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의 눈을 마주볼 수는 없었지만, 팔이나 어깨가 잔뜩 굳어있는 걸 보면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것이 분명했다.
“제가 태어난 데가 바움쿠헨 옆이었꺼든요.”
바움쿠헨은 우리 슈트루델의 북서쪽에 있는 나라였다.
지금은 서로 사절단도 오가는 관계지만,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오랜 전쟁이 있었던지라 우리에게 그리 인식이 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피부색이나 사나운 눈매 같은 게 이국적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외국인이었던 건가? 어쩌면 혼혈일지도 모르겠네.
내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파타슈의 말이 이어졌다.
“아시게찌만 저는 고아였꼬, 같은 마을에 사는 애기들도 어른들도 다 저를 시러했쩌요. 다르게 생겨쓰니까.”
“…….”
다섯 살이면 어디 앵벌이 그룹에 끌려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해야 할 만큼 어린 나이였다.
나는 귀족이지만 계급 사회가 원래 그렇듯 평민에게는 내가 생각하지 못할 만큼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파타슈처럼 ‘보통과 다르게’ 생겼다면 더욱.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키슈 님을 만나기 전까지, 제가 어떠케 살았는지 아라요?”
파타슈가 질문했다.
그러나 대답을 원한 건 아닌 듯, 그는 답을 기다리는 대신 한 손을 들어 카눌레를 가리켰다.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파, 파타슈 님? 설마…….”
후웅!
내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과 동시에 맞은편에서부터 풍압이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
붙잡을 새도 없이 카눌레가 의자째로 뒤로 쿠당탕 넘어졌다.
“악!”
아까 연무장에서처럼 카눌레는 꼴사납게 발라당 뒤집어져 있었다.
파타슈가 그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카눌레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기에 파타슈의 시선은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시비 거는 사람들한테 다 갚아쭈면서 살았어요.”
“너, 설마 아까 연무장에서도……!”
카눌레가 뒤늦게 깨닫고 이를 갈았다.
파타슈는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말했다.
“귀족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찌만, 내가 마법사 대면 후회할껄요.”
“이 자식이…….”
카눌레는 당장이라도 파타슈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내가 서둘러 의자에서 내려와 카눌레를 말렸다.
“오빠, 파타슈 님 덕에 브라우니도 태어난 거자나. 그리고…….”
나는 파타슈가 있는 쪽을 힐끗 보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중에 나랑 갈레트 오빠가 마탑에 드러가면 마주칠지도 모른다구!”
“…….”
그렇게 말하자 카눌레도 이만 바득바득 갈 뿐 더 이상 시비 거는 말은 하지 않았다.
“쳇. 내가 봐준다.”
카눌레가 못마땅한 듯 중얼거리고 의자를 일으켜 탁, 소리 나게 놓았다.
그리고 거기 털썩 앉아서 빔이라도 나올 것 같은 눈으로 파타슈를 째려보았다.
파타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포크를 들고 앞에 있는 호두 파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어… 이 정도면 대충 정리됐다고 봐도 괜찮을까?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기분으로 슬슬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문득 옆에 앉은 갈레트를 보니 그는 파타슈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 내 시선을 느낀 듯 그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응? 왜 그래?”
“아, 아냐…….”
이 찝찝함은 기분 탓이겠지?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하자 갈레트가 싱긋 웃고는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큰오빠가 파타슈한테 아무 말도 안 해써!”
“삣?!”
나는 침대에서 누워 있다 말고 빽 소리 질렀다. 내 얼굴 옆에서 자고 있던 브라우니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에구, 미안.”
브라우니가 태어난 첫날이니만큼 아직 녀석의 존재가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깜빡 잊어서 미안하다며 브라우니의 목덜미를 살살 긁어주었다. 녀석이 하품을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잠들 수 없었다.
왠지 갈레트에 대해 꺼림칙한 기분이 느껴진다 했더니만, 생각해 보니 이유가 분명했다. 갈레트가 파타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파타슈가 마나로 바람을 일으켰을 때, 카눌레는 물론이고 하마터면 자신이나 나까지 휩쓸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의 갈레트는 꼭 딴생각을 하고 있던 것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사람 같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건 갈레트답지 않았다.
그야, 내가 다칠 뻔했으니까!
“…끄흠.”
내 생각에 혼자 민망해져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속사정이 무엇이든 간에 파타슈가 우리 가족을 안 좋게 생각하면 곤란했다.
앞으로 훌륭한 마법사가 될 그의 재능도 신경 쓰였지만, 그보다는 브라우니가 성장할 때 파타슈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나는 진지하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다가 브라우니를 향해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브라우니를 향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브라우니, 내가 잘 키워주께. 그니까 어서 커서 우리 가족 지켜줘. 알게찌?”
“삐이…….”
완전히 잠든 줄 알았던 브라우니가 자신에게 하는 말인 걸 아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나는 졸음에 찬 브라우니를 보며 작게 키득거렸다.
“혹시 내 얘기 다 아라듣는 거 아냐?”
“히움.”
브라우니가 크게 하품을 했다.
당연히 그렇게 똑똑할 리가 없나?
실없는 생각은 거기까지 하고, 나는 다시 천장을 향해 바로 누웠다.
브라우니가 있는 오른쪽 목 옆이 따끈따끈했다. 어딘가 위안이 되는 생명의 체온이었다.
