉아 갈레트와 브라우니가 씨름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귀여운 것과 별개로, 시간은 이미 밤이었기에 하품을 참을 수는 없었다.

    “하움…….”

    “삐이.”

    브라우니가 안 도와줄 거냐는 듯한 처량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았다.

    “…쪼금만 참자, 브라우니.”

    나는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브라우니가 세상이 무너진 듯 충격받은 모습으로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다.

    “삐우우우…….”

    “와, 얘 진짜 똑똑하다. 말 다 알아듣나 봐.”

    갈레트가 신기하다는 듯 말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브라우니의 눈을 빤히 마주 보았다.

    브라우니가 맘에 들지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싫다자나. 브라우니 잘 시간 다 됐쓰니까 빨리해애.”

    나는 갈레트를 재촉하며 방금 만들어진 따끈한 달고나처럼 티 테이블에 들러붙었다.

    돌로 만들어진 테이블이라 뺨에 닿는 감촉이 시원하니 좋았다.

    내 눈 닿는 벽에 우리 가족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다섯 살 생일 때 그려졌던, 제복을 입은 가족들 사이에서 나만 드레스를 입은 그림.

    저게 갈레트 방에 와 있었구나.

    나는 어쩐지 민망해져서 시선을 돌려 갈레트를 쳐다보았다. 갈레트가 저에게 대답을 재촉하는 줄 알았는지 멋쩍게 웃었다.

    “응, 미안. 금방 할게.”

    그러고서 갈레트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브라우니의 등가죽을 신중하게 문질거리기 시작했다.

    “풋.”

    나는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표정이 진지해서 더 웃겼다.

    “안마해 주는 거야?”

    “쉿. 집중하게.”

    갈레트가 다시 진지하게 입을 다물고 브라우니를 조몰락거렸다.

    사실 그의 목표는 학대도 안마도 아닌 자습이었으니 나도 그를 더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한동안 브라우니의 갈기 개수까지 셀 듯 집중하던 갈레트는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으으, 모르겠다.”

    자유의 몸이 된 브라우니가 공중을 헤엄쳐 내 품으로 쏙 들어왔다.

    나는 의자에 늘어진 갈레트를 보며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같이 마법을 배우자고 권한 건 나지만, 이렇게 열심히 해줄 줄은 몰랐는데.

    “너무 무리하지 마. 급하면 키슈 님한테 배울 수도 있짜나. 아마 키슈 님이 허락해 주신 것두 파타슈 님 공부 때문이었쓸걸.”

    나는 그렇게 말하며 브라우니를 쓰다듬었다.

    갈레트가 애교 부리는 브라우니를 빤히 보다가 내게 물었다.

    “너는 느껴져?”

    “으음… 아니.”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나름 키슈에게 마법 재능을 가졌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역시 파타슈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브라우니가 공중에 뜨는 게 마나를 어떻게 해서 그런 거라는 얘긴 들었지만……. 나한텐 그냥 공중에서 헤엄치는 평범한 망아지로만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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