“있찌, 브라우니. 그거 알아?”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나 사실 크레페가 아니다? 여기도 책 속이야.”
밤늦은 시간이라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도 없을 때였다.
나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나지막이 털어놓았다.
“내가 소설 속에 드러온 거야. 크레페로 다시 태어나서. 그래서 난 미래를 알아. 내가 암것도 안 하면 갈레트 오빠랑 엄마가 죽을찌도 모른다구. 그니까 브라우니, 네가 지켜줘야 대.”
“삐유…….”
대답이라도 하듯 졸음 묻은 소리가 돌아왔다.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실은 있찌, 브라우니 너두 원래 여기 이쓰면 안 돼. 내가 빼돌린 거야. 원래는 너, 한참 나중에 태어나쓸걸? 진짜 네 주인은 아펠이라는 사람인데…….”
“삐익.”
내가 아펠이라는 이름을 꺼내자 갑자기 브라우니가 몸을 일으켜 베개 옆에 섰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반응이었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아는 이름… 웁.”
브라우니가 내 입을 배 밑에 깔고 누웠다.
…졸린데 내가 시끄럽게 했구나. 미안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위안을 받아볼까 했더니만.
나는 길게 콧바람을 내쉬었다. 브라우니의 털이 살랑거리며 희미한 우유 냄새가 느껴졌다.
“삐이…….”
나는 내 입을 깔고 그대로 잠에 빠진 브라우니를 조심스럽게 들어 옆에 옮겨놓았다.
부풀었다 가라앉는 배, 부드러운 털, 움찔거리는 귀 같은 것을 바라보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엄마가 힘든 소리 해서 미안해.
나는 브라우니의 꼬리를 살살 만지다가 어느새 같이 잠이 들었다.
【 갈레트의 생일 파티 】
내 생일은 봄, 갈레트의 생일은 여름이었다.
앞서 나의 여섯 번째 생일 파티를 마쳤고 그다음부터 몇 주 동안은 브라우니 일로 바빴으니, 어느덧 시간은 흘러 갈레트의 열한 살 생일이 가까워진 상태였다.
“맛이써?”
“삐!”
똑똑한 건지 그냥 알아들은 척만 하는 건지, 내 물음에 대꾸하듯 울음소리를 낸 브라우니가 들풀 더미에 코를 박았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브라우니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름 들풀과 연한 꽃잎들, 작은 야생화 사이에 파묻힌 인형만 한 망아지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너 말야, 혼자만 너무 낭만을 즐기는 거 아니냐?”
“아, 왔써?”
나는 잔디밭에서 일어나 카눌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풀 더미에 파고들어 가 있던 브라우니가 깡충 뛰어 나를 따라왔다.
“쳇.”
더도 덜도 말고 딱 평소만큼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카눌레가 혀를 찼다.
그의 품에 방금 따 온 꽃들이 한 아름 안겨 있었다. 카눌레가 풀 더미에 자신이 가져온 들풀을 쏟았다.
“삐유우!”
브라우니가 환호성을 지르고 침대에 다이빙하듯 거기에 몸을 날렸다.
내게는 흐뭇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었지만 카눌레는 저 모습마저도 탐탁지 않은 듯했다.
“너 진짜 저거 안 넘길 거야? 우리 정원 거덜 나겠다.”
“우리 브라우니를 넘기긴 어딜 넘겨!”
“어디긴! 아빠도 그랬잖아. 이런 발견을 우리가 감추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황제님한테든 황비님한테든 황자님한테든, 아무튼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어른드리 알아서 하시겠쬬. 게다가 어짜피 키울 쑤 있는 건 우리밖에 없짜나요.”
역시나 풀을 뜯어 윗옷에 담아 온 파타슈가 브라우니 위에 풀을 쏟아부었다.
카눌레에 비하면 체구가 작은 만큼 가득 가져온 들풀도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카눌레는 파타슈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번 사건 이후 둘의 관계는 앙숙이나 다름없었기에 나는 카눌레의 주의를 돌리려 끼어들었다.
“맞아! 저번에 키슈 님이 그랬자나. 브라우니가 나랑 파타슈 님한테 각인된 거 같다구. 물이나 풀도 파타슈 님이 마나로 한 번 정화시켜 줘야 먹고, 내가 옆에 없으면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으니깐.”
“…흥.”
카눌레가 말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딱히 맞받아칠 말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가긴? 각인? 그게 먼지 아라요?”
파타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브라우니의 식사 문제로 만날 일이 잦아져서 이제 그도 전처럼 날 어렵게 대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한테도 언제 돌변할까 불안하기도 하군.
“어어, 각인이 그러니까…….”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리나 거위 같은 애들이 알에서 깨어나서 처음 보는 걸 부모로 생각하고 따라다니는 현상이에요. 자극에 노출되는 결정적 시기가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말만 들어서는 키슈나 다른 연구원쯤 되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아직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인물이 또 있을 리가 없었다.
“갈레트 오빠, 여기까지 무슨 일루 왔써?”
“내 동생 보러 왔지!”
갈레트가 금세 촐랑거리는 태도로 다가와 나를 꼬옥 안았다.
다행히 그는 카눌레와 달리 파타슈를 대하는 태도가 날카롭지 않았다.
평민 출신이긴 했지만 마법사의 양자로 들어갈 만큼 미래가 유망한 인물이니 함부로 대하는 게 이상했다.
이렇게 말하니 졸지에 카눌레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지만, 사실이니까 뭐.